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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4명이 총에 맞아 죽은 거창 만세시위

[오늘의 독립운동가 56] 11월 4일 타계한 김관묵 지사

등록|2024.11.04 11:12 수정|2024.11.04 11:12

▲ 거창 독립만세 시위를 보도한 1919년 3월 25일 매일신보 기사("발포하여 진압", "죽은 자가 한 명이라더라'), 거창 "기미 독립만세운동 기념탑" ⓒ 국가보훈부


1967넌 11월 4일 김관묵(金寬默)지사가 세상을 떠났다. 1894년 5월 26일 경북 구미 고아읍 원호리 15번지에서 태어났으니 향년 73세였다. 1919년 독립만세운동 때 체포되어 잔혹한 고문을 당하고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경북 구미에서 태어난 지사는 15세 때 경남 거창으로 이주해 가서면(현 가조면) 석강리에 거주하였다. 국권을 일제에 빼앗긴 뒤인 17세 때 "조선 총독이 해인사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저격을 시도했지만 삼엄한 경비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독립기념관 독립운동인명사전).

해인사 방문 조선총독 저격을 계획했지만 실패

1919년 3월 20일은 가조면 장기리 장날이었다. 당시 방방곡곡에서는 군중이 자연스레 운집하는 장날에 맞춰 만세운동을 일으키는 것이 상례였다. 이곳에서도 김병직과 어명준 등이 앞장서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으며 시위를 일으켰다. 하지만 주동자들이 일제 헌병대에 무차별 구타 당하고 잡혀가면서 시위는 진압되었다.

다음 날(3월 21일) 김호·신병희·어명우·어명철·오문현·이병홍 등 여섯 사람이 소식을 듣고 회합을 가졌다. 이들은 "김병직과 어명준 등이 일본 헌병에게 구타당하여 반죽음 상태로 거창 일본군 헌병대로 압송(독립운동인명사전)"되었다는 말에 "평화 시위자를 그토록 악랄하게 구타하다니,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크게 분개했다.

제2차 시위를 거창 장날에 전개하기로 계획

이들은 3월 22일 거창 장날에 시위를 벌이기로 하고 가조면과 가북면 일대에 알려 참가자를 조직했다. 하지만 일본 헌병대에 계획이 사전 탐지되었고, 주동자들은 거사 당일인 3월 22일 아침에 모두 체포되고 말았다.

가조면·가북면 사람 3천여 명을 이끌고 있던 김관묵은 오후 2시 30분쯤 장기리 만도정(晩嶋亭) 앞에 대형 독립기를 세운 후 "잡아간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외치며 거창읍으로 시위 행진했다. 거창 일본군 헌병대와 용산 일본군 헌병 분견대가 합세해 살피재에서 공포를 쏘며 시위대를 가로막았다.

김관묵은 일제 군경의 위협을 돌파하기 위해 시위군중과 함께 함성을 지르며 앞으로 맹렬히 돌진했다. 결국 일본군의 무차별 발포로 4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평화로운 시위 대열에 총격을 가한 일본군

1919년 3월부터 5월 세 달 동안 나라 안에서 하루 평균 82명이 일제에 목숨을 잃었다. "7천 명이 넘는 양민이 죽임을(국가보훈부 <알기 쉬운 독립운동사>)" 당했다. 기미독립만세운동 참가를 "만세!" 몇 번 부른 단순 행위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결국 시위대는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김관묵 지사는 체포되어 무수한 고문을 당한 끝에 5월 31일 부산지방법원 거창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를 적용받아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나마 현충시설이 있어 그의 혼백을 위로할 듯

독립운동가에 대한 현충시설이 대체로 지지부진해서, 예를 들면 대구와 같은 대도시마저 독립운동기념관이 없다. "1910년대에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독립운동단체(제5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정 국사 교과서)" 광복회가 결성된 대구 달성토성에도 안내판 하나 없다.

김관묵 지사는 거주했던 거창과 고향 구미에 각각 기념탑과 비석이 세워져 있어 그나마 다행한 사례로 여겨진다. 거창 '기미독립만세 기념탑'은 1983년 3월 22일에 세워졌는데, 국가보훈부 현충시설정보서비스는 아래와 같이 해설하고 있다.

3월 22일 아침, 가조면 장기리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던 주동인물인 오문현, 김호, 어명철 등이 일본헌병에게 끌려가 취조당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가조·가북면의 주민 3천 명이 오후 2시 30분경 독립만세라고 대서한 깃발을 장기리 만학정 앞에 세운 후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어서 이들은 취조 중에 있던 주동인물을 구출한 후 행렬을 이루어 거창읍 쪽으로 진출하였다.

시위 행렬이 살피재에 이르렀을 때 이미 거창 일본군 헌병대와 용산 일헌병 분견대는 합세하여 군중들의 진로를 차단하고 총포로 위협하면서 해산을 명하였으나 군중은 응하지 않자 이때 포진하였던 일본 헌병들이 총격을 가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는 1983년 3월 22일 거창군 가조면 장기리 90에 기미독립만세 기념탑을 건립하여 거창군 가조, 가북면민의 기미년 독립만세운동을 기리고 그 숭고한 애국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하였다.

그의 고향인 경북 구미시 선산읍 선주로 127-4 현충탑 아래에 13기의 '선산 출신 독립유공자 공적비'가 있다. 이 기념비들은 일제강점기 때 활동한 선산 출신의 독립유공자들을 기려 1993년 10월 22일 세워졌다. 면면을 운동계열별로 나누어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3·1독립운동: 권오환(1892~1957), 김관묵(1894~1967), 김의경(1898~1949), 이원길(1893~1920), 최재화(1892~1962)
의열 투쟁: 황진박(1888~1942)
국내 항일: 김영득(1908~1940), 이종식(1891~미상), 장재성(1914~1939)
일본 방면: 남상순(1926~1978), 육홍균(1900~1983)
광복군: 김종철(1924~미상), 전재덕(1924~2016)

비석들이 홀로가 아니라 13기가 한데 모여 있으니 쓸쓸하지는 않으시리라.
덧붙이는 글 국가 인정 독립유공자가 1만8천여 분 계시는데,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하려면 1500년 이상 걸립니다. 한 달에 세 분씩 소개해도 500년 이상 걸립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날, 의거일 등을 중심으로 '오늘의 독립운동가'를 써서 지사님들을 부족하나마 현창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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