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은 짧게" 강조했는데 예외도 있네요
긴 문장에 담긴 어르신들의 진심... 나를 위해 잘 가르치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다
2024년 2월부터 주 1회 어르신들과 글쓰기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싣습니다.[기자말]
어르신들은 대부분 매우 긴 문장을 쓰신다. 한 문장이 A4용지 10포인트 기준으로 3줄을 넘기는 일이 잦다. 문법 오류를 줄이려면, 읽는 사람을 고려한다면, 문장을 짧게 써야 한다고 매번 말하지만 한번에 고쳐지지 않는다.
반응이 별로였던 빨간펜 첨삭
칭찬 받을 줄 알고 했던 일인데 반응은 그저 그랬다. 머리 아프다는 분도 계셨다. 순간 서운했다. 고등학생 논술 첨삭에서 이정도로 개별 첨삭 받으려면 단가가 얼마인 줄 아시냐는 소리가 튀어나올 뻔했다.
그러다 호소다 다카히로의 책 <컨셉 수업>이 떠올랐다. 좋은 컨셉은 '고객의 눈높이에서'라는 절대 불변 대전제가 있다고 한다. '하나라도 더 알려드리고' 싶은 내 마음은 과연 어르신의 눈높이에 맞을까? 고등학생 '입시' 원고와 내 인생 '풀면'의 원고에같은 기준을 적용할 수 있나?라는 질문이 생겼다.
어르신의 글은 고등학생 논술처럼 논리를 따질 일도, 독자를 크게 고려할 일도 아니었다. 그저 내 인생을 '풀면' 글이 된다는 것에 흥미를 느끼면 된다. 애초에 내가 잡은 콘셉트도 '풀면'이 아니었던가.
매주 글 한 편씩 써오시는 어르신이 있다. 자연스레 그 분의 글로 수업이 시작된다. 어느날은 30년 전에 했던 미서부 여행에 대한 글이었다. 10년 전에 가본 호주보다 30년 전의 미서부가 더 생생하다며 눈을 반짝이셨다.
▲ 써 온 글을 읽으시는 어르신글쓰기 숙제를 제일 성실하게 해오시는 어르신의 뒷모습 ⓒ 최은영
교실은 갑자기 여행기로 들썩였다. 누구는 유럽여행이, 누구는 하와이 여행이 제일 좋았다고 한다. 그간 수업 시간에 별 말이 없던 분까지도 신나서 이야기를 하신다. 그야말로 '내 인생 풀면'의 한 장면이다. 이 장면은 저절로 한 문단을 만들어냈다.
▲ 이태리에서 고려장 당하는 줄 알았다수업시간에 풀어낸 한 단락 ⓒ 최은영
나는 파워 포인트로 이 문단을 옮기고 제목을 붙였다. '이태리에서 고려장 당하는 줄 알았다.' 내 타자가 화면에 뜨자마자 다들 빵 터지셨다. 웃음은 자신감을 주는 걸까. 절대 못쓰겠다는 분도 뭔가 쓱쓱 채우신다.
▲ 일본을 왜 가나수업시간에 나온 문단 ⓒ 최은영
글쓰기에 '절대'는 없더라
이제보니 '하나라도 더 알려드리고 싶은'은 어르신들을 위하는 마음이 아니었다. 그저 내가 잘 가르친다는 걸 증명하고 싶은 욕심이었다. 짧은 문장이 주는 간결함보다 편하게 풀어내는 긴 문장이 이곳에서는 더 중요했다.
어떤 글쓰기 수업이든지 간에 나는 '짧은 문장으로 쓰세요'를 강조했다. 길어진 문장은 여지없이 빨간펜이 들어갔다. 이게 적용되지 않는 글쓰기는 절대 있을 수 없다고 믿었다.
'절대'는 절대 없나 보다. 빨간펜이 없어진 곳에서 어르신은 당신들 안의 이야기를 신나게 풀어내셨다. 나는 그저 그 글의 흐름을 지켜보고 적절한 제목을 붙여드리면 그만이었다.
순식간에 수업이 끝났다. 시작할 때보다 어르신들 표정이 더 화사해 보였다. 나는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풀어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어르신들은 두서 없는 노인네 이야기를 그리 정성스럽게 들어주는 게 더 고맙다고 하셨다.
짧은 문장 쓰기는 글쓰기 수업의 진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진리가 진심을 전달하지 못한다면 소용없다. 진리를 위한 개별 파일보다 같이 웃는 진심이 더 강력했다. 진리와 진심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는 강사가 되고 싶은 날이었다.
덧붙이는 글
개인 SNS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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