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과 융합한 발레, 한계 넘어 파격을 실험"
[리뷰] 이해니 '판 & 옵티콘(Pan & Opticon)'
No pain No gain
몇 해 전, 출근하는데 한 오토바이가 차를 치고 도망갔다. 경찰서에 연락했지만, 순식간에 사라진 이를 찾는 건 쉽지 않았다. 분한 마음을 안고 며칠간 근처를 샅샅이 뒤졌다. 그런데 경찰도 해결하지 못한 것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포기할 무렵, 평소 즐겨 찾던 자동차 커뮤니티에 하소연 글을 올렸다. 그런데 하루 만에 누군가로부터 "우리 가게 앞이라 넘버를 알 거 같다"라는 쪽지를 받았다. 그렇게 미궁 속으로 빠질 뻔한 사건은 우연한 제보로 꼬리가 잡혔다.
당시 에피소드는 소문을 타고 '아침방송에 소개되길 바란다'라는 작가의 연락을 받았지만 이미 머리를 조아린 당사자를 배려해 방송은 허락하지 않았다. 어쨌든 사건을 해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CCTV였다. 30년 전만 해도 미제 사건이 수두룩했지만 이제는 촘촘하게 감시하는 방범용 카메라 덕분에 완전범죄는 설자리를 잃는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인간의 삶은 편리해진다. 하지만 그만큼 내려놓아야 할 부분도 생기기 마련이다. CCTV만 봐도 그렇다. 미아를 찾는데 이보다 더한 게 없지만, 때로는 초상권 문제로 골칫거리가 되기도 한다.
한계를 넘어 파격을 실험한 발레 공연
지난 7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펼쳐진 이해니의 < Pan & Opticon >을 관람하면서, 6년 전 기억이 떠올랐다. 혹자는 이 공연이 사고와 인과관계에서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지만, "일상에서 얻는 편리함과 자유가 통제되는 불편함의 양면성"을 얘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 Pan & Opticon >은 "포스트휴머니즘 시대에 기술이 발달하면서 일상에서 받는 '편리'와 알고리즘으로 족쇄가 채워지는 '불편' 사이에 묘한 줄타기"를 보여주는 발레 작품이다. 클래식 무용의 대명사로 불리는 '발레'에 최신 트렌드를 쫓는 '기술'이 접목된 상황을 언뜻 상상하기 힘들다. 그런데 안무가는 둘의 관계를 토대로 발레 창작품으로 만든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알고리즘 때문에 일상이 감시받는 '판옵티콘'에 비유했어요. 그리스어로 '모두'를 뜻하는 'pan'에 '보다'라는 의미를 가진 'opticon'이 붙은 합성어예요. 순수예술인 발레에 카메라 기술, 쓰리디(3D) 비주얼, 이머시브(immersive) 사운드 기술 등 미래기술을 융합시켰습니다"
제목으로 차용된 '판&옵티콘(Pan&Opticon)'은 원래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인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이 제안한 감옥의 건축양식이다. 이것은 360도로 둘러싸여 언제, 어디서든 죄수를 감시하는 원형 감옥인데, 탈출이 불가능한 이곳에서 일거수일투족 감시를 받으면 당사자의 심리는 어떨까. 그만큼 악명이 높은 곳이다.
# 알고리즘 이면에 감춰진 양면성
출입구를 지나자 무대 바닥에는 이종 종합격투기(UFC)의 케이지를 연상시키는 팔각형 댄스플로어가 깔려있다. 천장에는 미국 프로농구(NBA)에서 볼법한 4대의 모니터가 설치됐다. 이런 장치는 공연장 어디에서도 출연자의 모든 동작을 관람하는데 요긴해 보인다. 중계 화면은 동작을 단순히 재현하는 창구로만 쓰지 않는다. 고도의 편집기술이 집약된 쓰리디(3D)가 요동하는 영상들은 보는 이의 혼을 쏙 빼놓는다. 여기에 카메라 감독이 찍은 찰나는 전광판에 동시에 송출된다. 이를 본 관객들은 공연이 진행되는 내내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한다.
