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도시3' 출연 운이 좋았죠... 천천히 오래 걷는 배우 될 것"
[인터뷰] 배우 신현용
1996년 여름, 홍수에 휩쓸려 남한으로 떠내려온 '평화의 소'를 소재로 한 낭독극 '소'가 대학로 제이원씨어터에서 지난 8일부터 9일까지 관객을 맞았다.
연극 '소'는 북한이 홍수로 잃어버린 소를 인도적 차원으로 찾아달라는 요청을 해오며 극이 시작한다. 극단산은 "'소'는 한반도 분단의 역사와 상처를 풍자적으로 담아낸 우화"라며 "인간 사회의 이념적 갈등과 분쟁을 소의 운명을 통해 표현했다"고 밝혔다.
이 작품은 남북 평화를 위한 '소' 반환 소동을 다루는데 북한 사투리를 구사하는 배우 신현용이 출연했다. 신현용은 영화 < 범죄도시3 >에서 넉살 좋은 자동문 역할로 '천만 조연배우'라는 별명을 얻었고, 최근 막을 내린 드라마 <굿파트너> 등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는 특히 북한 사투리를 잘 구사하는 배우로도 유명한데, 앞서 연극 <별난 야유회>에서 북한군인 '고몽' 역을 맡아 구수한 북한 사투리를 자연스럽게 구사했다.
연극이 지난 2일 신현용 배우를 작은 카페에서 만났다. 신현용은 "우리는 같은 언어를 쓰는 민족"이라며 연극에서 북한 군인과 남한 군인이 친구가 되는 모습을 언급하기도 했다.
아래는 배우 신현용과 나눈 대화를 일문일답으로 정리한 것이다.
"인민군 같다는 농담, 그땐 상처였지만..."
- 북한 사투리를 잘하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
"북한 사투리(특히 평안도와 함경도 사투리)를 잘하게 된 데에 외모도 영향을 미쳤다. 중학교 때 친구가 '너는 머리가 크고 몸이 깡말라서 꼭 인민군 같다'라는 농담을 했다. 그 말이 그 당시엔 상처였다. 그래서 몸을 키우려고 한동안 헬스장에 다니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내가 배우가 되고 보니, 작고 마른 체구에 머리까지 짧게 자르면 북한사람 역할이나 연변사람 역할을 맡기더라. 역할을 맡고 새터민 선생님을 통해 북한 사투리를 녹음해 공부했는데, 생동감이 좀 덜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하나원과 사회에서 사투리가 순화된 분들이 많아서 그렇지 않나 싶다. 그래서 독학으로 북한 고위층의 문화어와 함경북도 사투리를 공부했다."
- 배우를 꿈꾸게 된 계기가 있나.
"중3 때 본 공연 때문이다. 도구를 이용한 퍼포먼스 공연 '난타'였는데 충격이었다. 대사도 없는데 내용이 와닿았다. 누군가는 그릇을 집어 던지는데 누군가는 착착착 다 정리하고, 칼질도 요리사들 못지않게 하는 것이 얼마나 멋지던지 부모님 다음으로 좋아했던 스타크래프트 게임도 시들해졌을 정도였다.
결국 연극영화과에 진학하기 위해 인문계였던 삽교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2 여름방학이 되자마자 나름 큰 결심을 하고 서울로 상경해 연기학원에 등록했다. 배우를 만류하시는 부모님께는 평생 하고 싶은 일 못 해보고 살면 책임지실 거냐며 대들어 부모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 학창 시절 기억나는 이야기라면.
"사실 고교 2~3학년 시절, 거의 가출청소년이라고 오해받을 정도로 학교에 빠지는 날이 많았다. 그때마다 학원에서는 학교로 촬영이나 연기 수업에 대한 일정들을 공문으로 보내주셨다. 감사하게도 학교의 배려로 무사히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당시 아주 가끔이지만, 드라마에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고, 아크로바틱과 판토마임 등 다양한 연기 수업을 했다. 생활은 고모 댁이나 서울 사는 친구들 집, 또는 혼자 무보증 30만 원짜리 하숙집이나 찜질방 등에서 지냈다. 그때 만난 분이 배우 이영석 은사님이다."
- 배우의 길을 가면서 가장 잊지 못할 기억은.
"부모님의 이야기를 빼놓고 삶을 이야기할 수 없다. 아버지는 충남에서 건설사와 석재공장을 운영하며 바쁘게 사셨고, 어머니는 한국화 미술가로서 우리 남매를 위해 헌신하신 분이다. 두 분 덕분에 유복하게 자랐다. 현재 누나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서양화가가 됐다. 배우의 꿈을 좇아 서울로 올라왔는데, 25살 때 아버지가 과로로 쓰러지셨다. 죄책감이 커 당장이라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배우 최귀화 선배가 그런 나를 붙잡아 줬다.
