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가스통으로 만든 펭귄, 추억여행하러 오세요
[예술, 광주와 통하길] 양림을 '걷다' 예술을 '보다' 시간을 '잇다'
광주를 흔히 예향이라고 부른다. 예로부터 음악, 미술, 문학 등 예술이 꽃피고 예술을 향유하며 살던 고장이다. 고향의 향기는 농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도시의 골목 어귀에도 시간이 축적한 추억들은 켜켜이 쌓여 있기 마련이다. 골목에는 재미가 있다. 추억이 있고 사연이 있고 오랜 세월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도시는 골목길로 이뤄지고, 골목길에서 만나는 예술은 도시를 숨 쉬게 한다. 그리고, 그 길을 통해 우리는 만난다.[기자말]
▲ 펭귄 ⓒ 매거진G
광주광역시 양림동에 가면 시간의 보물 상자를 여는 기분이 든다. 100년 전 광주를 비롯한 전남지역 근대화 유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양림동만이 가진 정취가 있다.
주인 모를 집 담벼락을 타고 핀 능소화와 좁은 골목 안 작은 화분 곁을 맴도는 호랑나비, 오랜 생활상이 느껴지는 낮은 주택의 고즈넉함 같은 것들이다. 잘 보존된 전통가옥을 둘러보는 정취와 더불어 시인 김현승의 흔적을 만나는 시간이 반가운 길이다.
▲ 양림동 골목 ⓒ 매거진G
그리 오래되지 않은 옛날, 동네 꼬맹이들이 모여 딱지치기 했을 좁은 골목도 고맙다. 양림커뮤니티센터 옆 골목길은 1970~1980년대의 시간으로 이어지는 비밀 통로다.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쉬울 만큼 작고 좁다. 골목길 입구에서 가스통을 재활용해 만든 펭귄을 발견한 순간부터 추억 여행이 시작된다.
이름도 재밌는 펭귄마을. 비록 펭귄은 살지 않지만, 나이 든 어르신들의 걷는 모습이 뒤뚱거리는 펭귄을 닮아 별칭처럼 부르던 것이 아예 마을을 대표하는 이름이 됐다. 오래되어 거무죽죽 얼룩이 진 콘크리트 담장엔 검은색 스프레이를 뿌려 적은 옛 시절 이삿짐센터 광고와 마을 지도, 색색의 분필로 적은 온갖 낙서들이 가득하다. 부엌에나 있어야 할 양은냄비며 프라이팬, 소쿠리들이 일광욕이라도 즐기듯 담벼락에 딱 달라붙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작은 꽃들과 나무들을 가꿔놓은 아담한 마을 정원은 주민들의 휴식처인 동시에 여행자들에게는 멋진 포토존이 돼 준다. 평범한 정원이 아니다. 나무 열매 대신 기타와 미러볼이 걸려 있고, 꽃밭 사이엔 곡식을 켜던 키가 한자리 차지하고 있다.
▲ 양림근대역사거리 ⓒ 매거진G
골목마다 빼곡하게 들어찬 옛 물건들은 수십 년의 시간을 압축해 놓은 추억의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이곳에서의 발걸음 속도는 각자가 간직한 추억의 크기에 비례한다. 펭귄마을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꾸며지기 시작한 건 2015년, 이 마을의 촌장을 자처하는 김동균씨가 동네 빈집에 쓰레기처럼 쌓여 있던 오래된 물건과 온갖 잡동사니들을 가지고 취미 삼아 이곳저곳 꾸미고 장식하던 데서 시작됐다.
그 사이 주민들이 자신이 갖고 있던 옛 물건들을 내놓고 합심해 마을을 가꾸면서 이곳 쓰레기들은 추억의 시간 여행을 위한 훌륭한 원동력이 됐다. 평범하기 그지없던 마을이 '발상의 전환'으로 핫플레이스가 되고, 타임머신 여행지로 재탄생한 것이다.