처음 입장할 때, 무대에 설치된 카메라의 방향은 관객이 움직이는대로 따라간다. 사람들이 걷는 방향에 맞춰 자유롭게 방향이 전환된다. 최첨단 기술로 만든 반응형 촬영 장비로 관객들의 이목을 끌었다. 시작이 반이다. 이런 장비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천장에 설치된 것까지 총 5대의 카메라는 공연장에서 좀처럼 빈틈을 허락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카메라가 얼굴뿐 아니라 눈동자에 초점을 맞출만큼 정교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술에 감탄한 것도 잠시. 공연장에서 촬영된 모든 장면은 이미 착석한 이들에게 소스로 제공된다. 실제로 모니터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몇몇은 부끄러운 듯 얼굴을 가린다. 반면에 어떤 이는 신기한 장면을 놓칠 수 없다며 핸드폰으로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막이 오르기 전, 공연장을 울리는 안내 멘트가 인상적이다.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관객들은 편하게 촬영해도 좋습니다."
지금까지 연례적으로 들었던 것과는 정반대다. 공연 도중에 핸드폰을 꺼내서 촬영할 수 있다니. 게다가 셔터 소리만 낮춘다면 마음껏 찍으라는 얘기에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과한 서비스에 놀란 관객들은 처음에 주저하며 옆 사람 눈치를 살피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너도나도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무용수와 관객을 쫓아가는 촬영감독은 그곳에서 일어나는 장면을 허투루 넘기지 않는다. 이 모든 상황이 놓친 장면을 다시 볼 수 있는 장점도 있지만, 자신이 무방비로 노출될 수 있다는 각오쯤은 하고 있어야 한다.
광고 천재 이제석의 포스터가 떠오른다. "적에게 겨누는 총구가 결국에는 자신의 뒤통수에 있다"는 바로 그 장면. < Pan & Opticon >은 인간의 기술화, 기술의 인간화 등이 절묘하게 뒤섞여 동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인간과 기술의 경계를 해체시킨 현대사회는 기술이 인간을 지배할 것이다. 편리와 불편 사이를 오가는 이율배반은 발레의 형식을 빌려 완성시켰다. 그런데 작품을 제작한 이해나 안무가는 무용 중에서도 기술에 가장 보수적인 발레에서 왜 파격을 시도했을까?
"여전히 고전적 성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 창작발레의 한계에 도전하고 싶어요. 기존에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방식보다 이머시브하게 관객을 개입시킵니다"
# 현대 기술이 집약된 무대 구성
< Pan & Opticon >이 펼쳐진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은 블랙박스 시어터다. 공연장의 특성을 십분 살려 가변석을 창작 방향에 맞게 조정할 수 있다. 그래서 안무가는 원형교도소의 콘셉트를 살리기 위해 무대 구성에 집중했다. 무엇보다 기존에 설치된 객석 위치를 뒤틀었다. 출연자는 교도관이 되고, 관객은 죄수가 된다. 내용상 알고 있는 둘의 상관관계가 완전히 역전됐다. 그래서 안무가는 이런 상황을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해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물었다.
동서남북을 오가는 카메라도 부족한지 천장에까지 카메라를 걸었다. 이렇게 사방에서 서라운드로 휘감는 장치는 감시자가 피감시자를 옥죄는데 제격이다. 무대조명은 비네팅으로 처리해 가장자리로 갈수록 어두워진다. 이것은 관객의 시선을 중앙으로 모으는데 큰 역할을 한다.
반응형 렌즈와 사방에 설치된 카메라는 무대 안에서 공연을 집중하게 만든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공연장 밖인 로비에서도 무용수의 동선을 쫓아가는 카메라에 묘한 쾌감을 느낀다. 관객의 시선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사각지대는 눈을 씻고 찾을 수 없다. 또한 단순히 카메라에 노출되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눈동자까지 초점을 맞춘 정교함은 놀라울 따름이다.