현재 아버지는 건강을 회복하셔서 시인의 꿈을 이루셨고, 어머니는 한국화를 가르치며 행복한 삶을 사신다. 아프기 전에는 서로 바쁘기만 한 생활이었지만 지금은 당시보다 더 행복하다. 부모님이 하고 싶은 일을 하시는 모습이 나에게 큰 힘이 된다. 아들로서의 죄송함과 감사함은 끝이 없지만, 천천히 그 은혜를 갚아가며 살겠다."
"천천히 오래 걷는 배우 꿈꿔"
- 배우 문성근의 소개로 현재 소속사에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그렇다. 이 말을 하려면 일단 극단 '차이무'를 소개해야 한다. '차이무'는 명실상부 대학로 최고의 극단 중 하나로 나의 고향 집 같은 곳이다. 20대 중반부터 몇 해 전 극단이 문을 닫을 때까지 8년간 몸담았다. 연극이 만들어지는 첫 단계부터 마지막 공연 후 쫑파티까지 소중한 과정들을 하나하나 몸으로 배워나갈 수 있었던 곳이다.
그 이후 부족함이 많은 나에게 차이무의 가장 선배 배우이신 문성근 선생님의 소개로 지금의 소속사 '더블에스지컴퍼니'를 만났다. 이곳에서 영화, 드라마 등 활동 영역을 다양하게 넓혀나가고 있다."
- 영화 < 범죄도시3 >, 드라마 <굿 파트너> 등에 출연했다.
"운이 좋았다. 좋은 사람이 되어야 좋은 배우가 된다고 믿으며 준비했는데, 출연이 성사됐다. 나는 나를 잘 안다. 손재주도, 일머리도, 삶을 살아가는 지혜도 많이 부족한 사람이다. 실수도 잦을 뿐만 아니라 많은 일에 서투른 편이기도 하다. 엄청난 재능과 외모를 가진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믿는 건 나라는 사람의 진정성이다. 아마도 세월과 함께 조금씩 증명될 거라고 믿는다."
-연기 이외에 하는 일이 있나.
"배우이기도 하지만 한 가정의 남편이자 아버지다. 때문에 경제적인 책임을 져야할 의무가 있어 촬영이나 공연이 없을 땐 소속사의 배려로 '정선아리랑센터'라는 공연장의 무대 팀으로, 혹은 다른 스태프 일로 외도할 때가 있다.(웃음) 극단 차이무에서 연기 이외에 여러 스탭 일들을 두루 거치며 성장한 것이 큰 경험이 됐다. 이런 걸 보면 역시 경험은 곧 무형의 자산이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빨리 달리는 배우는 아니지만 천천히 오래 걷는 배우로 살아가려 한다. 관심과 애정 부탁드린다. 환절기 건강 조심하시길 바란다."
연극 '소'는 북한이 홍수로 잃어버린 소를 인도적 차원으로 찾아달라는 요청을 해오며 극이 시작한다. 극단산은 "'소'는 한반도 분단의 역사와 상처를 풍자적으로 담아낸 우화"라며 "인간 사회의 이념적 갈등과 분쟁을 소의 운명을 통해 표현했다"고 밝혔다.
연극이 지난 2일 신현용 배우를 작은 카페에서 만났다. 신현용은 "우리는 같은 언어를 쓰는 민족"이라며 연극에서 북한 군인과 남한 군인이 친구가 되는 모습을 언급하기도 했다.
아래는 배우 신현용과 나눈 대화를 일문일답으로 정리한 것이다.
"인민군 같다는 농담, 그땐 상처였지만..."
▲ 연극 '별난야유회'에 출연한 배우 신현용(왼쪽 첫번째) ⓒ 신현용
- 북한 사투리를 잘하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
"북한 사투리(특히 평안도와 함경도 사투리)를 잘하게 된 데에 외모도 영향을 미쳤다. 중학교 때 친구가 '너는 머리가 크고 몸이 깡말라서 꼭 인민군 같다'라는 농담을 했다. 그 말이 그 당시엔 상처였다. 그래서 몸을 키우려고 한동안 헬스장에 다니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내가 배우가 되고 보니, 작고 마른 체구에 머리까지 짧게 자르면 북한사람 역할이나 연변사람 역할을 맡기더라. 역할을 맡고 새터민 선생님을 통해 북한 사투리를 녹음해 공부했는데, 생동감이 좀 덜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하나원과 사회에서 사투리가 순화된 분들이 많아서 그렇지 않나 싶다. 그래서 독학으로 북한 고위층의 문화어와 함경북도 사투리를 공부했다."
- 배우를 꿈꾸게 된 계기가 있나.
"중3 때 본 공연 때문이다. 도구를 이용한 퍼포먼스 공연 '난타'였는데 충격이었다. 대사도 없는데 내용이 와닿았다. 누군가는 그릇을 집어 던지는데 누군가는 착착착 다 정리하고, 칼질도 요리사들 못지않게 하는 것이 얼마나 멋지던지 부모님 다음으로 좋아했던 스타크래프트 게임도 시들해졌을 정도였다.
