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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여성-성 소수자 여성-노인 여성 이야기

[리뷰] 영화 <딸에 대하여>

등록|2024.11.12 16:16 수정|2024.11.12 16:19
동네 한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던 중이었다. 영화 〈딸에 대하여〉의 원작 소설을 읽었던 그 순간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소설과 영화에는 이런 관계들이 등장한다.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중년 여성 주인공과 그의 딸, 전셋집에서 쫓겨나 주인공 집에 들어와 살게 된 딸과 딸의 동성 연인, 주인공이 일하는 요양 시설 사람들과 그가 맡아 돌보는 여성 노인. 어디를 봐도 고단하지 않을 법한 삶이 없고, 고상하고 평안한 관계는 기대하기 어렵다.

중년 여성-성 소수자 여성-노인 여성이라니 잘 팔릴 만한 얘깃거리가 될 등장인물도 없다. 한참 신생 노동조합들이 우르르 생겨나 정신없었을 2019년 즈음에 내가 무슨 생각으로 이 책을 장바구니에 넣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이 책은 내 인생의 작 은 한순간을 글과 함께 박제해 버렸다. 이 용감한 소설이 영화화된다니 안 볼 도리가 없었다.

엄마의 성장기

▲ 영화 <딸에 대하여> 스틸컷 ⓒ 찬란


제목은 <딸에 대하여>지만 이 이야기는 엄마의 성장기다. 젊은 시절 직업전선에서 쌓은 경력과 고학력이 오히려 취업의 걸림돌이 되는 중년의 요양보호사는 홀로된 인지장애 노인을 돌보며 자신의 미래 또한 그렇게 되지 않을까 불안하다. 그렇지만, 그래서, 노인을 존엄한 인간으로 대하고자 애쓴다. 먹고사니즘에 존엄을 저당 잡히지 않으려는 그의 인간적인 노력은 기저귀를 잘라 쓰고 세탁기도 최소한 돌리라는 요양 시설에서 너무나 당연히 예상되는 위험에 처한다.

딸은 안정된 미래를 가꾸며 엄마를 안심시키기는커녕 새로운 세계의 갈등을 끌고 집으로 들어온다. 세상이 허락한 관계 속에서는 오로지 '같이 있는 것'만이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이라 따로 살 수 없다는 동성 연인과 함께. 거기다 딸은 성 소수자라는 이유로 해고된 동료를 위해 함께 싸우고 있다. 혐오의 세계에서 자신의 '소수자성'을 밝히고 사회의 배제를 자처하며 싸우는(싸울 수밖에 없는) 딸이 걱정되고 답답하다. 나도 관객들도 함께 탄식을 내뱉었다. 옳고 그르고를 떠나 '나는 처하고 싶지 않은' 고단한 길이 아닌가. 남편은 죽고, 딸은 소수자에, 존엄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이 '주제넘은 짓'으로 무시당하는 노동을 하며 사는 그녀의 삶을 영화는 담담하면서도 충격적으로 직면하게 한다.

그녀가 돌보던 노인의 거취가 위기에 처하면서 조마조마하던 그들의 삶은 새로운 장으로 나아간다. 놀랄만한 그녀의 용기로, 어쩌면 어쩔 수 없는 지극히 인간적인 선택으로 결성된 새로운 공동체는 '어쩌면, 어쩌면 우리도 이렇게 살 수 있을까'하는 내 마음속 가능성의 문을 두드렸다. 정상성을 벗어나는 시민에게 너무나 가혹한 이 세계에서 다른 관계와 다른 공동체의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는 엄마의 성장은 영화 내내 느낀 고단함을 압도하고,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는 용기를 끝내 퍼 올렸다.

작가는 어떻게 이런 세계 간의 충돌을 머릿속에 그려봤을까? 소설을 읽었을 때 궁금했는데, 소설이 영화가 되고 상상 속 인물들의 얼굴이 화면에 등장하자 이유를 알겠다. 돌보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돌보는 이들을 위하다 보면 성찰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돌봄의 사회적 필요가 점점 더 커지는 사회에서 '여자가 당연히 집안에서 하는 일'로 평가절하된 저임금 필수 노동자의 이야기를 하자면 지금 이 세계에 대한 성찰을 안 할 수가 없다. 거기에다 가부장적 정상성에 피 터지게 저항하는 딸들의 세계까지 끌고 들어와서 돌봄이 주는 성찰이 새로운 관계를 포용할 가능성이고, 다른 세계를 상상할 힘이라는 것을 이 이야기는 눈부시게 역설한다.

