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것도 뛰는 것도 아닌 경보, '중간'이 던지는 미학"
[리뷰] 김건중 < middle walking middle >
▲ 김건중 공연 장면 ⓒ BAKI
유별난 무용이 펼쳐진 장소는 여느 공연장과 사뭇 다르다. 번호표가 붙은 객석도, 몸짓에 집중할 수 있는 프로시니엄 무대도, 스토리의 배경이 되는 무대장치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좌석은 뒤편에 몇 개만 깔렸을 뿐 몇몇은 사이드에 앉아서 관람한다. 티켓을 배부한 곳은 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쪽 구석에 마련된 접수 창구. 예약자를 확인하고 받은 팔찌는 놀이공원에서 보던 그것이다. 다시 계단을 올라 신발을 벗고, 블랙박스 스튜디오로 들어선다. 댄스플로어를 사이에 두고 디귿으로 배치된 관람 구역이 보인다. 현장에 모인 이들은 대략 50명 남짓. 빈자리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공연에 대한 호기심은 상상 이상이다.
지난 5~6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스튜디오 하늘에서 진행한 < middle walking middle >(미들 워킹 미들)의 첫인상은 지금까지 봐왔던 무용에 대한 마음가짐과 다르다는 것이다. 네덜란드 Codarts 예술대학에서 무용을 공부하고 오랫동안 네덜란드와 한국에서 활동해 온 김건중 안무가는 몸에 대한 인식을 들여다보는 무용 작업을 해왔다. 특히 '안무'라는 매체를 통해 흐릿한 몸의 감각을 뚜렷하게 만든다. 공연 안에서 몸에 대한 가능성을 탐구하는 데 주력했다고 자신을 소개한다.
규율에 부합하는 연습 후 탄생한 표상에 따라갈 것을 강요받았던 그는 늘 의구심을 떨쳐내지 못했다. 이유는 '인위적인 춤'에 오류가 있어도 질문을 던지기보다 몸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극복해야 하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춤은 부자연스러운 몸짓을 추구해야 하나. 훈련을 통해 춤을 자연스럽게 표현해야 하나.
김 안무가는 이렇게 춤을 바라보는 두 모순 사이에서 원론적인 고민에 빠졌다. 그가 추구하는 방향은 단단한 상태로 귀결되지 않고 '부자연'과 '자연'스러움을 오가며 모순을 밝혀내는 일이다. 즉 안정적으로 흘러가는 결론이 아니라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상태에 집중했는데, 그렇게 꽂힌 '중간(middle)'은 이번 공연의 중요한 마중물이 됐다. 양쪽 끝에서 정해진 해답이 아니라 다소 모호해도 스스로 정답을 찾을 수 있다고 자신하면서.
안무가의 뇌리를 스친 것은 스포츠의 한 장면이었다. 걷기와 달리기의 중간 상태인 경보. 이 스포츠는 < middle walking middle >에서 중요한 모티브가 됐다. 경보는 알다시피 달리기가 아니다. 그렇다고 걷기인가? 조금 친절하게 설명하면, "걷는 방식을 유지하면서 달리기에 다다르지 않아야 한다"라는 룰이 있다. 걷는 것도, 달리는 것도 아닌 중간 상태의 몸을 유지하는 것이 경기의 핵심이다. 규칙적인 입장에서 보면, 달리기와 걷기의 몸을 동시에 위반하는 경보는 그가 시종일관 집중해 온 '중간적 몸'이 요동치는 분야였다.
▲ 김건중 공연 장면 ⓒ BAKI
#1 느림 vs. 빠름
그는 경보를 '느린 스펙터클'로 비유했다. 역동성을 나타내는 '스펙터클'에 어떻게 '슬로'의 개념을 붙일 수 있단 말인가. 여기서 스펙터클에 '빠른'이라는 형용사가 붙는 명제에 '우리가 왜(why)라고 묻지 못하는지' 반문한다.