#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무너진 이머시브 공연
옥타곤 무대에서 펼쳐진 공연은 시간이 지날수록 무대와 객석의 의미마저 사라지게 한다. 입장할 때 지나친 세 개의 출입문은 이미 객석에 앉는 순간 용도가 바뀌었다. 출입문은 등장과 퇴장을 하는 상수와 하수가 되고, 출입구를 정하지 않고 사방 어디에서나 등퇴장이 자유롭다. 객석과 객석 사이에서 무용수는 관객의 어깨를 스칠 정도로 경계가 무너졌다.
공연이 시작되면 경계의 붕괴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관객을 통제하는 교도관의 쌍안경처럼 손가락을 동그랗게 쥐고 관객들에 집중한다. 무대를 둘러싼 의자를 헤집기도, 앉아있는 관객을 무대에 끌어들여 배우와 함께 동선을 맞추기도 한다. 이미 무대 위에서 여섯 명의 무용수들이 연기를 펼치지만, 예정에 없던 일곱 번째 등장인물에게 미션을 맡기는 모험을 시도한다.
# 알고리즘으로 덫에 빠진 인간의 고민
"핸드폰 없이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현대인은 마음이 편할까"
"기술의 발달이 주체적인 사고를 확장하는데 도움이 될까"
안무가의 질문은 이번 공연에 중요한 메시지가 된다. 단순히 관객 몰입형으로 참여를 독려시키는 차원이 아니다. 편리함과 불편함의 사이를 정신없이 오간다. 인간이 창조한 기술은 오히려 자신의 다리를 붙잡는 덫으로 숨쉴 틈을 주지 않는다. 이제 핸드폰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현실을 반성시키고 싶다.
인간의 조급함을 표현하기 위해 핸드폰 효과음이 적절하게 활용됐다. 출연자의 머리, 어깨, 손목에는 버튼이 있는데, 그들이 한 번씩 누를 때마다 옆 동료는 휘청거린다.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이런 패턴은 기계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반쪽짜리 실상을 폭로한다. 또한 무대에 등장한 관객은 무용수의 버튼을 직접 눌러봄으로써 이보다 완벽한 이머시브 공연이 있을까 되묻는다.
# 미래에 방향을 제시한 컨템포러리 발레는?
무용 분야의 '다양성'에서 저마다의 실험과 시도를 엿본 <아르코 댄스&커넥션>의 피날레는 < Pan & Opticon >이 맡았다. 그런데 이전에 선보였던 현대무용과 다르게 이번에는 발레다.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에서 백조편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발레복과 토슈즈를 신고 공연하는 장면을 상상하지만 발레의 선입견이 무너진다. 아무리 집약된 기술로 무대를 포장해도 안무가가 마지막까지 손을 놓지 않았던 것은 '발레'였다. 여섯 명의 무용수는 전통적인 무대에서 봤던 동작과 다르지 않고, 이것이 컨템포러리 발레라는 외침을 관객에게 외친다. 그만큼 차별화된 발레를 고민해온 이해나 안무가는 오히려 현대 창작발레가 나아갈 방향에 해답을 제시한다.
< Pan & Opticon >은 포스트휴머니즘 시대에 무용의 사회적 역할로서 '차별화된 참여형 컨템포러리 발레'를 고수한다. 이것은 동시대로 넘어와서 '알고리즘으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에 경종을 울린다. 트렌드가 급변하면서 예술가에게 숙제로 떨어진 '예술의 공간적 개념전환'을 고민한 이유는 여전히 고전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창작 발레의 한계 때문이다.
기존에 폐쇄적이고 일방적으로 보여주던 고전 발레는 젊은 관객들을 위해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작품의 서사는 무용수의 동작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객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에 집중했다. 앞으로 발레가 지닌 전형적인 틀을 깨는데 일조하고 싶었던 안무가의 바람대로 멀게만 느껴지는 고급예술이 아니라 일상 가까이 존재하는 예술로서 발레를 감각하길 바라면서.
