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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군에 배속되어 버마에서 일본군과 전투

[오늘의 독립운동가 58] 11월 5일 타계한 김상준 지사

등록|2024.11.05 09:43 수정|2024.11.05 09:43

▲ 김상준 지사,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 국가보훈부


1998년 11월 5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개관했다. 서대문형무소는 1908년 10월 21일 경성감옥으로 출발했고, 제1호 사형수로 허위를 선택했다. 일제는 경성감옥이 문을 연 바로 그날 허위 의병대장을 처형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10월 21일에 문을 열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물론 서대문형무소 역사에 가정법을 적용해 왈가왈부해본들 개관일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별 실용성은 없다. 다만, 현장과 인물이 연계되는 사업을 펼치는 경우 좀 더 세밀하게 진행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말해볼 따름이다.

父葬未成(부장미성) 아버지 장례도 못 해드리고
國權未復(국권미복) 국권도 회복하지 못했으니
不忠不孝(불충불효) 충성도 효도도 못했구나
死阿暝目(사아명목) 죽어서도 눈앞이 캄캄하겠도다

위는 '서대문형무소' 하면 떠오르는 허위 의병대장의 마지막 말이다. 각 행의 글자 수가 4자로 동일하다는 점과, "죽어서도 눈앞이 캄캄하겠구나"라는 마지막 구절의 무게감 있는 비유에 힘입어 흔히 시로 분류된다. 하지만 의병대장 본인은 시작이 아니라 유언을 남겼을 뿐이리라.

'서대문형무소' 하면 떠오르는 허위와 대구형무소

'서대문형무소' 하면 또 한 가지, 대구형무소가 떠오른다. 그 무렵 복심법원(현 고등법원)은 서울, 평양, 대구 세 곳에만 있었다. 한강 이남의 재심 청구자들은 지방법원 판결 후 대구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서대문형무소는 남아서 훌륭한 역사교육 공간으로 의미있게 활용되고 있지만 대구형무소는 흔적조차 없다. 대구형무소는 서대문형무소보다 더 많은 독립지사들이 순국한 곳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김영랑과 '광야'의 이육사도 갇혔던 곳이다.

허위 의병대장의 고제(수제자)로서 "1910년대에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독립운동단체(제5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정 국사 교과서)" 광복회를 창립하고 이끌어 "민족 역량이 3·1운동으로 계승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상진 지사가 순국한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일본인들도 아니고 대한민국 사람들이 대구형무소를 자취도 남기지 않고 없애 버렸다. 고향 안동을 17세에 떠나온 이육사가 그후 줄곧 살았던 대구 남산동 집과, 광복회에 이어 1920년대를 주름잡은 의열단 창단 때 이종암 지사가 군자금을 조달했던 건물도 아파트를 짓는다고 없애버렸다.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김영랑)"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개관 꼭 2년 전 별세

서대문형무소 개관 꼭 2년 전인 1996년 11월 5일 김상준(金尙俊) 지사가 세상을 떠났다. 1916년 12월 10일 경북 김천 농소면 용암리에서 태어났으니 향년 80세였다. 광복군으로서 버마 중부 지역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버마는 1988년부터 '미얀마'로 나라이름이 바뀌었다. 군부독재 정권이 그렇게 국명이 개칭했다. 그래서 미얀마 민주화운동가들은 계속 '버마'로 불러달라고 요청한다. 실제로 미국 등은 지금도 '미얀마' 아닌 '버마'로 호칭하고 있다.

우리나라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김상준 지사를 설명하면서 '버마'를 사용한다. 미얀마 민주화운동가들의 요청을 따른 것인지, 아니면 미국을 따른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 글에서는 국가보훈부 표현대로 그냥 '버마'로 적는다.

군부독재정권이 '버마'를 '미얀마'로 바꿔

김상준 지사는 23세이던 1939년 11월 중국 시안(西安)의 중앙전시간부훈련단(中央戰時幹部訓練團) 제4단 내에 설치된 한국청년간부훈련반에서 훈련을 받았다. 그 후 1941년 1월 1일 광복군 제5지대로 편입되었고,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되면서 1942년 4월 제2지대로 재편되었다.

1943년 5월 인도영국군 사령부와 조선민족혁명당 사이에 '조선민족군선전연락대(朝鮮民族軍宣傳聯絡隊) 파견에 대한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라 광복군총사령부는 인도파견공작대를 편성했다. 영어 구사 능력과 신체 조건을 기준으로, 1지대에서 2명[한지성(대장)·이영수], 2지대에서 7명[문응국(부대장)·최봉진·김상준·나동규·송철·김성호·박영진]이 선발되었다.

김 지사는 문응국·나동규와 함께 1분대로 영국군 제201부대에, 2분대원 박영진·김성호는 제204부대에 배속되었다. 그후 1944년 1월 7일 문응국·나동규와 함께 영국군 제201부대의 일원으로 임팔(Imphal) 전선으로 출발하였다.

영국군에 배치되어 버마 전선에서 2년 참전

임팔은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버마와 접경 지역으로, 연합군이 중국군에 보급하는 전쟁물자 수송의 주요 통로였다. 이후 임팔지구로 공격해오는 일본군을 맞아 김 지사는 띠마플·티딤·비센플 등지 전투에 줄곧 참전했다.

적과 마주치는 최전선 전투 요원으로 배치되었던 만큼 대적 선전 방송·문서 해독·전단 제작·포로 심문 등도 수행했다. 하루하루가 목숨을 건 시간들이었다. 그렇게 2년이 흐른 1945년 일제가 항복을 했고, 김 지사는 9월 10일 충칭(重慶)의 광복군총사령부로 복귀했다.

무미건조하게 나열을 하니 그저그런 설명문 수준이지만, 생각해보면 27-29세 한국인 청년이 영국군의 일원으로 배속되어 인도와 버마 일대 타국 전선에서 일본군과 2년 동안 목숨을 걸고 싸웠던 기록이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지구상에서도 보기드문 인생이다. 그런 삶을 살고 타계하신 김상준 지사의 기일을 맞아 삼가 명복을 빈다.
덧붙이는 글 국가 인정 독립유공자가 1만8천여 분 계시는데,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하려면 1500년 이상 걸립니다. 한 달에 세 분씩 소개해도 500년 이상 걸립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날, 의거일 등을 중심으로 '오늘의 독립운동가'를 써서 지사님들을 부족하나마 현창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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