시작은 강렬하다. 암전된 무대를 밝힌 중앙에 세 명의 운동선수가 서 있다. 희미한 리듬에 맞춰 그들은 눈에 띄지 못할 정도로 몸을 비튼다. 이는 이동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미세하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그들의 몸이 이전과 달라졌음을 눈치챘다. 서서히 뒤틀리는 동작은 처음과 다르게 서 있는 것조차 불편해 보인다. 굼벵이보다 더 느리게, 나무늘보처럼 시나브로 움직이는 변형된 몸은 점차 뒤틀림의 강도가 심해진다. 이것은 무대 위에서 완벽한 동선을 자랑했던 기존 무용의 새로운 대안인가. 아니면 동작의 흐름을 아주 면밀하게 관찰하라는 안무가의 친절한 배려일까.
끊임없이 움직이는 < middle walking middle >은 우리가 알고 있던 스펙터클 방식으로부터 탈피한다. 이것은 '뛰지 않고 걸어야' 하는 경보의 숙명을 거치지 않고 서서히 변형되는 몸을 실천한 것이다. 아주 집중하지 않으면 어떻게 변했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진행 과정에 빠져든다. 이것이 맞고 틀리냐의 문제를 논의하자는 것이 아니다. 안무가는 오롯이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느림과 빠름의 속도 변화는 무용에서 진행할 수 있는 다양한 옵션을 동시에 제공함으로써 과거에 일반적으로 받아들였던 무용을 되돌아보는 계기라고 여겼다.
▲ 김건중 공연 장면 ⓒ BAKI
#2 반칙 vs. 규칙
경보는 걷기와 달리기의 '중간 상태'를 유지한다. 어쩌면 반칙과 규칙의 경계선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둘 사이에서 묘한 긴장감을 안고 시종일관 같은 패턴을 유지하는 게임. 규정을 지켜야 하는 입장에서 이 반칙의 미학은 무용 판의 관람 방식과 묘하게 닮았다. 비언어적인 몸이라는 수단으로 창작자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이 장르에선 관객들 이해의 폭이 생각보다 넓다. 그에 반해 연극이나 전시는 주최자의 의도가 처음부터 드러나는데, '선 제공 후 감상'이라는 익숙한 패턴에 따라 관람객은 공급자의 지령(?)에 몰입할 수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몸을 통해 이해해야 하는 무용에서는 관객들이 체감하는 깊이(Depth)가 제각각이다. 특히 현대무용의 영역으로 넘어가면서 이 편차는 더욱 넓어지기 시작했다. 창작가가 "어떤 의도로 만들었는지"에 관한 선제공격은 오히려 당사자의 이해를 편협하게 만드는 역효과를 초래한다. 이것은 작품의 의도가 다양할 수 있다는 포용성에 태클을 건다. 저마다 살아온 길이, 같은 동작이라도 느끼는 바가, 각자 공연에 임하는 마음가짐이 다를 텐데 우리는 비슷한 반응에 박수를 보내는 것에 우려를 표하는지 모른다.
< middle walking middle >은 각자의 시각으로 공연을 중간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길 원한다. 각자 정해진 규칙을 가지고 어떻게 판단하는지 바로미터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골반을 뒤트는 무대 위에서 경보를 마주할 때, 관객은 어떻게 생각할까. 이것은 또 다른 의미로 공연의 관람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공연을 보고 있을까?" 경보의 기준처럼 관객이 무용을 바라보는 과정도 그에겐 흥밋거리가 된다.
▲ 김건중 공연 장면 ⓒ BAKI
#3 움직임 vs. 호흡
<middle walking middle>은 별도의 무대장치가 필요치 않다. 무대와 무용수만 현장을 가득 채울 뿐. 과장해서 눈에 띄는 오브제라곤 공간을 채우는 소리 외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오직 몸에 의존해 완성된 작품만이 이 작품의 시그니처가 된다. 그럼에도 세밀하게 움직이는 동작은 청각적 요소의 도움을 받는다. 무대의 한쪽 구석에서 흘러나오는 속삭임이나 리드미컬한 두드림에 따라 선수들은 제 몸을 맡긴다. 여기에 후반부로 갈수록 극한으로 치닫는 경보 선수의 숨소리에 그들은 몸이 좌우되고 있음을 느낀다.
