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독 광부·간호사 월급 담보로 경제개발? '박정희 신화'의 허구성
[김종성의 히,스토리] 경북도는 독일 현지에 박정희공원 조성 추진
박정희가 파독 간호사와 광부들의 월급을 담보로 서독에서 차관을 얻어 경제개발의 종잣돈으로 썼다는 뉴스 기사들과 함께, 독일 현지에 박정희공원을 조성하기 위한 이철우 경북지사의 움직임이 보도되고 있다.
지난달 31일 이철우 지사는 뒤스부르크시를 방문해 쇠렌 링크 시장에게 박정희공원 조성과 박정희 방독 60주년 기념현판 설치를 제안했다. 이 지사는 박정희가 1964년 12월 10일 파독 노동자들에게 연설한 함보른탄광 강당 주변에 박정희공원을 설치하고자 한다.
파독 노동자들의 월급을 담보로 차관을 얻었다는 이야기는 이철우 지사의 동정을 전하는 언론보도들에 따라다니고 있다. 일례로, 4일 자 <조선일보>는 "박 전 대통령은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총리와 정상회담을 한 뒤 파독 광부와 간호사의 임금을 담보로 1억 5900만 마르크(약 4000만 달러) 차관을 빌렸다"라며 "그 돈으로 지은 게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동력이 된 경부고속도로와 포스코"라고 강조한다.
간호사·광부 임금 담보로 차관? 어불성설
외국에서 돈을 꾸기 힘든 악조건 속에서 파독 노동자들의 임금을 담보로 어렵사리 차관을 빌려 경제개발에 투입했다는 이야기는 신화적이기도 하고 인권침해적이기도 하다. 자국 노동자들의 해외 임금에 마음대로 담보를 설정하는 것이 정당한지 여하를 떠나, 서독이란 나라가 정말로 그런 조건으로 차관을 제공했는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서독에서 차관을 빌리는 문제는 장면 내각 때 이미 무르익었다. 내각 출범(8.23) 4개월이 좀 안 된 1960년 12월 21일, 예산 심사가 진행 중인 국회를 방문한 장면 총리는 무소속 조국현·이인 의원으로부터 '미국 경제원조가 감소하는 경향이 있는데, 정부 대책은 무엇이냐?'는 질의를 받았다. 다음날 발행된 <동아일보>에 따르면, 장면은 "서독·일본 등의 경제원조를 얻도록 노력함으로써 우리 경제의 미국 의존도를 낮출 생각"이라고 답변했다.
그 시각, 서독 현지에서는 한국 경제사절단이 활동하고 있었다. 태완선 부흥부차관을 단장으로 하는 경제사절단이 서독 당국과 차관 문제를 논의하고 있었다. 그달 18일 자 <동아일보>는 "서독의 대한(對韓) 경제원조 가능성은 16일 한국사절단이 서독 경제성(省)을 방문하였을 때 검토되었다고 서독의 일(一) 정부 대변인이 말하였다"고 보도했다.
장면의 국회 발언 일주일 뒤에는 낭보가 날아왔다. 27일 귀국한 태완선 단장이 "서독 정부는 한국의 신정부가 경제재건에 노력하는 데 대해 대단히 협조적이고 동정적이었다"라며 "(차관 성사가) 거의 확실하게 되었다"고 발언한 일이 28일 자 <조선일보>에 실렸다.
이 기사는 "서독 정부는 미국의 저개발국가를 위한 원조 부담에 참여하여 앞으로 10억 불에 해당하는 무상원조를 구상하고 있으며 한국도 이 원조 대상에 들어 있으나 그 원조 규모 및 그 시기와 원조 기구에 대해서는 아직도 아무런 윤곽이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는 태완선의 말을 덧붙였다.
이런 흐름이 이어지다가 1년 뒤 차관협정이 체결됐다. 이듬해 12월 15일 자 <동아일보>는 "한국과 서독은 지난 11일에 시작된 마지막 실무자급 회담이 끝난 13일 하오 마침내 차관협정에 도달하였다"라며 "1962회계연도에 한국이 서독의 정부 및 상업차관으로서 1억 5천만 마르크(미화 3750만 불)를 받게 될 차관협정에 조인하였다"라고 보도했다.
1960년 12월에 차관협정이 "거의 확실"하게 됐고, 1961년 12월에 차관협정이 성사됐다. 따라서 이 차관협정을 성사시킨 주역은 1961년 5월 16일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라기보다는 1960년 12월 당시의 정권인 장면 내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철우 도지사가 박정희 방독 60주년 행사를 진행한 뒤스부르크 행사장에서 상영된 동영상은 이런 사실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 이 영상에선 1964년 12월 박정희가 서독을 방문한 일을 언급하면서 "1964년의 서독 방문은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 지도자들과 차관 협정을 맺은 역사적인 순간이기도 했습니다"라는 내레이션을 내보낸다.