노동조합 간부들과의 취중논쟁

▲ 영화 <딸에 대하여> 스틸컷 ⓒ 찬란


그 용기 덕에 얼마 전 한 사업장 노동조합 간부들과 취중논쟁을 벌였다. 젊은 남성 조합원 일색으로 여성도 장애인도 없는 사업장에서 그들은 노동조합의 사회성, 연대와 기여의 소중함을 놓치지 않으려고 해마다 조합원 교육에 대단한 공을 들인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애틋하고 자랑스럽지만 안타까운 마음에 했던 말이 싸움이 됐다.

"회사에 여자를 뽑아요. 일상에 다양성이 있으면 그렇게 맨날 맨바닥에서부터 연대를 고민할 필요가 없지."

진심이다. 일상에 '나와는 다른' 누군가가 있으면 세상 보는 눈도 달라진다. 제조업 유노조 킹산직 젊은 남자로 이뤄진 '효율적 생산 집단'이 어떻겠는가. 공장 밖의 수많은 다른 노동자들을 생각할 계기가 있겠는가. 그저 높이고 지키고 싶은 마음을 잘못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가족임금을 위해 높이고 지키는 동안 자기 주변의 여성들에게 '개인적으로' 맡겨놓은 돌봄이란 필수 노동을 직면하는 것이 얼마나 두렵겠는가. 여성과 장애인이 있는 사업장과 없는 사업장은 이런 문제를 바라보는 생각의 출발선이 다르다.

"그럼 없어진 여자 화장실부터 다시 지어야 하고, 현장에서 관계에 문제가 생기고, 여자가 하기 힘든 일이고, 골치가 아프고" 등으로 시작해 온갖 공방이 오가다가 "그래 니네끼리 좋은 직장 다니면서 마누라 애새끼 건사해가며 잘 먹고 잘살아라 이 가부장들아! 이 멸종 위기종들아!"라는 말까지 하고 말았다(앗, 물론 아무한테나 이러면 안 된다. 큰일 난다. 서로 잘 알고, 그들의 선한 마음을 끊임없이 봤으니까 했다. 이미 '남성적 일자리'가 되어 여성을 다 밀어낸 현장을 반대로 바꾸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1).

아마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매년 그랬듯 그들의 소중한 노력에 감동하고 현상 유지를 위한 교육 준비에 최선을 다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성 직군(내부노동시장)-여성 직군(외부노동시장)'의 양극단 중 가장 좋은 쪽 가까이 있는 동료들의 삶이 이제는 위험해 보인다. 다른 쪽 끝 가까이의 엄마와 딸들은 이런 세상에 살 수가 없는데, 우리는 보호시설에서 사랑받는 푸바오처럼 이젠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좋은 노동조합'의 '가족임금 받는 가부장'이라는 멸종 위기종으로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자이언트판다는 인공번식 노력으로 멸종 취약종으로 겨우 바뀌었다는데, 좋은 노동조합을 지키고 더 많이 만드는 게 그런 인공번식 수준에 그친다면 그게 다 뭔가. 이 사회를 위해서나 애틋한 그 노동조합을 위해서나 돌봄의 기쁨과 성찰 가능성을 빼앗긴 나의 젊은 동료들을 위해서도 그게 다 뭔가. 노동조합이란 게 자연에서처럼 다양하게 어울려 살며 번성하지 못하면 보편권리를 위한 집단이 아니라 특수계층 메이커 이상의 무엇이 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돼서 뭐하겠는가. 영화 속 그 여자들과 내 소중한 남자들 삶의 간극이 '천문학적으로' 먼 것 같다. 아득하다.

40대 여자가 된 나에게도 돌봄은 두려움이다. '좋은 노동조합'을 가진 그들에게도 돈이 있어 조금 덜 걱정일 뿐 언젠가 개인이 직면하고 감당해야 할 두려움일 것이다. 생산/재생산이 각기 성별 직군으로 파편화된 불안정하고 불평등한 사회에서 우리는 우리 삶의 저변인 돌봄 노동을 생각하기를 일단 접어두고 있다. 그런 우리 동료들과 지금 바로 이 영화를 함께하고 싶다. 이 영화야말로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충격과 용기를 모두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날이 올까?


1) 한편 "어떤 일자리가 '남성적 일자리'라 할 때 처음부터 남성이 유입되어 안정화되었는가, 아니면 안정적 일자리였기 때문에 남성이 유입되었는가 하는 점은 명확하지 않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같다고 볼 수 있다. _이소진, 《시간을 빼앗긴 여자들》, (갈라파고스, 2021), 100." 참조, 이 사업장은 여성이 존재했으나 노동조합 설립 후 좋은 일자리가 되면서 서서히 여성들이 자연 소멸(정년)한 사업장이란 점에서 애초에 여성이 일할 수 없는 일자리였던 것은 아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격월간 <비정규노동> 169호에도 실립니다.글쓴이는 김유진(산별노조 지역 사무처)입니다. 이 글은 한국비정규노동센터에서 발행하는 격월간 <비정규노동> 169호 11,12월호 '영화관에 간 노동자' 꼭지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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