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과 외교로 독립운동 활성화에 크게 기여
[오늘의 독립운동가 61] 11월 8일 출생한 신언준 지사
▲ 신언준 지사, 인성학교가 있던 자리 ⓒ 국가보훈부
1904년 11월 8일 신언준(申彦俊) 지사가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태어났다. 지사는 1938년 1월 20일 불과 34세에 타계했다. 동아일보 중국 특파원으로, 또 임시정부 요인으로 많은 활동을 하던 중 병을 이기지 못하고 안타깝게 요절했다. 다음은 그가 1928년 <신인간> 6월호에 발표한 글의 일부이다.
정의와 진리의 시대는 반드시 올 것입니다. 정의와 진리는 공허한 개념인 듯하면서도 위대하고 확실한 실재이며, 무력한 듯하면서도 전인류의 사회를 영원히 지배합니다. (중략) 진정한 영생과 진정한 해탈과 진정한 행복은 십자가를 궤배(인용자 주: 무릎을 꿇고 절함)하거나 불상 앞에서 염불을 외거나 산신, 목신 앞에 기도하여 얻을 것이 아니고, 오직 진리와 정의를 위하여 최후의 일각까지 부단히 분투함에 있습니다.
14세이던 1918년 정주 오산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오산학교는 신민회 계열의 독립운동가이자 1919년 33인 대표 중 한 분인 이승훈이 설립한 민족학교였다. 신언준 학생에게 민족의식이 고취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19세에 중국 망명, 독립운동 투신
중국에 도착한 신언준은 항주 영문전수학교(1923년), 오송 국립정치대학 및 동오대학에서(1924-27년) 법학을 공부했다. 대학에 다니던 1924년 3월 10일 상해에서 윤자영, 조덕진, 최충신 등과 함께 진보적 청년 독립운동단체 '청년 동맹회'를 조직해 활동했다.
청년동맹회 목표 : 민족적 확고한 단결과 조직 위에서 자유와 독립을 획득하자.
청년동맹회 실천강령 : 독립운동의 기치 하에서 민족적으로 일치 단결하자. 민족적 독립의 완성을 위해 희생적으로 분투하자.
1926년 7월 임시정부(당시 국무령 홍진)가 민족유일당 건설운동을 촉발하자, 이에 부응해 상해지역 학생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추진했다. 그 결실로 10월 주요섭(소설 '사랑손님과 어머니' 작가) 등과 함께 상해 지역 '한인 학우회'를 창립했고, 집행위원으로서 지육부(智育部)를 맡아 한인 학생들은 물론 교민들에게 항일 민족의식을 전파하고 배양하는 데 앞장섰다.
임정 산하 인성학교 교사로 민족교육 실시
1924년 임시정부 산하 대한교민단이 설립해 운영하던 '상해 인성학교' 교사로 초빙되어 독립지사 및 교민 자녀들을 교육했다. 당시 인성학교는 교장을 조상섭과 여운형, 학감(요즘의 교감)을 만주 신흥무관학교 교관이었던 윤기섭, 교사를 김두봉 등이 맡아 근대식이면서도 민족주의에 입각한 교육을 철저하게 실시했다.
신언준 교사는 20세에 불과했지만 성실과 열성으로 맡은 소임을 다한 끝에 투철한 민족 독립운동가로 주위의 신망을 쌓았다. 그 결과 이듬해에는 겨우 21세에 상해 대한교민단 의사회의 추천으로 인성학교 학감이 되었다. 이는 그가 상해의 민족운동가들로부터 큰 기대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21세에 인성학교 교감, 23세부터 언론인 활동
1927년 12월 7일 신언준은 흥사단에 가입했고, 안창호를 도와 독립운동 문건 작성, 통역, 강연 등의 역할을 수행하며 독립운동의 저변을 넓혀 갔다. 또 그해부터 1929년까지 그는 상해 중앙일보 논설위원, 세계신문 아주 부장 등으로 근무하면서 세계 열강들의 동향과 동아시아 정책을 분석하여 보도했다.
