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석조각, 과거와 현재를 거쳐 미래를 물들이다

석조각 이수희 명인... 충청의 예술, 석조각으로 꽃 피우다

등록|2024.11.07 09:56 수정|2024.11.07 09:56
한국예술문화명인진흥회는 우리 조상의 유무형 전통예술문화 유지발전을 위해 가치있는 인적자원 발굴 기록 인증 전승 유통을 촉진하고 동기부여해 명인들이 쌓아온 가치를 사회자산으로 공유하기 위해 설립됐다. 현재 전국에 약 400명의 명인이 회원으로 등록되어 있고, 그중 충청지회 명인은 21인이다.

앞으로 이어질 연재는 18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충청지역 흩어져 있는 명인 21인의 인터뷰다. 그들의 지난했던 삶을 조명함으로써 미래를 잇는 문화유산의 가치를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데 보탬이 되고자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소개한다.

석조각 이수희 명인. ⓒ 최차열 제공


충청의 예술, 석조각으로 꽃피우다

충남 서천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보릿고개는 경제적인 어려움뿐만 아니라 농민들의 삶을 고단하게 했습니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1973년 친구의 권유로 서울로 상경하여 석공예 기술의 기초인 건축 석재 가공 현장을 견학했습니다. 너무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는 어린 마음에 지레 겁을 먹고 '저렇게 힘든 일을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불안하고 초조했지만 그럼에도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습니다. 숙식 해결을 위한 방법이 없었기에 보따리를 풀고 주저앉았습니다. 그때는 미래의 직업에 대한 꿈과 희망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2년 동안 숙식 제공을 해주는 조건으로 월급 없는 석재공장에서 사회생활의 첫걸음을 뗐습니다. 석공예 기술을 가르쳐줄 선생님과의 일정이 시작되면서, 제 인생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돌과의 인연이 지금껏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이수희 명인의 '약사여래부처상'제29회 대한민국불교미술대전 특선작 ⓒ 이수희


홀로서기로 향한 석공예의 길

작업 전,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대장간에 불을 피워 전통 공구를 다듬질하는 준비작업이었습니다.

그리고 연일 망치질하는 방법, 공구 사용하는 방법, 공구 다듬질하는 방법, 원자재 선별방법, 제품 제작하는 순서 등을 숙지해야 했습니다.

지정된 작업장도 없는 건축현장에서, 작업이 시작되면 저는 동료들이 일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시키는 잡일을 해야 했습니다. 뜨거운 햇빛조차 피할 수 없는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아침 해가 뜨면 작업을 하기 시작해서, 해가 지는 저녁까지 묵묵히 일만 했습니다. 주어진 물량이 끝나면 다른 건축현장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작업을 하는 상황이 반복됐습니다.

그렇게 2년의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손재주가 있었던지 석공예 기초 기능은 남다르게 빨리 배워, 주변 선배들로부터 기술을 인정받았습니다. 작업에 대한 자부심과 희망도 품게 됐습니다.

2년의 제자 생활이 드디어 끝이 났고, 저는 홀로서기를 해야 했습니다. 모든 일을 스스로 결정해야 했고, 그에 따른 책임도 제가 져야 했습니다. 부담감이 있었지만, 막상 부딪쳐 보니 못해낼 것도 없었습니다.

운도 따랐습니다. 그동안 배운 기술을 바탕으로 일을 하다 보니, 일본 수출시장의 문이 열리는 행운도 얻었습니다. 덕분에 저는 석등, 석탑, 석조각 등의 새로운 기술을 배우며 수출 전선의 일원으로 일했습니다.

이수희 명인의 한국문화재기능인 작품전 특별상 수상작품 '향로'규격 : 420*420*520 재료: 고흥석 국보 제95호 청자칠보투각향로를 확대 ⓒ 이수희


연미석공예 창업

1987년 10월 연미석공예를 창업했습니다. 지인의 도움으로 일본 수출 불상을 하도급받아 처음으로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저는 제일 먼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고, 변화하는 정부 방침에 맞춰 4대 보험을 우선으로 가입했습니다. 무엇보다 직원의 복지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제가 그동안 직장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일정치 못한 급여와 근무시간에 대한 정확한 수당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 고충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1987년, 처음 4대보험을 시행할 때는 주위의 동종업계 사업장 사장님들의 매서운 눈초리가 있었습니다. 심지어 생각지도 못한 일로 인해 직원들의 동요에 시달리며 화풀이하듯 험한 말과 행동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고 지켜온 것이 오늘의 ㈜연미석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수희 명인의 작품 '관세음상'. ⓒ 이수희


100만 불 수출탑 수상

1989년 6월, 연미석공예사에서 ㈜연미석재로 법인전환을 하며 대전에서 논산으로 공장을 확장 이전했습니다.