박정희의 서독 방문 8개월 전에 나온 그해 4월 9일 자 <경향신문>의 기사 제목은 '서독 차관 또 얻게'다. "또"가 들어간 이 기사는 "우리나라는 지난 61년에 서독으로부터 제1차로 1억 5천만 마르크(재정차관과 상업차관이 각 7천 5백만 마르크)의 차관을 획득한 바 있으며, 이번이 2차에 해당한다"고 보도했다. 위 경북도청 동영상은 사실상 장면 내각의 작품인 1961년 제1차 차관협정 대신 1964년 제2차 차관협정을 거론하면서 "역사적인 순간"으로 평했다.
장면 내각 때 보도된 위 1960년 12월 28일 자 <조선일보> 기사에도 언급됐듯이, 서독 정부는 한국에 대한 무상원조도 구상하고 있었다. 그런 서독이 간호사와 광부의 임금을 담보로 묶어놓고 차관을 줬다는 이야기는 어불성설이다.
서독이 제1차 차관협정을 맺은 것은 1961년이다. 인터넷 백과사전 등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듯이, 광부 파독이 구체화된 것은 1963년이고, 정부에 의한 간호사 파독이 성사된 것은 1966년이다. 한국 정부가 차관을 갚지 못할 경우에 간호사·광부의 월급을 압류한다는 조건이 있었다면, 1963년 이전에 제1차 차관협정이 체결된 사실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서독 정부가 담보도 잡아두지 않고 돈부터 꿔줬다는 이야기가 된다.
'월급 담보설'의 진원지
2013년에 <한국정치외교사논총> 제34집 제2호에 실린 이영조·이옥남 공동논문 '1960년대 초 서독의 대한 상업차관에 대한 파독 근로자의 임금 담보설의 진실'은 "1961년 의정서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 차관 중 재정차관은 지불보증이 필요하지 않은 차관이었으며, 상업차관은 독일정부 산하의 Hermes신용보험공사가 보증을 섰다"라고 설명한다.
1961년에 합의된 차관은 보증이나 담보가 필요하지 않거나 서독 신용보험공사가 보증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파독 근로자의 임금을 담보로 하여 상업차관을 얻었다는 세간의 주장과 인식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공동저자들은 말한다. 그런 뒤 이렇게 정리한다.
"이 같은 사실은 독일 측 자료의 어디에도 상업차관 지급보증에 대한 것은 없었다는 점과 당시 상업차관의 실제 집행자인 KfW 측의 '상업차관 지급보증과 광부·간호사 파독은 무관하다'는 회신 그리고 한국 정부가 특정 은행에 파독 근로자들의 임금을 예치하도록 요구하지도 않았고 임금은 근로자들 자신에 의해 관리되었다는 점 등에 의해서도 재확인된다."
위 논문은 월급 담보설의 진원지를 박정희의 서독 방문 당시 통역을 맡은 백영훈(1930~2023) 전 중앙대 교수의 저서인 <아우토반에 뿌린 눈물>에서 찾는다. 1997년에 나온 이 책에서 발원된 근거 없는 이야기가 퍼져나가 그런 신화가 형성됐다고 공동논문은 말한다.
상공부장관 특별보좌관과 박정희 대통령 경제고문 등을 역임한 백영훈 교수는 2006년 6월호 <신동아> 인터뷰 기사에서도 월급 담보설을 언급했다. 이 기사는 당시의 한국이 외국차관을 빌리기 힘든 상황에 놓여 있었다고 한 뒤 이런 이야기를 한다.
"돈을 빌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한국은 지구상에 또 하나의 분단국 서독에 한가닥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서독이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한국에 선뜻 돈을 내줄 리 없었다. 정부는 국내 최초로 독일 경제학박사학위를 취득한 백 원장을 서독으로 급파했다.
백 원장은 함께 수학하던 독일 친구의 아이디어로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 4만 명을 파견하기로 한다. 이들의 3년치 월급을 독일에 묶어두는 조건으로 1억 5000만 마르크(4000만 달러)의 상업차관을 약속받았다. 사실상 이들을 담보로 돈을 빌린 셈이다."
이같이 근거 없는 이야기가 유포된 배경은 위 문장 직후에 나온 백영훈 교수의 발언에서 어느 정도 드러난다. 그는 "지금 생각해 보면 서독에 파견한 광부와 간호사들이 우리나라 개발연대를 이끌어온 정신적 씨앗이었어요"라고 회고한다. 그가 이런 이야기를 퍼트린 것은 본인이 참여한 박정희 경제개발이 신화적으로 인식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고 볼 수 있다.
