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땅에 혁명의 씨앗을 남긴다
[동학대서사시, 모두가 하늘이었다 10] 수운 최제우 선생 탄신 200주년, 동학농민혁명 130주년, 후천개벽의 동학이 창명되다
▲ 멀고 가까운 곳에서 모여드네수운 최제우 선생이 동학을 창명했다는 소식을 듣고 멀고 가까운 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기를 업은 아낙네, 지게를 진 아저씨, 갓을 쓴 선비, 빨래하던 어머니들, 세상을 곧 등져야 할 노인들, 이러한 상황을 가리켜 수운 선생은 "원처 근처 어진선비 풍운같이 모아드니 낙중우락 아닐런가" 하면서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 관의 탄압은 갈수록 심해져 동학을 뿌리채 없애려고 하였다. ⓒ 박홍규
(*지금까지 동학사상의 중요한 부문을 살펴보았다. 이후 연재는 동학의 역사와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에 치중할 것이다. 다만 동학사상에서 첫 출발을 의미하는 주문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 기자말)
천년의 적막을 깨다
"금년으로써 백 년 전, 경신 4월 5일에 정말 어마어마한 역사적 대사건이 경주 일원인 수운 선생이 거주하던 현곡면 가정리 일대에서 발생했다. 37세 되던 경신년 4월 5일에 수운 선생 최제우는 천계를 받았다.
그런데 역사도 왕왕 기적적 약동이 있는 모양인지라 혼수에 취몽으로 지리한 천년의 적막을 깨트리고 하늘에서 외우는 소리는 웬 셈인지 마룡동 최제우를 놀래 깨운 것이다.
이것이 과연 역사적 대강령이며 동시에 신도성시 정신의 기적적 부활이라 할 것이다. 국풍의 재생이라 할 것이며, 사태의 경이라 할 것이다. 정말 어마어마한 역사적 대사건이었다."
동학은 주문의 힘에서 비롯된다
수운 선생께서 주문(呪文)은 동학사상에서 첫 출발이라고 말씀하였다. 우리 역사에서 동학이 남긴 흔적은 '주문의 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강령주문(降靈呪文)
지기금지원위대 강(至氣今至願爲大 降)
본주문(本呪文)
시 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 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수운 선생의 주문풀이 즉 해의에서, 동학의 주문수도를 지극정성으로 하면 모든 사람들이 지극한 성인(聖人)에 이른다는 그야말로 천지개벽과 같은 엄청난 논리를 펼쳤다. 이를 한층 깊게 들여다보면 모든 사람들이 지극한 성인에 이른다는 것은 바로 모든 사람들이 하늘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다시 말하자면, 원래 모든 사람들이 성인이자 하늘이라는 것이었으나, 그 진리를 잊고 또한 모르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설명이다. 수운 선생의 결론적인 이야기는 '모두가 하늘이었다'로 귀결된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천명
동학을 창도한 지 3개월 되던 신유(1861)년 9월에 이르자 유생들의 비난과 모함이 시작된다. 경주를 비롯한 동학이 퍼진 인근 고을에서도 음해는 기승을 부렸다. 경주 최씨 문중에서도 남보다 몇 배 심한 비방의 말이 나돈다.
10월에 이르자 비난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기득권을 지키려는 유림(儒林)은 사람을 속여 정신을 홀리고 세상을 어지럽힌다며 동학을 혹세무민(惑世誣民)으로 몰아붙이니 경주부에서는 동학 금지령을 내린다.
또한 관에서는 동학을 서학으로 몰면서 탄압을 본격화한다. 수운 선생은 관의 지목도 피할 겸 새로운 구상도 세울 결심으로 11월(양력 12월 초) 초순에 제자이자 먼 친척인 최중희(崔仲羲_접주가 됨)를 데리고 함께 경주를 떠난다.
처음 도착한 곳은 울산이었다. 지난날 6년간 살았던 울산에는 서군효(徐群孝_접주가 됨)와 여러 제자와 친구들이 있었다. 울산에서 여러 날을 머물며 지내다가, 누이동생(남편은 김진구_金振九)이 있는 부산으로 향한다.
수운 선생은 제자들에게 보낸 통유문에서 다름과 같은 글을 남겼다.
"지난해 동짓달에 떠난 것은 본래 강상의 청풍이나, 산간의 명월과 더불어 노닐자는 것이 아니었다. 어긋난 세상의 도리를 살피고, 관의 지목하는 혐의로 말미암은 것이며 무극한 대도를 가다듬어 포덕할 마음을 소중히 여겨서이다."
▲ 동학과 동학농민군의 유적지 교룡산‘동학과 동학농민군의 유적지 교룡산’ 기념비는 2006년 11월 26일, 남원시와 남원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세웠다. 기념비 내용은 수운 최제우 선생께서 1861~2년 사이 은적암(덕밀암)에서 논학문(동학론) 등 동학경전 집필과 칼노래를 부르며 칼춤을 추셨다는 기록과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김개남 장군의 활략상이 담겨있습니다. ⓒ 동학혁명기념관
수운 선생은 누이동생과 작별을 고하고 다시 길을 떠난다. 어디를 갈지 정하지 않고 길을 가야 하는 처지였지만 동학을 지켜내야 한다는 의지로 충만해 있었다. 제자 최중희와 함께 이곳저곳을 다니다 결국 전라도 남원으로 향한다. 부산에서 며칠을 지낸 후 배를 타고 낙동강 서쪽의 웅천 마을(현재 진해시)로 갔다.
