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가 기도하려 약수 떴다는 곳, 예사롭지 않네
전북 남원 고남산 약수터 창덕암 역사 문화 여행
▲ 남원 고남산 창덕암 ⓒ 이완우
백두대간이 지리산 주능선으로 향하며 운봉고원의 북쪽과 서쪽을 에워싸고 돌면서 커다란 외륜(外輪)을 이룬다. 운봉고원의 외륜이 되는 백두대간 마루금에 고남산(846.5m)이 굳센 기상으로 솟아 있다.
고남산은 고려의 군대가 준동하던 왜구의 기세를 꺾은 황산대첩(1380년) 서막을 연 역사와 설화가 전승되는 장소이다. 이 산의 정상에 이성계 장군이 운봉고원에 웅크리고 있던 왜구 소탕을 기원하며 하늘에 제사를 올렸던 천제단(天祭壇)이 있었다고 한다.
▲ 남원 고남산 아래 부절 마을 앞 갓바위 ⓒ 이완우
고남산 창덕암을 찾아가는 길은 남원 산동면 부절 마을을 지난다. 마을 앞 논 가운데 갓바위(관암 冠岩)이 우뚝 솟아 있다. 이 바위는 높이 7m, 폭 3m에 길이가 8m로 웅장하다.
선사 시대 호족 무덤이나 고인돌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자연석 토르(Tor)로 보인다. 하나의 큰 바위가 수직과 수평 절리가 발달하여 풍화 마모되고 분리된 형상이 뚜렷하다.
토르는 오래된 풍화 작용으로 기반암과 분리되어 탑 모양이나 흔들바위를 형성하기도 한다. 고남산 아래 산동 부절 마을 앞의 큰 바위는 백두대간 고남산에서 내려온 한 마리 큰 호랑이가 요천(蓼川)을 바라보면서 포효하는 듯 기세가 등등하다.
▲ 남원 고남산 아래 부절 마을 앞 갓바위 ⓒ 이완우
이 바위는 조선 시대에는 천대 받았다고 한다. 풍수에 능했다는 문신 이서구(李書九, 1754∼1825)는 두 번에 걸쳐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한번은 이서구가 이곳 갓바위 앞을 지나다가 부채를 펴 자기 얼굴을 가렸다 한다. "저 바위는 천한 기생을 나게 하는 기운이 있어서, 내가 얼굴을 가리는 것이네"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이 지역 사람들은 이 바위를 '비천석(婢賤石)'이라 하며 천시했다는 얘기다.
이서구가 전라도 관찰사 시절에 남원 수지면 홈실 마을 앞 산줄기 높은 봉우리인 호두산(虎頭山, 775m)을 견두산(犬頭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호두산' 때문에 남원 고을에 호환(虎患)이 심하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이후에는 견두산에 들개들이 많아져서 사람을 해치는 등 피해가 많아졌단다. 그래서 이번에는 남원 고을의 광한루, 홈실 마을과 고평 마을에 호석(虎石)을 세워 견두산을 바라보게 하였다고 한다. 결국 애매한 이유로 기상이 출중한 호두산이 들개 수준의 견두산으로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남원은 예로부터 백두대간의 당찬 기상을 내려받은 고을이었다. 조선 시대에 남원부는 역모나 변란과 관련되었다며 세 번(1739~1748년 기간, 1844~1853년 기간, 1869년)이나 현(縣)으로 강등되거나 고을 관장인 남원 부사를 현감으로 낮추었다.
남원부 고을이 현으로 거듭 강등되며 수모를 당하는 시대에 이서구는 전라도 관찰사를 두 번 역임한 바 있다. 그가 풍수적 관점을 내세워 남원 고을의 기상을 억누르려 했다고 추론한다면 이는 지나친 비약인 걸까? 이유는 알 수 없다.
남원 부절 마을 앞의 갓바위는 고남산 아래 호암(虎岩)으로 불러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조선 개국 역사와 설화를 간직한 당차고 성스러운 산 고남산을 향해 앞으로 나아갔다. 고남산 아래 중절 마을은 당산 소나무 숲이 명품이다.