박정희가 노동자들을 파견해 놓고 그들의 월급을 담보로 차관을 빌렸다는 이야기는, 이런 행위의 정당성 여하를 떠나, 그 정도로 열악한 상황에서 경제개발에 착수한 박정희 정권을 신화적으로 포장해 주는 기능이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 같은 허구적 신화가 2024년에 재생되는 속에서 이철우 경북지사가 박정희 우상화를 독일에 수출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달 31일 이철우 지사는 뒤스부르크시를 방문해 쇠렌 링크 시장에게 박정희공원 조성과 박정희 방독 60주년 기념현판 설치를 제안했다. 이 지사는 박정희가 1964년 12월 10일 파독 노동자들에게 연설한 함보른탄광 강당 주변에 박정희공원을 설치하고자 한다.
▲ 4일 <조선일보> 20면에 실린 기사 <60년 전 "후손은 팔려오지 않도록 하겠다" 박정희 '눈물의 연설' 獨 장소에 기념 현판> ⓒ 조선일보 PDF
간호사·광부 임금 담보로 차관? 어불성설
외국에서 돈을 꾸기 힘든 악조건 속에서 파독 노동자들의 임금을 담보로 어렵사리 차관을 빌려 경제개발에 투입했다는 이야기는 신화적이기도 하고 인권침해적이기도 하다. 자국 노동자들의 해외 임금에 마음대로 담보를 설정하는 것이 정당한지 여하를 떠나, 서독이란 나라가 정말로 그런 조건으로 차관을 제공했는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서독에서 차관을 빌리는 문제는 장면 내각 때 이미 무르익었다. 내각 출범(8.23) 4개월이 좀 안 된 1960년 12월 21일, 예산 심사가 진행 중인 국회를 방문한 장면 총리는 무소속 조국현·이인 의원으로부터 '미국 경제원조가 감소하는 경향이 있는데, 정부 대책은 무엇이냐?'는 질의를 받았다. 다음날 발행된 <동아일보>에 따르면, 장면은 "서독·일본 등의 경제원조를 얻도록 노력함으로써 우리 경제의 미국 의존도를 낮출 생각"이라고 답변했다.
그 시각, 서독 현지에서는 한국 경제사절단이 활동하고 있었다. 태완선 부흥부차관을 단장으로 하는 경제사절단이 서독 당국과 차관 문제를 논의하고 있었다. 그달 18일 자 <동아일보>는 "서독의 대한(對韓) 경제원조 가능성은 16일 한국사절단이 서독 경제성(省)을 방문하였을 때 검토되었다고 서독의 일(一) 정부 대변인이 말하였다"고 보도했다.
장면의 국회 발언 일주일 뒤에는 낭보가 날아왔다. 27일 귀국한 태완선 단장이 "서독 정부는 한국의 신정부가 경제재건에 노력하는 데 대해 대단히 협조적이고 동정적이었다"라며 "(차관 성사가) 거의 확실하게 되었다"고 발언한 일이 28일 자 <조선일보>에 실렸다.
이 기사는 "서독 정부는 미국의 저개발국가를 위한 원조 부담에 참여하여 앞으로 10억 불에 해당하는 무상원조를 구상하고 있으며 한국도 이 원조 대상에 들어 있으나 그 원조 규모 및 그 시기와 원조 기구에 대해서는 아직도 아무런 윤곽이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는 태완선의 말을 덧붙였다.
이런 흐름이 이어지다가 1년 뒤 차관협정이 체결됐다. 이듬해 12월 15일 자 <동아일보>는 "한국과 서독은 지난 11일에 시작된 마지막 실무자급 회담이 끝난 13일 하오 마침내 차관협정에 도달하였다"라며 "1962회계연도에 한국이 서독의 정부 및 상업차관으로서 1억 5천만 마르크(미화 3750만 불)를 받게 될 차관협정에 조인하였다"라고 보도했다.
1960년 12월에 차관협정이 "거의 확실"하게 됐고, 1961년 12월에 차관협정이 성사됐다. 따라서 이 차관협정을 성사시킨 주역은 1961년 5월 16일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라기보다는 1960년 12월 당시의 정권인 장면 내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철우 도지사가 박정희 방독 60주년 행사를 진행한 뒤스부르크 행사장에서 상영된 동영상은 이런 사실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 이 영상에선 1964년 12월 박정희가 서독을 방문한 일을 언급하면서 "1964년의 서독 방문은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 지도자들과 차관 협정을 맺은 역사적인 순간이기도 했습니다"라는 내레이션을 내보낸다.
박정희의 서독 방문 8개월 전에 나온 그해 4월 9일 자 <경향신문>의 기사 제목은 '서독 차관 또 얻게'다. "또"가 들어간 이 기사는 "우리나라는 지난 61년에 서독으로부터 제1차로 1억 5천만 마르크(재정차관과 상업차관이 각 7천 5백만 마르크)의 차관을 획득한 바 있으며, 이번이 2차에 해당한다"고 보도했다. 위 경북도청 동영상은 사실상 장면 내각의 작품인 1961년 제1차 차관협정 대신 1964년 제2차 차관협정을 거론하면서 "역사적인 순간"으로 평했다.