▲ 이해니 공연 장면 ⓒ BAKI
몇 해 전, 출근하는데 한 오토바이가 차를 치고 도망갔다. 경찰서에 연락했지만, 순식간에 사라진 이를 찾는 건 쉽지 않았다. 분한 마음을 안고 며칠간 근처를 샅샅이 뒤졌다. 그런데 경찰도 해결하지 못한 것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포기할 무렵, 평소 즐겨 찾던 자동차 커뮤니티에 하소연 글을 올렸다. 그런데 하루 만에 누군가로부터 "우리 가게 앞이라 넘버를 알 거 같다"라는 쪽지를 받았다. 그렇게 미궁 속으로 빠질 뻔한 사건은 우연한 제보로 꼬리가 잡혔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인간의 삶은 편리해진다. 하지만 그만큼 내려놓아야 할 부분도 생기기 마련이다. CCTV만 봐도 그렇다. 미아를 찾는데 이보다 더한 게 없지만, 때로는 초상권 문제로 골칫거리가 되기도 한다.
한계를 넘어 파격을 실험한 발레 공연
▲ 이해니 공연 장면 ⓒ BAKI
지난 7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펼쳐진 이해니의 < Pan & Opticon >을 관람하면서, 6년 전 기억이 떠올랐다. 혹자는 이 공연이 사고와 인과관계에서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지만, "일상에서 얻는 편리함과 자유가 통제되는 불편함의 양면성"을 얘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 Pan & Opticon >은 "포스트휴머니즘 시대에 기술이 발달하면서 일상에서 받는 '편리'와 알고리즘으로 족쇄가 채워지는 '불편' 사이에 묘한 줄타기"를 보여주는 발레 작품이다. 클래식 무용의 대명사로 불리는 '발레'에 최신 트렌드를 쫓는 '기술'이 접목된 상황을 언뜻 상상하기 힘들다. 그런데 안무가는 둘의 관계를 토대로 발레 창작품으로 만든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알고리즘 때문에 일상이 감시받는 '판옵티콘'에 비유했어요. 그리스어로 '모두'를 뜻하는 'pan'에 '보다'라는 의미를 가진 'opticon'이 붙은 합성어예요. 순수예술인 발레에 카메라 기술, 쓰리디(3D) 비주얼, 이머시브(immersive) 사운드 기술 등 미래기술을 융합시켰습니다"
제목으로 차용된 '판&옵티콘(Pan&Opticon)'은 원래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인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이 제안한 감옥의 건축양식이다. 이것은 360도로 둘러싸여 언제, 어디서든 죄수를 감시하는 원형 감옥인데, 탈출이 불가능한 이곳에서 일거수일투족 감시를 받으면 당사자의 심리는 어떨까. 그만큼 악명이 높은 곳이다.
# 알고리즘 이면에 감춰진 양면성
▲ 이해니 공연 장면 ⓒ BAK(
출입구를 지나자 무대 바닥에는 이종 종합격투기(UFC)의 케이지를 연상시키는 팔각형 댄스플로어가 깔려있다. 천장에는 미국 프로농구(NBA)에서 볼법한 4대의 모니터가 설치됐다. 이런 장치는 공연장 어디에서도 출연자의 모든 동작을 관람하는데 요긴해 보인다. 중계 화면은 동작을 단순히 재현하는 창구로만 쓰지 않는다. 고도의 편집기술이 집약된 쓰리디(3D)가 요동하는 영상들은 보는 이의 혼을 쏙 빼놓는다. 여기에 카메라 감독이 찍은 찰나는 전광판에 동시에 송출된다. 이를 본 관객들은 공연이 진행되는 내내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한다.