▲ 남원 고남산 아래 중절 마을 당산 소나무 숲 ⓒ 이완우
중절 마을 위쪽 고남산 산자락에 이어진 소나무 숲은 이 마을에 오랜 세월 살고 있는 유서 깊은 문중의 선산이다. 수백 그루의 소나무 숲은 마을 가까이에서 고남산 방향으로 길게 펼쳐져 있다. 소나무들 굽은 줄기가 하늘로 용트림하며 올라가는 형태가 아침 햇살을 받아서 신비롭게까지 보였다.
마을 당산은 당산나무 숲의 성황당에 산신이나 서낭신을 모시는 형태가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 마을에서는 문중의 선산을 당산으로 신성시하고, 조상에게 매년 마을 공동으로 제사를 지내며 마을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고 있다.
▲ 남원 고남산 아래 중절 마을 당산 소나무 숲 ⓒ 이완우
중절 마을의 소나무 숲을 살펴보고, 고남산 산자락 아래를 지나는 대구광주고속도로의 암거 통로(暗渠 通路)를 지났다. 창덕암까지 임도가 잘 닦여 있었다.
창덕암 옆 거대한 바위가 층계를 이룬 수십 길의 폭포는 비가 내린 뒤에는 물소리가 웅장할 듯하다. 가을 단풍이 울긋불긋 물드는 창덕암은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 803~852)이 읆은 칠언절구 한시 산행(山行)의 시상과 풍경 그대로였다.
遠上寒山石徑斜(원상한산석경사)
白雲生處有人家(백운생처유인가)
停車坐愛楓林晩(정거좌애풍림만)
霜葉紅於二月花(상엽홍어이월화)
멀리 늦가을 산 경사진 돌길 오르니
흰 구름 피어나는 골짜기에 암자(인가)가 있네.
수레 멈추고 늦가을 단풍 숲을 완상하니
서리 내린 단풍잎 봄꽃보다 더 붉구나
▲ 남원 고남산 창덕암 폭포 ⓒ 이완우
이곳 창덕암 터에서 이성계 장군이 고남산 정상 천제단에 쓰일 약수를 받아 올렸다고 해서 잘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 가람에서 예로부터 전해오는 약수터다운 뚜렷한 장소는 발견할 수 없어 아쉬웠다.
삼층 석탑과 삼성각 사이에 거대한 바위가 쪼개진 듯 포개져 있는 부근이 예사로운 장소가 아닌 듯 보였다. 이 부근에 고려 말의 그 약수터가 있었을 듯싶었다.
▲ (왼쪽 위) 고남산 창덕암 가는 길, (오른쪽 위) 고남산 창덕암 가을 진달래꽃, (왼쪽 아래) 고남산 창덕암 바위, (오늘쪽 아래) 고남산 창덕암 삼층 석탑, 바위와 삼성각 ⓒ 이완우
창덕암을 둘러보고 내려오면서, 다시 한번 뒤돌아보았다. 창덕암 암자 이름에서 조선 시대 한양의 정궁인 경복궁보다 더 많이 쓰인 궁궐 창덕궁(昌德宮)이 자꾸 연상되었다.
고려 말 이성계 장군이 고남산에서 천제를 올릴 때 소중하게 약수를 떠 갔던 창덕암의 샘터를 복원하고, 천제단에 이르는 산길을 잘 정비해서 역사와 설화를 체험하는 장소로 삼으면 어떨까?
고남산 창덕암에 오르는 길목 부절 마을 앞 갓바위는 조선 창업의 서기가 어린 성산(聖山) 고남산을 지키며 포효하는 호암(虎岩)으로만 보였다. 이 갓바위 너머로, 당당하게 하늘로 솟아오른 백두대간의 고남산 정상이 뚜렷하게 보였다.
▲ 백두대간 고남산 앞의 호암(갓바위) ⓒ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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