장면 내각 때 보도된 위 1960년 12월 28일 자 <조선일보> 기사에도 언급됐듯이, 서독 정부는 한국에 대한 무상원조도 구상하고 있었다. 그런 서독이 간호사와 광부의 임금을 담보로 묶어놓고 차관을 줬다는 이야기는 어불성설이다.
서독이 제1차 차관협정을 맺은 것은 1961년이다. 인터넷 백과사전 등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듯이, 광부 파독이 구체화된 것은 1963년이고, 정부에 의한 간호사 파독이 성사된 것은 1966년이다. 한국 정부가 차관을 갚지 못할 경우에 간호사·광부의 월급을 압류한다는 조건이 있었다면, 1963년 이전에 제1차 차관협정이 체결된 사실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서독 정부가 담보도 잡아두지 않고 돈부터 꿔줬다는 이야기가 된다.
'월급 담보설'의 진원지
▲ 지난 6월 25일 오후 서울 용산 CGV에서 영화 '박정희: 경제대국을 꿈꾼 남자' 프리뷰 VIP 시사회가 열렸다. 사진은 이날 행사 입구에 설치된 포스터. ⓒ 연합뉴스
2013년에 <한국정치외교사논총> 제34집 제2호에 실린 이영조·이옥남 공동논문 '1960년대 초 서독의 대한 상업차관에 대한 파독 근로자의 임금 담보설의 진실'은 "1961년 의정서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 차관 중 재정차관은 지불보증이 필요하지 않은 차관이었으며, 상업차관은 독일정부 산하의 Hermes신용보험공사가 보증을 섰다"라고 설명한다.
1961년에 합의된 차관은 보증이나 담보가 필요하지 않거나 서독 신용보험공사가 보증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파독 근로자의 임금을 담보로 하여 상업차관을 얻었다는 세간의 주장과 인식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공동저자들은 말한다. 그런 뒤 이렇게 정리한다.
"이 같은 사실은 독일 측 자료의 어디에도 상업차관 지급보증에 대한 것은 없었다는 점과 당시 상업차관의 실제 집행자인 KfW 측의 '상업차관 지급보증과 광부·간호사 파독은 무관하다'는 회신 그리고 한국 정부가 특정 은행에 파독 근로자들의 임금을 예치하도록 요구하지도 않았고 임금은 근로자들 자신에 의해 관리되었다는 점 등에 의해서도 재확인된다."
위 논문은 월급 담보설의 진원지를 박정희의 서독 방문 당시 통역을 맡은 백영훈(1930~2023) 전 중앙대 교수의 저서인 <아우토반에 뿌린 눈물>에서 찾는다. 1997년에 나온 이 책에서 발원된 근거 없는 이야기가 퍼져나가 그런 신화가 형성됐다고 공동논문은 말한다.
상공부장관 특별보좌관과 박정희 대통령 경제고문 등을 역임한 백영훈 교수는 2006년 6월호 <신동아> 인터뷰 기사에서도 월급 담보설을 언급했다. 이 기사는 당시의 한국이 외국차관을 빌리기 힘든 상황에 놓여 있었다고 한 뒤 이런 이야기를 한다.
"돈을 빌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한국은 지구상에 또 하나의 분단국 서독에 한가닥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서독이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한국에 선뜻 돈을 내줄 리 없었다. 정부는 국내 최초로 독일 경제학박사학위를 취득한 백 원장을 서독으로 급파했다.
백 원장은 함께 수학하던 독일 친구의 아이디어로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 4만 명을 파견하기로 한다. 이들의 3년치 월급을 독일에 묶어두는 조건으로 1억 5000만 마르크(4000만 달러)의 상업차관을 약속받았다. 사실상 이들을 담보로 돈을 빌린 셈이다."
이같이 근거 없는 이야기가 유포된 배경은 위 문장 직후에 나온 백영훈 교수의 발언에서 어느 정도 드러난다. 그는 "지금 생각해 보면 서독에 파견한 광부와 간호사들이 우리나라 개발연대를 이끌어온 정신적 씨앗이었어요"라고 회고한다. 그가 이런 이야기를 퍼트린 것은 본인이 참여한 박정희 경제개발이 신화적으로 인식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고 볼 수 있다.
박정희가 노동자들을 파견해 놓고 그들의 월급을 담보로 차관을 빌렸다는 이야기는, 이런 행위의 정당성 여하를 떠나, 그 정도로 열악한 상황에서 경제개발에 착수한 박정희 정권을 신화적으로 포장해 주는 기능이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 같은 허구적 신화가 2024년에 재생되는 속에서 이철우 경북지사가 박정희 우상화를 독일에 수출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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