일본에 조각품과 묘석제품을 직수 출하하면서 1992년 11월 30일 무역의 날에 맞춰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100만 불 수출탑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연미석재에서 제작한 대표적인 작품은 ㈜태양물산 공원묘지 중앙에 설치된 관세음 보살상(본체높이 7m, 중량 100t)과 (주)목본석재에서 (본체 7m) 석가여래좌불상(본체 7m)을 5등분하여 제작한 것입니다.

또 일본 도쿄 하코네 석가여래좌불상 설치입니다. 도쿄 하코네에 있는 사찰경내에서 중앙은 300여 톤, 작업 기간만 해도 자그마치 5인이 약 8개월 동안 가공 제작하여 직접 시공한 것입니다. 일본 거래처 목본 석재에 다량의 조각 제품과 묘석제품을 수출하기도 했습니다.

아울러, 다른 업체에서 수입한 부처님 얼굴 조각이 잘못되어, 주목본석재 사장님의 제안으로 전시장에 있는 걸 수정 보완하면서 조각 기능을 인정받기도 했습니다.

국내시장으로 눈을 돌리다

논산군(현재 논산시)에서 실시하는 공예품경진대회에서 금상을 받았습니다. 일본 수출시장 침체로 내수시장 확장을 위해 전문건설 석공사 면허를 취득하여 수출과 더불어 내수건설과 사찰불사사업을 병행하게 됐습니다.

중국의 자본시장 개방정책에 따라 일본 수출시장이 중국으로 많이 옮기면서 주문물량이 감소했습니다.

건설면허를 활용하여 생존을 위한 국내시장 확보 방안으로, 약천사 법당 주변 석공사와 부도(H4.5m)를 제작 설치했습니다.

이수희 명인의 '제47회 충청남도미술대전' 대상 작품 '교신-우주를 품다'. ⓒ 이수희


석조각 '명인·명장'이 되다

동남아 국가들의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재단에서 발주한 추모비를 미얀마 현지에 가서 한인회관 앞에 설치했습니다.

상단에는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 좌우 날개는 대한민국의 국화(國花)인 무궁화 조각, 상단오석에는 평화로운 시골 풍경으로 조각했습니다.

경산시의 보훈공원에 보훈공원 조형물을 설치했습니다. 월남참전기념비, 6.25 참전 기념비, 무궁수훈자 기념비, 충혼탑 등입니다.

또 입대 장병들이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고취하기 위해 연무대 논산훈련소 정문 앞 녹지공원에 국토수호 충성탑을 제작 설치했습니다.

이밖에도 다양한 작품을 제작 설치하는 가운데 그 공로를 인정받아 '불교문화(석조각)' 명인 및 대한민국 석공예 명장으로 선정되었습니다.

미래를 지키기 위한 석공명인의 다짐

수많은 역경을 겪으면서 돌과의 인연을 맺어온 지 어느덧 50여 년, 석공예직종은 뿌리 산업의 산물인 문화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문화재 유지 관리의 보수와 복원 등은 국가적으로 없어서는 안 되는 직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양 직종으로 전락하면서, 머지않은 시간에 인력난이 예상됩니다.

(사)한국석조각예술인협회에서는 그동안 전국기능대회 출전 선수 발굴과 기술지도 지원을 하며 우수한 기능 인력 양성을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해왔습니다. 그런데도 고용노동부에서는 전국기능경기대회의 지원율이 낮다는 이유로, 정부 정책의 일환으로 석공예직종을 폐지했습니다. 정말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명인으로서 앞으로 후배들의 기술지도와 후진 양성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공인으로서의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도록 품위와 자질에 정성을 기울이며 성실히 임하겠습니다.

언행과 품행이 (사)한국예술문화 명인과 대한민국 명장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도록 모범을 보이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인천투데이에도 실립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