웅천에는 수운 선생의 둘째 큰어머니 서씨의 오빠(외삼촌)가 살고 있었다. 이때 배편으로 낙동강을 건넜다는 설과 함께 웅천에서 하루를 지내다 다시 말을 타고 낙동강을 건너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곳에서 수운 선생은 깊은 생각과 함께 말을 타고 강 위를 평지 가듯 건넜다는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수운 선생께서 경주 용담을 떠나 남원으로 이동하는 경로를 살펴보면 단순히 모함과 탄압을 피해 은둔한 것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여정 중에 머문 곳은 친척이나 지인이 있거나 충무공과 같은 위국충신들의 유적지가 있는 곳이었다. 그러니까 남원으로 간 것은 도를 전파하여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방안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도 있다.
남원은 충절의 역사와 전통이 깃든 고장이다. 남원은 임진왜란 때 의병의 집결지였고, 1597년 정유재란 때 남원성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당시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과 수많은 군민이 일본군 5만 6천여 명에 맞서 나흘간 싸웠다고 한다.
일본의 종군승 경념의 기록에는 '남원성은 풀 한 포기 남아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1만여 명이 모두 순절(殉節)한 처절한 항쟁의 현장이 남원이었다. 또한, 용에 관한 이야기가 깃든 곳이 남원이다.
남원의 원래 이름은 용성(龍城)이었다. 남원의 <용성지>에 '용성은 본래 백제의 옛 이름이었고, 용성이라 이르는 것은 교룡산(蛟龍山)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용성이란 이름은 백제의 고룡(古龍)에서 비롯되었다'하여 남원은 용의 지명과 관련이 깊은 곳임을 밝히고 있다.
교룡은 상상의 동물로서 때를 못 만나 뜻을 이루지 못한 영웅호걸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한편, <선가귀감>에서 서산대사는 남원산성을 봉성(鳳城)이라 했다. 동학의 주요 경전을 집필했던 교룡산은 때를 만나지 못한 군왕이나 성인이 깃들만한 곳이었다.
아울러 수운 선생의 가족관계를 고려해 볼 수 있다. 모친이 곡산 한씨로 앞서 언급했듯이 남원은 한때 곡산 한씨가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남원에 곡산 한씨 일가가 살고 있었다면 남원을 찾게 된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동학과 남원의 인연
수운 선생은 광한루 오작교 부근에 사는 서형칠(徐亨七)의 집에서 묵게 된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 등 교중기록에는 '수운 선생이 남원에 와서 처음 서공서(徐公瑞)의 집에 10여 일 간 머물렀다'고 하였다. 그러나 <남원군동학사>에 의하면 한약방을 운영하는 서형칠을 먼저 만났다고 하였다.
수운 선생이 경주를 떠날 때 약종상을 경영하는 수제자 최자원(崔子元)으로부터 노자로 귀한 약재를 받아, 그것을 돈으로 바꾸려고 서형칠을 찾은 것이다.
서형칠은 수운 선생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범상한 사람이 아님을 알게 되어 사제지간의 의를 맺는다. 서형칠은 수운 선생의 눈빛이 '마치 호랑이 눈에서 광채가 뿜어 나오는 것처럼 보여 감히 고개를 들고 마주 볼 수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서형칠은 자신의 약방에 오가는 사람이 많고 어수선하여 누이의 아들인 공윤창(孔允昌)의 집에 열흘 가까이 모셨다. 그 후 서형칠과 공윤창이 동학에 입도하였고, 뒤이어 양형숙, 양국삼, 서공서, 이경구, 양득삼 등이 차례로 입도하여 전라도에 동학의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12월경 남원에서 수운은 <도수사>(道修詞)를 지었다. 고향 떠난 나그네의 심정이 담겨있고, 경주 용담에서 득도하여 수많은 사람이 찾아오는 꿈 같은 시절을 회상한다. 아울러 <도수사>에서 제자들의 조급증을 경계하며 부지런히 수도하여 도를 이루고 덕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수련에 힘쓸 것을 당부한다. 봄같이 좋은 날, 스승과 제자가 함께하는 더없이 좋은 시절이 올 것이라는 희망의 말씀도 놓치지 않았다.
수운 선생은
크고 넓은 천지간에
정한 곳도 없이
길을 떠난다.
동학에 대한 관의 탄압은
무섭게 몰아치고
자신이 어디론가
사라져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이었다.
그 심정 우울하고
의지할 곳조차 없었다.
오직 구부러지고 뒤틀린
지팡이에 벗을 삼고
산천을 굽어보며
길을 떠난다.
그 곳은 전라도에
최초로 동학을 전파한
운명의 남원이었고
결국 혁명의 씨앗을
남기게 된다.
덧붙이는 글
이윤영 기자는 동학혁명기념관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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