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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대구 거쳐 인동으로 타오른 만세시위

[오늘의 독립운동가 57] 11월 4일 타계한 장상건 지사

등록|2024.11.04 11:38 수정|2024.11.04 11:38

▲ 경북 구미 "인동3.12독립만세운동기념탑" ⓒ 국가보훈부


1969년 11월 4일 장상건(張尙建) 지사가 타계했다. 1898년 6월 17일 경북 칠곡 인동면 진평리 264번지에서 출생했으니 향년 71세였다. 1919년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고문당하고 징역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19년 2월 24일 이갑성이 서울에서 내려와 대구 남성정교회(현 제일교회)를 방문했다. 이 자리에는 남성정교회 이만집 목사, 남산정교회(현 남산교회) 백남채 장로와 김태련 조사(현 집사)가 합석했다. 계성학교(대구 대신동 소재) 졸업생 이갑성에게는 자신의 고향인 대구 지역 3·1운동 조직 책임이 맡겨져 있었다.

민족대표 33인 이갑성, 고향 대구 만세시위 독려

서울의 독립만세운동 준비 상황을 전하고 귀경한 이갑성은 2월 26일 세브란스 의전 학생 김문진을 이만집 목사에게 보내 재차 대구독립만세시위 준비를 촉구했다. 또 서울에서 3·1운동이 시작된 즉시 세브란스 의전 이용상 학생 편으로 독립선언서 200매를 이만집 목사에게 보냤다.

이만집 목사는 김태련, 계성학교 김영서 교감과 3자 회동을 한 끝에 서문시장 장날(3월 8일)에 맞춰 대구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김영서는 계성학교로 돌아가 교사와 학생들에게 소식을 전하면서 학교 건물 아담스관 지하에서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구체적 시위 준비에 들어갔다.

계성학교 학생 이영식, 고향 인동 만세시위 독려

계성학교 학생 이영식(뒷날 대구대학교 설립자)이 3월 7일 고향을 방문해 이상백과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 때 일본인 폭탄제조 기술자를 장진홍 의사에게 소개하는) 이내성에게 인동면 만세시위 주도를 권유하였다. 이때 이영식은 계성학교에서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를 건네주었다.

이상백, 장상건 등은 동네 곳곳에 붙이기 위해 독립선언서를 필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한편, 시위 참가자들을 규합하는 일에 돌입했다. 이윽고 3월 12일 이상백, 장상건, (대구3·8만세시위 동참 후 체포되지 않고 귀향한) 이영식 등은 인동면 진평동 마을 뒷산에 집결한 주민 200여 명에게 민족 자결의 취지를 설명한 후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본 군경이 출동해 시위 군중을 구타하고 강제 진압했다. 장상건은 무수한 고문을 받은 끝에 1919년 6월 14일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대구형무소에서 징역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피체돼 고문당하고 징역 6개월 옥고 치러

2015년 12월 22일 경북 구미시 진평동 산 8-2번지에 '인동3·12독립만세운동 기념탑'이 세워졌다. 국가보훈부 현충시설정보서비스는 이 기념탑이 "인동 3·12독립만세운동을 통하여 순국선열들의 독립정신과 애국심을 후손에게 계승하고 나라사랑정신을 고취하여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건립되었다고 설명한다.

만세시위 현장에 세워진 덕분에 기념탑 위치에서 보면 구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 홍의장군 곽재우가 산성을 쌓아 일본군과 대적했던 천생산도 파르라니(조지훈 '승무') 보인다. 임진왜란 전투 소리와 독립만세 외침이 함께 들리는 듯한 탑 앞에 서서 고난의 시대를 산 선조들의 어려운 삶을 돌이켜본다.
덧붙이는 글 국가 인정 독립유공자가 1만8천여 분 계시는데,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하려면 1500년 이상 걸립니다. 한 달에 세 분씩 소개해도 500년 이상 걸립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날, 의거일 등을 중심으로 '오늘의 독립운동가'를 써서 지사님들을 부족하나마 현창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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