결국 연극영화과에 진학하기 위해 인문계였던 삽교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2 여름방학이 되자마자 나름 큰 결심을 하고 서울로 상경해 연기학원에 등록했다. 배우를 만류하시는 부모님께는 평생 하고 싶은 일 못 해보고 살면 책임지실 거냐며 대들어 부모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 학창 시절 기억나는 이야기라면.
"사실 고교 2~3학년 시절, 거의 가출청소년이라고 오해받을 정도로 학교에 빠지는 날이 많았다. 그때마다 학원에서는 학교로 촬영이나 연기 수업에 대한 일정들을 공문으로 보내주셨다. 감사하게도 학교의 배려로 무사히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당시 아주 가끔이지만, 드라마에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고, 아크로바틱과 판토마임 등 다양한 연기 수업을 했다. 생활은 고모 댁이나 서울 사는 친구들 집, 또는 혼자 무보증 30만 원짜리 하숙집이나 찜질방 등에서 지냈다. 그때 만난 분이 배우 이영석 은사님이다."
- 배우의 길을 가면서 가장 잊지 못할 기억은.
"부모님의 이야기를 빼놓고 삶을 이야기할 수 없다. 아버지는 충남에서 건설사와 석재공장을 운영하며 바쁘게 사셨고, 어머니는 한국화 미술가로서 우리 남매를 위해 헌신하신 분이다. 두 분 덕분에 유복하게 자랐다. 현재 누나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서양화가가 됐다. 배우의 꿈을 좇아 서울로 올라왔는데, 25살 때 아버지가 과로로 쓰러지셨다. 죄책감이 커 당장이라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배우 최귀화 선배가 그런 나를 붙잡아 줬다.
현재 아버지는 건강을 회복하셔서 시인의 꿈을 이루셨고, 어머니는 한국화를 가르치며 행복한 삶을 사신다. 아프기 전에는 서로 바쁘기만 한 생활이었지만 지금은 당시보다 더 행복하다. 부모님이 하고 싶은 일을 하시는 모습이 나에게 큰 힘이 된다. 아들로서의 죄송함과 감사함은 끝이 없지만, 천천히 그 은혜를 갚아가며 살겠다."
"천천히 오래 걷는 배우 꿈꿔"
▲ 범죄도시3에 출연한 자동문역의 배우 신현용범죄도시3에 출연한 자동문역의 배우 신현용 ⓒ 더블에스지컴퍼니
- 배우 문성근의 소개로 현재 소속사에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그렇다. 이 말을 하려면 일단 극단 '차이무'를 소개해야 한다. '차이무'는 명실상부 대학로 최고의 극단 중 하나로 나의 고향 집 같은 곳이다. 20대 중반부터 몇 해 전 극단이 문을 닫을 때까지 8년간 몸담았다. 연극이 만들어지는 첫 단계부터 마지막 공연 후 쫑파티까지 소중한 과정들을 하나하나 몸으로 배워나갈 수 있었던 곳이다.
그 이후 부족함이 많은 나에게 차이무의 가장 선배 배우이신 문성근 선생님의 소개로 지금의 소속사 '더블에스지컴퍼니'를 만났다. 이곳에서 영화, 드라마 등 활동 영역을 다양하게 넓혀나가고 있다."
- 영화 < 범죄도시3 >, 드라마 <굿 파트너> 등에 출연했다.
"운이 좋았다. 좋은 사람이 되어야 좋은 배우가 된다고 믿으며 준비했는데, 출연이 성사됐다. 나는 나를 잘 안다. 손재주도, 일머리도, 삶을 살아가는 지혜도 많이 부족한 사람이다. 실수도 잦을 뿐만 아니라 많은 일에 서투른 편이기도 하다. 엄청난 재능과 외모를 가진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믿는 건 나라는 사람의 진정성이다. 아마도 세월과 함께 조금씩 증명될 거라고 믿는다."
-연기 이외에 하는 일이 있나.
"배우이기도 하지만 한 가정의 남편이자 아버지다. 때문에 경제적인 책임을 져야할 의무가 있어 촬영이나 공연이 없을 땐 소속사의 배려로 '정선아리랑센터'라는 공연장의 무대 팀으로, 혹은 다른 스태프 일로 외도할 때가 있다.(웃음) 극단 차이무에서 연기 이외에 여러 스탭 일들을 두루 거치며 성장한 것이 큰 경험이 됐다. 이런 걸 보면 역시 경험은 곧 무형의 자산이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빨리 달리는 배우는 아니지만 천천히 오래 걷는 배우로 살아가려 한다. 관심과 애정 부탁드린다. 환절기 건강 조심하시길 바란다."
▲ 범죄도시3에 출연한 배우 신현용(사진 중간) ⓒ 신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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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인천투데이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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