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비정규직 운동에 제 삶을 걸었어요, 그 정도로 가치가 있습니다"

[평등과 연대의 전태일 정신 ②] 아사히글라스지회 차헌호 지회장 인터뷰

등록|2024.11.06 10:46 수정|2024.11.06 10:49
매년 11월이면 전태일 열사의 기일인 13일을 기점으로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린다. 전태일 정신은 전국노동자대회를 통해 전승되고 있을까. 그에 앞서 우리가 계승해야 할 전태일 정신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고민과 답은 전태일이 우리에게 남긴 것, 그렇게 이어지고 있는 오늘의 운동만큼이나 여러 갈래로 뻗어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53년 전, 열사가 남긴 유서는 첫 마디에서부터 수신자를 이렇게 호명하고 있다. '내 사랑하는 친우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이번 지면에서는 이 '모든 나'들을 향하고자 애쓴 현장을 만나보고자 했다. 여러 현장 중 아사히글라스지회(아래 아사히)를 만난 것은 9년의 투쟁을 승리와 복직으로 마쳐냈기 때문만은 아니다. 노동조합을 만든 지 한 달 만에 해고된 후 사업장으로 돌아가기까지의 그 3321일 동안 22명의 아사히 조합원이 만난 전국의 투쟁 현장에서 듣게 된 연대의 증언들 때문이었다. '아사히는 투쟁과 연대를 나누지 않는다.'

복직 두 달여가 지난 10월 15일 저녁, 구미의 한국니토옵티칼하이테크(아래 옵티칼) 공장에서 아사히글라스지회 차헌호 지회장을 만났다.

"오느라 고생 많으셨죠? 우리는 보통 매일 퇴근하고 바로 옵티칼로 와서 6시 약식 집회하고, 조합원 회의하고 일정 마치거든요. 간단히 하니까 같이 집회 보시고 여기서 같이 저녁 먹고 인터뷰하면 좋겠습니다."

복직 후에도 변함없이 지키는 연대의 약속

아사히는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한 전 조합원이 퇴근 후 옵티칼로 달려와 집회를 한 후 함께 저녁을 먹으며 공장을 지킨다. 2022년 원인 불명의 화재 이후 옵티칼 사측은 청산 통보와 함께 공장 철거를 강행하려 했고, 현재 일곱 명의 노동자가 남아 일터를 지키고 있다. 두 명의 여성 노동자가 까맣게 불탄 공장 옥상으로 올라 열 달째 농성 중이다.

"우리 투쟁이 1년쯤 지났을 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아사히만 상대로 싸울 게 아니고, 이 비정규직 넘쳐나는 구미 공단에서 굉장히 부담스러워 할 만한 일을 해야겠다. 이 지역의 노동운동을 조직하자, 노동착취가 심각한 사업장 두 개를 골라서 조직화 사업을 해보자.' 그래서 그때 옵티칼, 아바텍 두 곳을 점찍고 그 앞에서 몇 달 동안 선전전을 했어요. 그렇게 옵티칼 노조가 만들어진 거죠. 노조가 있는 현장과 없는 현장은 하늘과 땅 차이잖아요. 비정규직한테는 특히 더 그래요. 우리 스스로 만든 민주노조가 있다는 것만 해도 현장에서 숨 쉬는 게 다르고 인정받는 게 다르거든요. 누구도 우리를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걸, 인간은 굉장히 소중하다는 걸 알려주는 게 노동조합이니까요."

▲ 복직 후 아사히 지회 조합원들은 퇴근 후 매일 저녁 옵티칼 농성장에서 약식 집회와 조합원 회의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 메밀


아사히를 만나기 전 케이엠텍 연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휴대폰 부품을 생산하는 삼성전자 1차 하청 업체인 케이엠텍에서 백혈병 산재가 발생했으나 사측은 무책임으로 일관했다. 노조가 없는 지역 사업장이라 더욱 막막하던 때, 반올림을 통해 소식을 듣게 된 아사히에서 구호를 담은 현수막을 케이엠텍 공장 앞에 매달고, 매주 선전전을 진행하기로 결의한 후 지역 노조 단위도 모았다. 진행에 앞서 조합원들이 직접 사업장으로 가 출근 시간대에 10분 단위로 출입 인원을 파악하고 가장 사람이 많은 시간을 정해 선전전을 진행했다. 자기 사업장도 아니고 그간의 교류도 없던 곳의 일선에 서서 투쟁을 만들어가는 일. 어떻게 그렇게까지 마음을 낼 수 있었을까.

"그건 기본이에요. 우리는 연대 투쟁하는 모든 사업장에서 그렇게 해요. 이렇게 하는 데가 많지 않으니, 우리가 특별해 보일 뿐이지, 그게 뭐 굉장히 대단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물론 그렇게 꾸준히 시간을 내는 게 그냥 되는 일은 아니죠. 우리 조합원이 다 함께 그 문제에 공감하고 결의하니까 할 수 있는 일이에요. 한두 번 정도야 안 내켜도 따라갈 수 있지만, 동의 되지 않은 사안이 매주 이어진다면 조직 내부에 논란이 생겨서 할 수가 없어요. 이 사안을 받아 안을 수 있는 조직적 역량이 없으면 다른 사업장의 투쟁을 우리가 이렇게까지 이어서 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거든요."