처음 입장할 때, 무대에 설치된 카메라의 방향은 관객이 움직이는대로 따라간다. 사람들이 걷는 방향에 맞춰 자유롭게 방향이 전환된다. 최첨단 기술로 만든 반응형 촬영 장비로 관객들의 이목을 끌었다. 시작이 반이다. 이런 장비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천장에 설치된 것까지 총 5대의 카메라는 공연장에서 좀처럼 빈틈을 허락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카메라가 얼굴뿐 아니라 눈동자에 초점을 맞출만큼 정교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술에 감탄한 것도 잠시. 공연장에서 촬영된 모든 장면은 이미 착석한 이들에게 소스로 제공된다. 실제로 모니터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몇몇은 부끄러운 듯 얼굴을 가린다. 반면에 어떤 이는 신기한 장면을 놓칠 수 없다며 핸드폰으로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막이 오르기 전, 공연장을 울리는 안내 멘트가 인상적이다.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관객들은 편하게 촬영해도 좋습니다."
지금까지 연례적으로 들었던 것과는 정반대다. 공연 도중에 핸드폰을 꺼내서 촬영할 수 있다니. 게다가 셔터 소리만 낮춘다면 마음껏 찍으라는 얘기에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과한 서비스에 놀란 관객들은 처음에 주저하며 옆 사람 눈치를 살피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너도나도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무용수와 관객을 쫓아가는 촬영감독은 그곳에서 일어나는 장면을 허투루 넘기지 않는다. 이 모든 상황이 놓친 장면을 다시 볼 수 있는 장점도 있지만, 자신이 무방비로 노출될 수 있다는 각오쯤은 하고 있어야 한다.
광고 천재 이제석의 포스터가 떠오른다. "적에게 겨누는 총구가 결국에는 자신의 뒤통수에 있다"는 바로 그 장면. < Pan & Opticon >은 인간의 기술화, 기술의 인간화 등이 절묘하게 뒤섞여 동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인간과 기술의 경계를 해체시킨 현대사회는 기술이 인간을 지배할 것이다. 편리와 불편 사이를 오가는 이율배반은 발레의 형식을 빌려 완성시켰다. 그런데 작품을 제작한 이해나 안무가는 무용 중에서도 기술에 가장 보수적인 발레에서 왜 파격을 시도했을까?
"여전히 고전적 성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 창작발레의 한계에 도전하고 싶어요. 기존에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방식보다 이머시브하게 관객을 개입시킵니다"
# 현대 기술이 집약된 무대 구성
▲ 이해니 공연 장면 ⓒ BAKI
< Pan & Opticon >이 펼쳐진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은 블랙박스 시어터다. 공연장의 특성을 십분 살려 가변석을 창작 방향에 맞게 조정할 수 있다. 그래서 안무가는 원형교도소의 콘셉트를 살리기 위해 무대 구성에 집중했다. 무엇보다 기존에 설치된 객석 위치를 뒤틀었다. 출연자는 교도관이 되고, 관객은 죄수가 된다. 내용상 알고 있는 둘의 상관관계가 완전히 역전됐다. 그래서 안무가는 이런 상황을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해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물었다.
동서남북을 오가는 카메라도 부족한지 천장에까지 카메라를 걸었다. 이렇게 사방에서 서라운드로 휘감는 장치는 감시자가 피감시자를 옥죄는데 제격이다. 무대조명은 비네팅으로 처리해 가장자리로 갈수록 어두워진다. 이것은 관객의 시선을 중앙으로 모으는데 큰 역할을 한다.
반응형 렌즈와 사방에 설치된 카메라는 무대 안에서 공연을 집중하게 만든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공연장 밖인 로비에서도 무용수의 동선을 쫓아가는 카메라에 묘한 쾌감을 느낀다. 관객의 시선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사각지대는 눈을 씻고 찾을 수 없다. 또한 단순히 카메라에 노출되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눈동자까지 초점을 맞춘 정교함은 놀라울 따름이다.
