세상에서 가장 거리가 먼 게 머리부터 가슴까지라는 말을 순간 절감했다. 아침에 일어나 여느 때처럼 신문을 읽다가 광고면의 '300'이라는 숫자에 꽂혔다. 강제 해직된 두 여성 노동자가 고용 승계를 요구하며 공장 건물의 옥상에서 농성을 벌인 지 300일이 됐다는 내용이다.

사실 모르진 않았다. 지난 2022년 공장의 화재로 폐업을 결정한 뒤 전체 노동자를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받았고, 이를 거부한 17명은 정리해고했다. 이들 중 7명은 모기업이 같을뿐더러 동일한 제품을 생산하는 평택의 다른 자회사 공장으로 고용 승계해 달라고 요구하며 농성 중이다.

일본 기업 니토덴코가 100% 지분을 소유한 한국 옵티칼 하이테크 구미 공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폐업한 뒤 생산 물량이 평택으로 옮겨져 노동자들의 고용 승계 요구는 당연했지만, 기업은 외면했고 되레 평택공장에 별도의 인력을 새로 채용했다.

그들로부터 제품을 납품받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기업은 문제 해결에 나서지 않고 있다. 납품업체 소속 노동자들의 생존권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 형국인 걸까. 언론의 시선도 오래 머물지 않았다.

누구는 '연대 버스'라고 했고, 다른 누구는 '희망 버스'라고 불렀다. 지난여름의 역대급 폭염을 콘크리트 건물 옥상에서 오롯이 견뎌낸 그들이 외롭지 않도록 손 맞잡아주자는 제안이었다. 농성 300일째인 11월 2일에 맞춰 전국 각지에서 '응원군'을 실은 버스가 모일 예정이었다.

"빈자리가 없는데, 어쩌죠?"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담당자의 목소리엔 아쉬움과 고마움이 반반 섞여 있었다. 버스 대신 승합차 두 대로 가게 됐다면서, 단체 참가 신청인지를 먼저 물었다. 비록 출발 하루 전이지만, 그렇다면 차량을 추가로 섭외해야 한다는 뜻이다. 혼자라고 했더니 조금은 놀란 목소리였다.

담당자로서 기대보다 신청자 수가 적다는 아쉬움이 내 전화 한 통으로 위로받은 듯했다. 그도 알 것이다. 직접 버스를 타지는 못 하지만, 그들과 뜻을 함께하는 이들이 전국 방방곡곡에 적지 않다는 사실을. 지금도 그들의 농성 소식을 전하는 카톡 상태 메시지가 속속 올라온다.

편도 240km를 달려 도착한 곳

이곳 광주에서 경북 구미로 가는 길은 멀었다. 그러나 무심했던 나를 반성하고 가슴이 시키는 대로 가야만 한다는 다짐이 편도 240km라는 물리적 거리를 훨씬 가깝게 느껴지도록 했다.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를 주고 힘이 될 수 있다면 그깟 피곤함쯤이야 문제 될 건 없었다.

오후 2시로 예정된 집회에는 부러 참석하지 않았다. 전국에서 모인 '동지'들과 어깨를 겯고 함성을 지르는 벅찬 감동을 포기하는 대신, 300일 동안 사회적 냉대와 무관심으로 방치된 현장을 사죄하듯 걷고 싶었다. 운이 닿는다면, 농성 중인 두 분과 대화를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가던 오후 5시 반경 농성 현장에 도착했다. 구호와 함성으로 뒤덮였을 공장 앞 너른 주차장에는 사방에 내걸린 현수막들만이 늦가을 칼바람에 맞서 펄럭이고 있었다. 마치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라는, 고용 승계를 책임지라는 울부짖음처럼 들렸다.

단체의 일원으로 참가했다면, 집회 시간에 맞춰 왔을 것이다. 주차장의 어느 한쪽에서 단체의 이름이 적힌 깃발 아래 줄지어 앉아 주먹을 불끈 쥔 채 목청을 돋웠을 것이다. 여느 집회가 그러하듯, 농성 중인 그들을 향한 연대의 외침은 기실 자신을 향한 위로이자 다짐이 될 테다.