2019년 톨게이트 투쟁 당시 톨게이트 노동자들이 서울에서 고공농성을 할 때 아사히는 김천에 있는 한국도로공사 본사 앞에서 한 달간 선전전을 벌였다. 조합원들과 톨게이트 투쟁에 어떻게 함께할지 논의한 끝에 나온 안이었다.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투쟁가에 놀라 뛰쳐나온 도로공사 직원과의 몸싸움도 불사했다. '남의 일에 왜 난리냐'는 지청구에 '우리 일'이라고 소리쳤다. 소성리 사드 투쟁에도 8년째 함께하고 있다. 해고 투쟁 중에는 매주 화요일마다 소성리 아침 집회에 가기 위해 동이 트기 전에 모여 출발했다. 이렇게까지 길게 뜻을 모아낼 수 있었던 기반은 긴밀하고 꼼꼼한 의식 공유에 있었다.

"임원 회의를 매주 별도로 하고, 사전 정리한 후 간부 회의를 하고, 조별 회의를 해요. 그렇게 회의한 것들을 다시 문서로 정리해서 월요일마다 전체 회의를 했어요. 지난 주에 한 일정들을 순서대로 다 함께 평가하죠. 그걸 또 기록에 남기고요. 생계투쟁 나간 동지들 제외하면 열댓 명인데 그냥 한데 모여서 공유사항 전달하고 이야기 한 번 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면 '자기 것'이 되지 않아요. 초창기에는 무슨 사안이 있으면 그냥 다들 동의하곤 했는데, 조직 체계가 단단해지면서 이제는 조합원들이 의견도 많이 내고 피드백도 풍부해요. 우리끼리 있으면 맨날 농담이나 하고 똑같은데, 토론할 때 보면 완전히 달라져 있어요."

체계적인 회의를 통해 아사히가 결정한 주요한 연대 방침은 '필요한 연대'다. 지지 방문이나 참여에 그치지 말고 그 현장에 꼭 필요한 것에 집중하자는 뜻이다. 상대가 필요로 하는 것을 채우려면 우선 그 상대에 대해 잘 살펴야만 한다. 연대를 가기 전에는 해당 사업장이나 현장의 주요 사안과 추진 경과를 조사해 조합원 회의에서 공유하고, 방문해서는 현장 활동가들과 간담회를 진행해 '깊은 연대'를 만들어 나간다. 아사히는 연대를 말할 때면 동지들로부터 배운 연대임을 강조한다. 일본 아사히글라스 본사 항의 행동을 조직해 매달 실천해 온 일본 동지들의 연대를 통해 아사히는 직종과 산별을 넘어서는 계급적 연대를 실천할 힘을 얻었다.

투쟁으로 자존감 찾기, 누가 해줄 수 없죠

차헌호 지회장은 비정규직으로 살면서 노동조합을 통해 자존감을 찾았다고 했다. 해고와 수감생활 끝에도 여러 제안을 뿌리치고 비정규직 현장으로 들어가 아사히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비정규직 현장운동을 조직해야 노동운동의 길이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지역의 미조직 노동자들이 조직화되어 사업장의 테두리를 벗어나 힘을 모아내는 꿈을 꾼다. 그래서 9년이 넘는 시간 동안 투쟁하면서 아사히 자본에 질 거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지만, 구미공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조하면 길에서 10년이 다 되도록 고생한다' 여길까 하는 염려는 했었노라 고백한다.

"비정규직 운동에 제 삶을 걸었어요. 삶을 다 걸 정도로 가치가 있어요. 이렇게 살아갈 힘을 주는 확실한 한 가지는 사람들의 변화 같아요. 거기에서 오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일전에 회사가 지회장은 안 되고 나머지 스물한 명은 복직시켜 주겠다고 협상을 걸어왔을 때, 우리 동지가 이래요. '뭐야, 지회장은 부담스럽고 우리는 부담스럽지 않은 거야?' 그때가 싸움 6년째거든요.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투쟁가로서 자부심과 자존심이 이미 꽉 차 있는 거죠."

동지와 함께 만들어내는 나와 우리의 변화, 그 변화의 파장들이 끊임없이 부닥쳐 이윽고 '모든 나'들이 쟁취해 내는 사회변혁. 어쩌면 '전태일 정신'의 실마리는 '윤석열 정권 퇴진'이라는 구호로 모든 사회적 의제를 담아내려는 광장에서보다,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 일'이라고 외치는 비정규직 연대투쟁 현장에서 더 선명하게 발견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가보지 않은 길, 새로운 운동에 대한 상상은 이미 우리 안에 있는 오래된 것, 그 정신으로부터 추동될 것이다.

"노동운동은 가장 열악한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야 하고 가장 필요한 곳에 가 닿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노동조합을 만들지 못하고 노동자로 인정받는 것부터가 싸움인 노동자들을 향해야죠. 민주노총은 조직된 노동자들이잖아요. 우리끼리, 있는 사람들끼리의 잔치 말고, 아주 구체적인 싸움을 앞서서 해나가야죠. 미조직된 노동자들에게 지지받지 못한다면 노동자 계급 대표성을 말할 수 있을까요? 지지받지 못하는데 '우리가 당신들의 대표입니다'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우리 사회의 가장 열악한 노동자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게 전태일 정신이라고 생각해요. 제게는 그것이 비정규직 운동이었고요.

지금은 특수형태고용과 플랫폼으로 노동자가 훨씬 더 파편화되었잖아요. 그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게 지금의 전태일 정신일 것이고 민주노총이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해요. 민주노총의 비정규직 조합원이 30만이 넘어요. 지금의 노동구조에서 자꾸 무기력해지고 불안정한데, 자신감을 가지고 공동투쟁의 경험을 축적해 나가면 좋겠어요. 그것만큼은 누가 해줄 수 없어요. 우리가 해야 합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월간 일터 11월호에도 실립니다.이 글을 쓴 메밀 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입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