전반부에 집중했던 움직임이 후반부로 갈수록 호흡에 방점을 찍는다. 이런 이유로 안무가는 "들숨과 날숨의 중간 상태"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어떤 것이 호흡의 정의인지 알 수 없는 '중간 상태'에 관한 고집은 멈추지 않는다. 마치 100미터 선수가 내뱉는 호흡과 마라토너의 그것이 다르다는 부연 설명을 통하여 중간에 자리 잡고 있는 위치를 몸으로 표현한 것이다.
경보가 내포한 몸의 성질을 무대로 옮기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지점은 '호흡'이다. 끊임없이 일관된 속도를 유지해야 하는 경보에서 리듬에 몸을 맡기다 보면 일정한 호흡이 튀어나온다. 이것은 뛰는 만큼 몸을 극적으로 끌어올리지도 않으면서 일정 강도 이상의 긴장을 유지시키는 특정 상태가 지속된다. 단거리와 장거리 달리기에서 나타나는 호흡과 분명히 다른 호흡을 무대 안에서 공명시킨다.
▲ 김건중 공연 장면 ⓒ BAKI
#4 찰나 vs. 동작
무용수의 움직임은 연속된 동작으로만 승부 걸지 않는다. 병원에서 한 번쯤 경험했던 컴퓨터단층촬영(CT)처럼 < middle walking middle >은 하나의 파편으로 몸짓을 기억한다. 모든 동작은 부드럽게 흘러가는 동작이 아니라 아주 원초적인 조각 모음들이 낱낱이 공개되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몸이 변해가는 과정에서 나온 온갖 표정들은 관객들이 친절하게 감상할 수 있도록 찰나의 순간으로 제공된다. 어느 무용수의 완벽한 몸짓이 아니라 다소 뒤틀린 생김새에서 파생된 여러 순간들이 재현되는 것처럼.
무용수들은 떨림의 과정에서 중간 지점에 집중한다. "무용수들의 동작을 어디까지 잘라낼 수 있을까?"를 실험하듯 완벽한 결과보다는 만들어지는 과정에 무게를 더한다.
'아르코 댄스&커넥션 '은 유사 사례를 찾아보기 힘든 플랫폼 지원사업이다. 본래의 취지가 '다양성'에 근간을 두고 무용의 확장 가능성을 실험하듯 무엇보다 '연결'이 전제로 선다. 그런 과정에 맞춰 안무가는 다양한 것을 실험하고 여러 협력자들과 함께 축적된 리서치 과정을 펼쳤다. 안무가는 이번 작품을 위해 20개의 옵션을 던졌지만 기껏해야 하나 정도 채택됐다며 확률 싸움이라 고백했다. 이것은 그만큼 제작 과정에 공을 들였다는 점을 강조했다.
'중간'이 주는 효과
▲ 김건중 포스터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비언어적 퍼포먼스로 특정 메시지를 공유하는 현대무용. 하지만 이것을 업으로 먹고사는 이들이 아니라면 장르의 진입장벽이 낮다고 볼 순 없다. 일반 관람객의 입장에선 심오한 키워드를 몸으로 표현하는 방식이 결코 쉽지만은 않다. 하물며 다양성이 존중되는 동시대에 와서는 그것을 소화하는 과정도 각양각색이다.
하지만 필자는 20년 가까이 다양한 무용을 접하면서 느낀 점이 있다. 안무가들이 의도한 바를 강요받는 것이 같아서 작가와의 만남에 동참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번 공연은 1시간에 걸친 뜨거운 대담을 통해 "여러 무용인의 시선이 이보다 다양할 수 있을까?"를 직감했다. 각자의 멘트는 분명 이번 작품에서 의도했던 '다양성' 측면에서도 상당히 유의미한 결과를 증명했다. 또한 이번 작품을 오랫동안 준비한 김 안무가도 "이것이 아름답지 못해도 누군가에게는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까요?"라는 질문을 통해 자신의 바람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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