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한 학생과 난임 선생님의 아슬아슬한 동행
[넘버링 무비 409] 영화 <최소한의 선의>
▲ 영화 <최소한의 선의> 스틸컷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싸이더스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내내 고등학교 3학년 담임만 맡아왔던 희연(장윤주 분)은 이번에 처음으로 1학년 담임을 요청했다. 난임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조금이나마 줄여보기 위해서다. 학생들 진학도 곧잘 해내던 선생이 갑자기 학년을 이동한다니 주변에서는 이유를 궁금해하지만 굳이 사실을 밝히지는 않는다. 비슷한 시기 학교에서는 1학년 학생 가운데 임신한 아이가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같은 반 학생 유미(최수인 분)다. 임신 초기 증상으로 내내 졸려 하는 학생과 점심시간도 걸러 가며 한약을 챙겨 먹고 쪽잠을 청하는 선생님. 영화 <최소한의 선의>는 서로 다른 자리에서 잠들어 있는 두 사람의 장면을 교환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02.
김현정 감독은 그동안의 작품 활동을 통해 '이해'의 의미를 탐구하고 표현하는데 많은 애를 써왔다. 현실적인 문제와 어긋난 관계로 인해 서로 다른 자리에 서 있던 인물이 점차 거리를 좁혀가는 식의 방법을 통해서다. 화해나 수용의 의미와는 조금 다르다. 이야기의 마지막에서도 완전히 포개지지는 않는다. 여기에서 현실감이 반영된다. 우리 모두는 타인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것까지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완벽히' 할 수는 없다. 작품으로 보자면 가까이는 <흐르다>(2023)의 아버지 형석(박지일 분)과 딸 진영(이설 분), <유령극>(2023)의 할아버지(서인수 분)와 손자(고예준 분)가 있다. 이들 모두는 이해의 과정을 통해 손을 내밀 수 있는 존재가 되거나, 되고자 한다.
이번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의 결이 느껴진다. 중심이 되는 것은 희연이다. 영화의 시작점에서 그는 같은 반 학생 유미에게 원칙적이면서도 방어적인 태도를 보인다. 하루라도 빨리 학교에서 내보낼 궁리를 하는 다른 선생님에 비하면 퇴학보다는 자퇴를 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쪽에 속하지만, 그 역시 선의에 의한 것은 아니다. 집에는 알리지 말아 달라는, 중절 수술을 위해 돈을 빌려달라는 유미의 요청에도 상황을 알아보기보다는 원칙적으로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학교에 의한 딸의 자퇴 권유 앞에서 공교육의 책임과 소신을 되묻는 유미의 아버지 앞에서도 자신에게 학생은 유미 하나만이 아니라고 항변하는 것이 그다.
태도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중요한 계기는 경험의 공유다. 오랫동안 힘들어했던 임신에 성공한 후 자신의 집으로 찾아온 만삭 유미가 하혈하며 울부짖는 모습을 직접 지켜보면서 희연의 모습은 조금씩 바뀌어간다. 유미의 경험이 학생의 임신이 아닌 여성의 임신으로 전환되는 지점이다. 이 변화가 중요한 이유는 희연이 내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선의'라는 것의 형태와 범위가 완전히 달라져서다. 임신한 학생이 퇴학이 아니라 자퇴를 할 수 있게 돕는 선의는 이제 임신한 여성이 원하는 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있도록 돕는 선의가 된다.
▲ 영화 <최소한의 선의> 스틸컷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싸이더스
03.
"언니도 아기 버렸어? 엄마들은 왜 항상 아기를 버리는데?"
