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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불명의 여자애"... 레즈비언 딸을 둔 엄마가 겪은 일

[오길영의 뾰족한 시각] 소설·영화 <딸에 대하여>가 이 시대에 던지는 질문

등록|2024.11.06 17:23 수정|2024.11.06 17:23

▲ 영화 <딸에 대하여> 스틸컷 ⓒ 찬란


좋은 문학과 영화를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여러 답이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답안은 독자와 관객의 감각에 충격을 줘서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그렇다고 무슨 거창한 정치, 경제, 사회적 쟁점을 다뤄야만 그런 작품이 된다는 뜻은 아니다. 문학과 영화는 언제나 독특한 인물(캐릭터)을 통해 그렇게 한다. 몇 년 전 읽은 김혜진 작가의 장편소설 <딸에 대하여>를 읽으며, 그런 작품을 오랜만에 만났다는 생각을 했다.

이 소설에는 우리 시대의 뜨거운 쟁점인 노년의 삶, 세대 사이에서 벌어지는 차이와 갈등, 성적 소수자를 대하는 태도 등이 차분하고 서늘한 어조로 다뤄진다. 이런 쟁점에 대해 어떤 관점을 취하든, 시대에 대한 성찰을 포기하지 않는 시민이라면 외면하기 힘든 주제다. 특히 한국문학계에서는 찾기 힘든 노년의 삶과 감각, 생각을 정면으로 다룬 작품을 젊은 작가가 과감하게 도전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문학적 영토의 모습은 다양한 작품의 꽃과 나무가 어울려 있는 것이다. 젊은 세대의 문학도 필요하지만, 중년 세대의 문학도 필요하고, 점점 그 숫자가 많아지는 노년의 삶이 지닌 의미와 애환과 명암을 조명하는 문학도 필요하다. 그게 바람직한 문학적 영토의 모습이다.

소설 <딸에 대하여>는 주로 20~30대의 젊은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요즘 창작 경향과는 다르게 젊은 여성(대학 강사)이자 성적 소수자(레즈비언)의 정체성을 지닌 딸을 둔 엄마의 1인칭 시점에서 서술된다. 소설은 동질적 여성이라는 편리한 구호를 문제 삼으면서, 여성 사이의 차이를 주목한다.

특히 부모와 자식 세대 간의 차이와 성적 지향성(sexual orientation)에 따른 차별이라는 무거운 문제를 교차시키는 서사구조를 택한다. 등장인물은 각자의 처지에서 경제적 약자이다. 여성이기보다는 엄마로 자신을 호명하는 '나'는 "예순이 넘"은 전직 교사/현직 요양원 간병인으로 "간병인 파견업체에 소속된 사람"이다. 딸은 비정규직 시간강사이고 그 때문에 고초를 치른다.

엄마 '나'가 매우 못마땅해하면서 "정체불명의 여자애"로 부르는 딸의 동성 애인도 고정된 일자리가 없다. '나'가 돌보는 노년 여성도 한때의 활발했던 사회활동조차 기억 못 하는 무기력한 노인이다. 이렇게 유사한 사회경제적 약자의 위치에 놓여 있지만, 그런 유사함조차 세대 간, 성적 정체성의 벽을 쉽게 넘을 수 없다는 걸 작품은 치밀하게 천착한다. "이 애들은 세상을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정말 책에나 나올 법한 근사하고 멋진 어떤 거라고 믿는 걸까. 몇 사람이 힘을 합치면 번쩍 들어 뒤집을 수 있는 어떤 거라고 여기는 걸까". 소설 <딸에 대하여>의 미덕은 "크고 단단하고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뭔가"를 섣불리 판단하거나 고발하지 않고 다만 그 현실 앞에 놓인 '나', 혹은 독자인 우리에게 가능한 태도를 고민한다는 점이다.

엄마는 누구이고, 가족은 무엇인가?

▲ 영화 <딸에 대하여> 스틸컷 ⓒ 찬란


비평가로서 나는 한국문학 혹은 외국문학을 평론의 대상으로 즐겁게 혹은 긴장하며 읽지만, 영화를 볼 때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나는 영화를 좋아하는 애호가로서 관람한다. 그렇기에 내가 좋게 본 문학작품, 특히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지면 가능한 빼놓지 않고 찾아보려고 한다. 엄마의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된 <딸에 대하여>을 영화로 만들기 쉽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영화화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웠다.

<딸에 대하여> 같은 장편소설을 영화로 만드는 일은 어렵다. 제한된 시간에 장편이 담고 있는 많은 이야기를 담는 게 만만치 않다. 영화 <딸에 대하여>는 거의 원작에 충실하게 앞에 적은 내용을 담는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고, 소설은 영화이기에 당연히 두 작품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예컨대 문학은 자세한 묘사로만 각 인물이 놓여 있는 상황을 전달할 수 있지만, 영화는 한두 숏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 영화 <딸에 대하여>에도 그런 장면이 있다.

영화가 처음 시작할 때 무거운 수박 한 통을 이고 홀로 언덕 위의 집으로 향하는 엄마의 피곤한 모습은, 나중에 거의 같은 구도로 나오는 엄마의 딸 그린(임세미)과 그린의 애인이자 파트너이고 가족인 레인(하윤정)이 같이 즐겁게 수박을 들고 가는 모습과 대비를 이룬다. 그런 장면을 보면서 관객은 묻게 된다. 가족은 무엇인가? 생물학적 가족만이 가족의 유일한 형태인가?