#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무너진 이머시브 공연
옥타곤 무대에서 펼쳐진 공연은 시간이 지날수록 무대와 객석의 의미마저 사라지게 한다. 입장할 때 지나친 세 개의 출입문은 이미 객석에 앉는 순간 용도가 바뀌었다. 출입문은 등장과 퇴장을 하는 상수와 하수가 되고, 출입구를 정하지 않고 사방 어디에서나 등퇴장이 자유롭다. 객석과 객석 사이에서 무용수는 관객의 어깨를 스칠 정도로 경계가 무너졌다.
공연이 시작되면 경계의 붕괴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관객을 통제하는 교도관의 쌍안경처럼 손가락을 동그랗게 쥐고 관객들에 집중한다. 무대를 둘러싼 의자를 헤집기도, 앉아있는 관객을 무대에 끌어들여 배우와 함께 동선을 맞추기도 한다. 이미 무대 위에서 여섯 명의 무용수들이 연기를 펼치지만, 예정에 없던 일곱 번째 등장인물에게 미션을 맡기는 모험을 시도한다.
# 알고리즘으로 덫에 빠진 인간의 고민
"핸드폰 없이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현대인은 마음이 편할까"
"기술의 발달이 주체적인 사고를 확장하는데 도움이 될까"
안무가의 질문은 이번 공연에 중요한 메시지가 된다. 단순히 관객 몰입형으로 참여를 독려시키는 차원이 아니다. 편리함과 불편함의 사이를 정신없이 오간다. 인간이 창조한 기술은 오히려 자신의 다리를 붙잡는 덫으로 숨쉴 틈을 주지 않는다. 이제 핸드폰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현실을 반성시키고 싶다.
인간의 조급함을 표현하기 위해 핸드폰 효과음이 적절하게 활용됐다. 출연자의 머리, 어깨, 손목에는 버튼이 있는데, 그들이 한 번씩 누를 때마다 옆 동료는 휘청거린다.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이런 패턴은 기계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반쪽짜리 실상을 폭로한다. 또한 무대에 등장한 관객은 무용수의 버튼을 직접 눌러봄으로써 이보다 완벽한 이머시브 공연이 있을까 되묻는다.
# 미래에 방향을 제시한 컨템포러리 발레는?
무용 분야의 '다양성'에서 저마다의 실험과 시도를 엿본 <아르코 댄스&커넥션>의 피날레는 < Pan & Opticon >이 맡았다. 그런데 이전에 선보였던 현대무용과 다르게 이번에는 발레다.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에서 백조편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발레복과 토슈즈를 신고 공연하는 장면을 상상하지만 발레의 선입견이 무너진다. 아무리 집약된 기술로 무대를 포장해도 안무가가 마지막까지 손을 놓지 않았던 것은 '발레'였다. 여섯 명의 무용수는 전통적인 무대에서 봤던 동작과 다르지 않고, 이것이 컨템포러리 발레라는 외침을 관객에게 외친다. 그만큼 차별화된 발레를 고민해온 이해나 안무가는 오히려 현대 창작발레가 나아갈 방향에 해답을 제시한다.
< Pan & Opticon >은 포스트휴머니즘 시대에 무용의 사회적 역할로서 '차별화된 참여형 컨템포러리 발레'를 고수한다. 이것은 동시대로 넘어와서 '알고리즘으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에 경종을 울린다. 트렌드가 급변하면서 예술가에게 숙제로 떨어진 '예술의 공간적 개념전환'을 고민한 이유는 여전히 고전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창작 발레의 한계 때문이다.
기존에 폐쇄적이고 일방적으로 보여주던 고전 발레는 젊은 관객들을 위해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작품의 서사는 무용수의 동작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객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에 집중했다. 앞으로 발레가 지닌 전형적인 틀을 깨는데 일조하고 싶었던 안무가의 바람대로 멀게만 느껴지는 고급예술이 아니라 일상 가까이 존재하는 예술로서 발레를 감각하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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