영화 <최소한의 선의>에서 전면에 내세워지는 것은 희연과 유미 사이의 관계지만, 흔들리는 두 사람을 지지하기 위한 주변 인물과의 관계 역시 중요하다. 여기에서 지지한다는 뜻은 뒷받침한다는 것이지 찬동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가령, 유미에게 있어 서브 텍스트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동생 유정(김수형 분)이다.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 이후 두 사람은 서로를 의지하며 성장해 왔다. 특히 8살 때부터 언니의 돌봄을 받아왔던 동생에게 유미의 임신은 잘못이 아닌 축복의 대상이 된다. 미혼모 센터에서 유미가 돌아오던 날 처음 만날 조카의 분유를 사서 돌아온 것도 그래서다. 집에 조카가 없다는 사실이 자신들을 버린 엄마와 연결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유정과의 관계, 동생의 말이 아니었더라도 유미가 결정을 되돌릴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희연에게는 남편 재우(김민재 분)가 있다. 그는 아직 협의의 선의를 갖고 있는 희연에게, 조금 더 나아가 영화 전체에 중요한 물음을 던진다. 도울 수 있는 능력과 환경 속에 있는데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를 돕지 않는 일이 부도덕한 일인가 하는 문제다. 이 장면에서 희연은 지금 자신이 놓인 상황만으로도 충분히 버겁다고 말하지만, 영화가 이 장면을 연결하는 대상은 그가 말하는 현실이 아닌 바로 다음 장면인 급식실 신이다. 2주 만에 학교에 나타나 급식을 먹고 있던 유미를 고압적인 태도로 내쫓으려는 희연의 모습. 남편의 말을 인정하기는 어려우니, 되려 직책과 위치를 내려놓으려는 듯한 모습이 담긴 장면이다.
04.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지만 생각지도 못한 임신으로 인해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유미의 외로운 자리를 담아내는 일에도 소홀히 하지는 않는다. 학교에 나쁜 소문이 돌지 않도록, 자녀의 환경으로부터 제거하기 위해서 학교로부터 퇴출시키려는 어른들이다. 태어날 아이의 아빠인 주원(정순범 분) 또한 수술비를 마련해주려고 노력하는 듯 보이지만, 학업을 핑계로 유미의 곁으로 되돌아올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인다. 자신의 실수를 흠 없이 무마할 수 있을 정도로만 행동하는 모습. 집에서 쫓겨난 유미를 집에서 돌보고 싶은 친구 강희(수현 분)의 엄마 역시 딸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어떻게든 구슬려 내보낼 생각뿐이다.
그나마 도움을 받게 되는 쪽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엄마 진경(양조아 분)이지만, 그 역시 재혼을 한 탓에 오롯한 보탬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후 미혼모 센터에 입소해 아이를 건강하게 출산하고, 격렬히 반대하던 아버지의 곁으로 다시 되돌아올 수 있게 되지만 그 과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들은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 오죽하면 센터의 같은 방을 쓰던 또 다른 미혼모는 아이를 빨리 입양 보내고 복학하라고, 정이 들면 아이를 떠나보내기 어려우니 마음 약해지지 말라는 현실적인 말들만 늘어놓는다. 화면 바깥에 유미와 같은 처지에 놓인 산모가 결코 적지 않다는 뜻이다.
▲ 영화 <최소한의 선의> 스틸컷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싸이더스
05.
"저 한 번만 믿어주세요."
희연이 가진 선의의 모양이 바뀌었다고, 유미를 둘러싼 관계의 모습이 개선되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입양 보내기로 했던 아이를 다시 집으로 데려오고 난 이후에 그 문제는 오히려 더 두드러진다. 나름대로 자신이 있고 현실적인 계산을 한 뒤의 선택이라고는 하지만 유미가 세상의 어려움을 직시하기에는 아직 경험도 능력도 부족하기만 하다. 이제 희연이 그의 곁에서 도움을 주겠지만 여전히 그 삶을 대신 살아주거나 선택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 <최소한의 선의>에는 성장 영화의 범주에 놓을 수 있는 근거가 분명 마련되어 있다. 임신과 출산을 경험한 두 여성의 물리적 변화에 의한 것은 분명 아니다. 영화가 이야기하는 '최소한의 선의'라는 것을 각각의 인물이 어느 정도까지 가질 수 있게 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지점이다. 이 화두는 영화의 러닝 타임 안에서만 적용되지 않는다. 또 한 번의 성장을 도모한 희연과 달리 유미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다음 자리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계속 미안해질 것 같아 제대로 선택하고 싶었다는 그의 선택이 틀리지 않을 것이라 믿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결코 쉽지는 않겠지만. 그리고 그것은 희연도,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는 우리 모두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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