영화에서 이 문제를 가장 불안하게 의식하는 존재는 엄마 오주희(오민애)이다. 이성애에 기반한 남성과 여성이 부모가 되어 아이를 낳고 기르는 가족만을 '정상' 가족이라고 여기는 엄마가 볼 때 딸 그린과 레인이 맺는 '비정상'적인 관계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 엄마가 자신의 집 위층에 세 들어 사는 젊은 '정상' 가족을 늘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유다. 영화의 뒷부분에서 오주희는 그린에게 자신이 왜 그린과 레인의 관계를 불편하게 여기는지를 밝힌다. "너도 나처럼 나이 들었을 때 아무도 옆에 남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

오주희가 요양보호사로서 자신이 돌보는 이제희(허진)에게 남들이 보기에는 과도한 관심 혹은 집착을 하는 이유다. 한때는 잘 나가는 사회복지재단의 이사장이었고 사회적 관심도 받은 여성이었지만, 이제는 아무도 찾는 이 없는 치매 노인이 된 이제희에게서 오주희는 자신과 딸의 불안한 미래를 본다.

영화는 예리하게 엄마 오주희의 생각이 편견에 불과하다는 걸 다른 인물들의 시점을 통해 보여준다. 오주희는 요양원 관리를 책임진 권 과장(이창훈)에게 이제희가 당하는 부당한 대우를 항의하면서 "그 어르신한테 이렇게 하시면 안 되잖아요?"라고 묻는다. 하지만 권 과장은 "그렇게 하면 되는 어르신이 세상에 어디 있겠느냐?"라며 반박한다. 권 과장은 요양원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한 말이지만, 그의 반박은 자신이 남에게 가하는 차별은 보지 못하면서 본인이 당하는 차별만 예민하게 인식하는 오주희의 인식을 겨눈다.

▲ 영화 <딸에 대하여> 스틸컷 ⓒ 찬란


권 과장의 반박은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도 던지는 질문이다. 오주희는 이제희가 당하는 차별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바로 잡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린이 동성 연인과 동거하는 것, 혹은 그린이 강사로 일하는 학교에서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임용에서 탈락한 동료 강사를 위해 앞장 서서 싸우는 것은 납득하지 못한다. 그 점을 지적하는 그린의 비판에 대해 오주희는 이렇게 답한다. "너는 내 딸이니까!" 엄마로서 오주희는 딸이 복직 시위에 앞장선 것을 두고 "너와 상관없는 일에 끼어들지 말라"고 말한다. 남의 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제희를 성심껏 돌보는 엄마가 제희의 처우를 두고 분노할 때 직장 동료인 최 여사(강애심)로부터 "남의 일인데 무슨 상관이냐"라는 말을 똑같이 듣는다. 세상일이 항상 그렇듯이 남의 일은 원래 쉬운 법이다. 그게 막상 자신, 혹은 자신의 가족 일이라면 그렇게 쉽게 대할 수 없다는 걸 영화 <딸에 대하여>는 뾰족하게 드러낸다.

각색한 영화를 보면서 더 주목하게 된 건 엄마와 딸이 아니라 딸의 연인이자 동반자인 레인의 모습이었다. 원작 소설에서도 레인의 말과 행동이 묘사되지만, 또렷한 인상을 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구체적 이미지로 그려지는 영화에서는 성적 소수자로서 레인의 형상화가 또렷하게 부각된다. 하윤정 배우가 맞춤해서 레인을 연기한 것도 레인을 주목하게 만든다. 레인에게는 엄마 혹은 가족은 없을까? 레인은 자신의 엄마를, 레인의 엄마는 레인을 어떻게 대할까? 레인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영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꿋꿋하고 예의 바르고 당차게 세상을 살게 되었을까?

뻔뻔한 시대를 향해 묻는 <딸에 대하여>

▲ 김혜진의 소설 <딸에 대하여> 겉표지 ⓒ 민음사


나는 레인의 모습을 보면서 반(反)인권적 견해를 서슴없이 밝히는 국가인권위원장이 주저 없이 임명되는 뻔뻔한 시대를 비춰보게 된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부끄러움도 모르게 울려 퍼지는 시대를 떠올리게 된다. 내가 생각하고 경험한 건강한 시민사회의 기준은 그 사회가 성적 소수자를 포함한 다양한 소수자를 대하는 태도다.

영화 <딸에 대하여>가 특히 좋았던 점은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감각과 인식을 지닌 엄마와 딸 사이에 섣부른 화해를 시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식의 화해는 판타지에 불과하다는 점을 원작에는 없는 결말을 통해 영화는 보여준다. 엄마와 그린, 레인이 영화가 보여주는 여러 사건을 경험했다고 해서 각 인물이 지닌 견해나 고민, 불안감이 금방 달라질 수는 없다. 삶이나 세상이나 쉽게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경험한 만큼 변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각 인물은 새로운 삶의 국면을 계속 통과하며 성숙해질 것이다.

좋은 문학이나 영화는 명료한 답을 주지 않는다. 그보다는 미처 감각하지 못했던 삶과 세계의 이면과 구멍을 돌아보게 하는 질문을 던진다. 오래전 어느 평론가가 물었듯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 과연 살만한 세상인가"라는 질문을 독자와 관객에게 제기한다. 그래서 문학과 영화를 읽거나 보고 나서 조금이라도 다르게, 넓고 깊게 삶과 세상을 돌아보고 살아가게 도와준다. 소설 <딸에 대하여>와 영화 <딸에 대하여>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방식으로 그런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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