그런데도 어둠이 사위에 내린 그 시간에 찾아온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모두가 한꺼번에 떠난 뒤 그들에게 엄습해 올 쓸쓸함이 걱정됐다. 마치 온 가족이 모여 이야기꽃을 피운 명절 연휴의 마지막 날, 자녀들의 귀경길에 배웅 나와 손 흔드는 부모님의 쓸쓸한 모습과 겹쳤다.


빈 아스팔트 주차장을 청소하듯 쓸고 지나가는 스산한 바람 소리를 그들도 듣고 있을 테다. 달빛조차 구름에 가려 유난히 어두웠던 저녁, 그곳에 사람이 있음을 알려주는 거라곤 옥상 벽에 청사초롱처럼 걸어둔 갓 씌운 전등 두 개가 전부였다. 사람이 그립다는 뜻으로 읽혔다.

"박정혜 선생님, 소현숙 선생님!"

내 발자국 소리가 귀에 들릴 정도로 고요한 그곳에 서서 조심스럽게 그들을 불렀다. 나이로 치면, 띠동갑 차이도 넘는 손아래라고 해도 '동지' 대신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어울릴 것 같았다. 그들은 명색이 교사인 내게 교육의 본령을 새삼 일깨워준 스승이라는 생각에서다.

무릇 교육이란 아이들에게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 곧 인권 감수성을 길러주는 일이다. 아무리 학업 성취도가 높고 재능이 출중하더라도 타인에 대한 인권 감수성이 없다면, 그들의 능력은 사회적 흉기일 뿐이다. 곧, 두 노동자를 외면한 채 교육 운운하는 건 민망한 일이다.

부르는 소리가 너무 작아서였을까. 인기척이 없었다. 아마도 낮 동안 집회 때 모든 걸 쏟아낸 뒤 피곤함에 절어 잠든 것일 테다. 지난 300일 동안 그들의 거처가 돼준 천막은 밤하늘의 어둠보다 더 짙고 적막했다. 옥상을 향해 그들의 이름을 두 번 부르고는 이렇게 외쳤다.

"부디 힘내십시오. 끝까지 함께하겠습니다."

더는 현수막의 글귀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주변이 캄캄해졌다. 가로등도 없어 나가는 문조차 찾기 힘들었다. 낮 동안의 인파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의 쓸쓸함보다 이젠 짙은 어둠과 고요가 그들에게 끼칠 두려움이 걱정됐다. 언제쯤이 되어야 그들은 '이겨서 땅을 딛게 될까'.

돌아오는 길, 주말의 휘황찬란한 구미 시내의 번화가를 관통했다. 당장 '외국인 투자 지역'만 벗어나도 고층 아파트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그곳 베란다에 서면 농성 현장이 발아래로 내다보일 테다. 반대로 두 노동자는 마천루 같은 그곳을 매일 올려다보았을 것이다.

한 도시 안에 컬러와 흑백 사진처럼 극단적인 두 가지 풍경이 공존하는 현실이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졌다. 둘의 간극은 우리네 머리와 가슴 사이의 거리처럼 멀고도 넓게만 보였다. 그것은 어쩌면 두 노동자의 목숨을 건 투쟁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이 투영된 결과인지도 모른다.


듣자니까, 얼마 전 민주노총과 금속노조가 폐업한 한국 옵티칼의 모기업인 일본 니토덴코와 그들로부터 엘시디 편광필름을 납품받는 엘지디스플레이를 상대로 OECD 국내연락사무소에 진정을 냈다고 한다. 기업의 책임경영 의무를 규정한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을 위반했다는 혐의다. 혐의가 인정돼도 구속력이 없어 한계가 뚜렷하다.

결국 소비자인 시민들이 나서야 하지만, 대기업이 시장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마저도 어렵다. 이 문제를 수수방관하고 있는 현 정부와 지역 정치권을 향한 분노로 비화하고 있는 이유다. 더 늦기 전에, 시민들의 외침에 정부는 답을 내놓아야 한다.

"일본의 기업 니토덴코가 쓰다 버린 노동자, 대한민국 정부마저 버릴 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