1929년부터는 동아일보 상해 및 남경 특파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동아시아 정세 및 열강들의 동향을 분석 보도하고,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 상황을 국내외에 전파했다. 중국 각 신문과 잡지에 논설을 게재해 중국인들의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우호적 여론을 조성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만보산 사건의 진실을 국내에 알렸다
1931년 7월 2일 일제는 중국인을 매수해 길림성 장춘현 만보산 지역에서 한국 농민들과 충돌하도록 조장했다. 실상을 잘 알지 못한 채 중국인들 사이에는 반한 감정이 폭등했고, 국내에서는 한국인들이 중국인들을 공격하는 사태까지 빈발했다.
신언준은 '만보산 사태'가 일제의 만주 침략을 위한 교묘한 술첵이라는 사실을 긴급히 본사에 알렸다. "만보산 사건에 대해 국민정부 외교부가 일본 정부에 항의하고, 국제연맹에 호소하여 정당한 해결을 도모하려고 한다. 상해 조선인 각 단체들은 국내의 동포들이 은인자중하여 보복적 행동과 같은 일은 피해주기 바란다"는 내용이 긴급히 동아일보 본사에 송신되었다.
덕분에 만보산 사건의 본질을 파악하게 된 동아일보는 7월 7일 자 신문에 "2천만 동포에게 고함- 민족적 이해를 타산하여 허무한 선전에 속지 말라"는 사설을 게재했다. 사설은 일제의 한-중 양민 이간책에 대한 경계를 촉구했다. 그 결과 국내의 중국인에 대한 공격이 비로소 자제되었다.
이봉창 의거, 윤봉길 의거, 안창호 피체
1931년 9월 18일 일제가 만주 침략 전쟁을 도발하자,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새로운 돌파구 마련을 위한 방책의 하나로 한인애국단을 창립했다. 한인애국단은 1910년대 광복회, 1920년대 의열단과 마찬가지로 암살, 파괴 활동 등을 염두에 둔 의혈 투쟁단체였다.
1932년 1월 8일 한인애국단 최초 거사가 일어났다. 이봉창 의사가 동경에서 일본 국왕을 향해 폭탄을 던짐으로써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신언준은 즉각 이봉창 의사가 일본으로 떠나기 직전 폭탄을 들고 찍은 사진을 중국 언론인들에게 전달해 한국인의 독립 의지가 지구촌 곳곳까지 알려지도록 하는 데 큰몫을 하였다.
곧 이어 4월 29일 상해 홍구 공원에서 일본군 대장 등을 죽게 만든 윤봉길 의거 때도 신언준은 마찬가지 활약을 하였다. 윤봉길 의거를 계기로 중국인들은 한국 민족의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후원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중국 국민당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재정적 지원과 군사적 협조를 했고, 그로써 한국 독립운동은 그간의 침체 상황을 불식하고 아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깊은 병을 얻었다
윤봉길 의거 이후 일제의 대대적 검색이 실시되면서 안창호가 국내로 압송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신언준은 흥사단에 종전보다 더 많은 관심과 시간을 투여하는 한편, 1933년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 특별반'이 설치되도록 하는 외교 활동에 크게 힘을 기울여 성사시켰다.
하지만 젊은 몸에 병이 찾아왔고, 급기야 1936년 1월 치료차 국내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후 모든 치료와 요양이 하나같이 허사였고, 안타깝게도 그는 귀국 2년 후인 1938년 1월 20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겨우 34세였다.
덧붙이는 글
국가 인정 독립유공자가 1만8천여 분 계시는데,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하려면 1500년 이상 걸립니다. 한 달에 세 분씩 소개해도 500년 이상 걸립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날, 의거일 등을 중심으로 '오늘의 독립운동가'를 써서 지사님들을 부족하나마 현창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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