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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후 총선에서 낙선 고배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단주 유림평전 28] 1960년 7월 29일 제5대 민의원 선거와 초대 참의원 선거가 동시에 실시되었다

등록|2024.11.12 15:06 수정|2024.11.12 15:06

▲ 4월 혁명 당시 모습. ⓒ 4.19혁명기념회


4.19혁명 후 국민과 정가에서는 이승만의 장기 독재를 대통령중심제의 탓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짙었다. 그래서 내각제 개헌이 이루어졌다. 제4대 국회는 내각제 개헌을 마치고 자진해산 결의로 해산하고, 1960년 7월 29일 제5대 민의원 선거와 초대 참의원 선거가 동시에 실시되었다.

7.29 선거전은 오랫동안 반 이승만 노선을 걸어온 민주당이 중심이 되고, 혁신계는 크게 분열되었다. 사회대중당, 한국사회당,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 중립화 조국통일연합회, 혁신동지총연맹 등이 각기 후보자를 냈다. 유림은 혁신동치총연맹의 공천으로 연고지인 안동을구에서 입후보했으나 이번에도 석패였다.

혁신계의 대동단결을 통해 이 땅의 민주화를 앞당기려는 이들의 시도는 그리 쉽지 않았다. 혁신계의 주류는 사회대중당으로 몰리고, 정화암 등도 사회대중당으로 옮겨갔다.

유림은 장건상·권오순·최천택·박석홍과 더불어 5인 공동대표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혁신동지총연맹을 이끌며 60년의 7.29선거 당시 열고지인 안동을구에 입후보하였다. 동연맹의 공천으로서였다. 상대 경쟁자는 민주당의 박해충, 그러나 50년의 5.30 선거에서와 마찬가지로 유림을 은메달에 그쳐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주석 1)

국가적으로는 독립운동의 원로이고 반독재 투사이지만 지역선거는 조직과 자금이 우세하였다. 혁신계는 사회대중당이 민의원 4명, 참의원 1명을 당선시켰고, 한국사회당은 민의원과 참의원 각 1명씩을 당선시켰을 뿐이다. 혁신세력의 난립으로 유력한 후보들이 대부분 당선되지 못하였다. 여기에 '혁신'이나 '진보'는 이승만 정권과 보수언론에 의해 좌파·용공으로 매도되면서 국민의 의식에는 여전히 투표권 행사에 영향을 주었다.

유림은 선거의 승패에는 크게 마음 쓰지 않았다. 그는 아나키스트이다. 오직 걱정은 나라에서 개혁·진보·혁신세력이 사이비 보수에 밀려 고사당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총선 후 그는 한국독립당, 독립노농당, 한국사회당, 혁신동지총연맹, 사회대중당 등 혁신계열의 5당통합운동에 나섰다.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1960년 9월 10일 <5당통합에 대한 통일방안>을 각 당에 제시하고 언론에도 공개하였다.

5당통일방안

① 목적

국가의 독립과 국민의 자유 평등을 기초로 된 대한민국 건국정신을 제도로써 실천하는 통일국가가 되어야 한다.

② 준비

1. 경제정책 등 각 부문에 응급조치로서 국민생활을 보장하고 불평을 해소하여야 한다.
2. 반 맑스주의인 모든 종류의 자유사회주의 이론을 적극 선전하여 지식층으로 하여금 사설(邪說)에 유혹되지 않게 하고.
3. 자유사회주의 정책을 가능한 한도까지 실시하여야 하고, 피압박 대중으로 하여금 대한 민국을 수호케 하여야 한다.
4. 혁명이론에서 공산주의를 제압할 수 있는 공인된 애국자들의 민중의 참다운 지지로 국회를 주도할 수 있도록 조직해야 한다.

③ 실시

필승에 준비가 완료된 위에 민주대한의 자주계획과 유엔의 우호적 협조로서 인구 비율로 진정한 자유총선거를 실시한다.

파쇼와 나치를 제외하고 진보된 민족주의자와 각종 종교사회주의자를 포함한 모든 비(非) 맑스 사회주의자들은 총집결한 자유사회주의 집단이다.(주석 2)

주석
1> 김재명, 앞의 책.
2> <단주유림 자료집>, 140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단주 유림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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