양림동에는 다양한 문화공간과 유적이 있다. 수령 200년 이상 된 호랑가시나무들이 자라는 양림동 언덕에 호랑가시나무언덕 게스트하우스가 자리하고 있다. 20세기 서양 선교사들이 근대식 학교와 병원 등을 설립하던 당시에 건축한 유서 깊은 공간으로 당시 뉴수마 선교사가 사택으로 이용했다. 붉은색 벽돌 건물이 품은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주고, 창을 통해 가득 담기는 싱그러운 초록빛이 눈부시다.
▲ 선교사 사택 ⓒ 매거진G
선교사들의 사택이 있는 언덕을 오르고 수피아여학교를 내려다보며 시를 쓰던 시인이 있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로 시작하는 <가을의 기도>를 쓴 김현승(1913~1975) 시인이다. 평양에서 태어난 후 양림교회 목사가 된 아버지를 따라 광주로 내려와 생활한 그는 선교사 사택이 있는 현 호남신학대학의 언덕길을 자주 산책하며 사색을 즐겼다고 한다.
호남신학대학 안에는 <가을의 기도>를 새긴 시비가 있고, 가까이에 저렴한 가격으로 커피를 마시며 여유롭게 쉬어갈 수 있는 카페가 자리했다. 카페 앞 야외 공간에 서면 양림동 일대와 무등산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와 멋진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
전통가옥인 이장우 가옥(광주광역시 민속자료 1호)과 최승효 가옥(광주광역시 민속자료 2호)을 만날 수 있다. 이장우 가옥은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공간과 광주 최고의 부자들이 살았던 공간을 분리하는 기준이 되는 집이었다. 1899년에 지어진 전통가옥으로 일자형이 주를 이루는 남부 지방의 가옥과 달리 한양의 가옥처럼 'ㄱ'자 구조다. 나름 부를 과시하고 멋을 부린 것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일본식 정원과 사랑채, 멋스러운 안채가 모습을 드러낸다. 평상시에는 대문을 닫아놓고 있으니, 왼편의 샛문을 이용해 들어가면 된다. 최승효 가옥은 1920년 최상현이 지어 일본 요정으로 운영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고 한편으로는 본채에 비밀 다락을 두어 독립운동가들의 은신처로 사용했던 공간이다.
전통의 아름다움과 현대미술이 조화를 이루어 시선이 닿는 곳마다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잔잔한 음악을 감상하면서 산책하는 것도 좋다.
▲ 이장우 가옥 ⓒ 매거진G
양림골목비엔날레, 본 전시 등 50여 작가 참여
마을 자체가 '지붕 없는 미술관'이 된 양림동. 골목골목마다 점처럼 분산된 공간을 찾아다니며 마을이 품은 예술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미술 축제가 양림동에서 펼쳐진다. 지난 2021년 처음 열린 '양림골목비엔날레'. 예술가를 비롯해 문화기획자, 주민, 상인이 함께 마을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마련했다. 마을 곳곳에서 펼쳐지는 다채로운 전시와 프로그램은 골목비엔날레 정체성을 보여주는 의미있는 축제로 평가받는다.
올해도 양림골목비엔날레가 양림동 일대에서 펼쳐진다. 11월 10일까지 68일간 펼쳐지는 이번 비엔날레에서는 골목마다 자리한 개성적인 갤러리와 카페 등 일대
공간이 미술관으로 변신한다. 주제는 'Connecting Way ; 사이, 사이를 잇다'. 예술과 일상, 시간과 공간, 마을과 세계와의 연결을 매개로 연대의 기쁨을 회복하자는 의미다. 특히, 올해 30주년을 맞이한 제15회 광주비엔날레 주제전 '소리숲-양림'의 전시장으로 양림동이 활용돼 마을 가치와 매력을 세계에 알린다는 계획이다.
올해 슬로건은 '마을이 미술관이다'. 광주비엔날레 본 전시 8개소를 비롯해 파빌리온 5개소, 양림골목비엔날레 기획전시장 10개소, 오픈스튜디오 8개소가 미술관으로 변신하며 참여 작가도 50여 팀에 이른다.
▲ 양림교회 ⓒ 매거진G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매거진G>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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