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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성별은 내가 결정', 지금 한국 정치에 필요한 발상

법적 성별 자기기입제, 성소수자 전문 공공의료 시스템...성소수자 당원이 직접 만드는 진보정당의 정책

등록|2024.11.11 18:16 수정|2024.11.11 18:40
성소수자 권리의 위기, 그리고 이를 위해 노력했던 독자적 진보정치의 위기 국면에서, 성소수자 권리 보장과 평등한 한국 사회를 위한 진보정치의 역할과 실천들을 다시금 돌아보고자 합니다.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이 있는 11월을 맞아, 독자적 진보정치를 선언한 노동당, 녹색당, 정의당의 진보 3당이 공동으로 오마이뉴스 기고를 진행합니다. 트랜스젠더 권리 보장을 위한 각 당의 정책들과, 성소수자 당사자인 당원들이 가진 삶의 경험을 함께 나누며 트랜스젠더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려 합니다.[기자말]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 행진2023년 녹사평역 인근에서 열린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 행진.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 행진은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11월 20일)을 즈음하여 매년 개최된다. ⓒ 노동당


애인에 대한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려 한다. 스스로 시스젠더 이성애자를 자처하는 사람이지만, 내가 예쁜 옷을 입을 때마다 잘 어울린다고 칭찬한다. 어떨 때는 이런 옷도 입어봤으면 좋겠다고 먼저 추천하기도 한다.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눈썹이 짙고, 어깨가 넓은 '남자친구'에게 하늘하늘한 원피스가 잘 어울린다며 좋아해주는 애인을 만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성소수자의 삶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있는 그대로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다.

돌이켜보면 다른 사람들은 그 동안 나를 '사내자식' 이상으로 봐주지 않았다. 나를 알아줄 것이라는 확신이 없는 사람과는 친해지기 힘들다. 혹여나 주변의 무심한 혐오에 스치듯 상처받을 것이 두려워서다. 커밍아웃한지 꽤 시간이 지났음 에도 부모님은 여전히 나를 '자랑스러운 집안의 장남'이 되길 바란다. 성소수자 가족에게는 흔한 일이다.

관심 있는 이벤트나 행사를 찾아도 여성 전용이니 '주민번호 뒷자리가 2 또는 4 로 시작하는 사람'만 참가할 수 있다는 안내를 볼 때면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다. 단순히 가고 싶은 곳을 못 가게 됐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나와 같은 사람을 배제하려는 의도를, 그리고 소위 '생물학적 여성'만을 받아들이게 된 상황을 계속 곱씹게 된다.

성소수자끼리의 관계도 이런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오래 전에 만나던 사람은 나와 마찬가지로 성별 불쾌감으로 힘들어하던 사람이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지금 생각하면 나나 그 사람이나 서로에게서 '여자다움' '남자다움'을 은근히 바라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 어떤 트랜스젠더라도 자기 성별 그대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세상이다.

여성으로 인정받으려면

트랜지션을 하고, 예쁘게 꾸미면 여성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하지만 트랜지션을 하려니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성별 불쾌감 검사를 할 수 있는 병원도 서울에 가야 찾을 수 있고, 진단에 필요한 비용도 상당하다. 지속적인 호르몬 치료 비용도 부담스럽다. 외성기 수술 비용까지 생각하면 앞날이 캄캄하다.

많은 MTF 트랜스젠더들이 외성기 수술을 위해 태국으로 향한다. 태국이 외성기 수술이 발달한 것도 있지만 국내보다 훨씬 저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저렴하다고는 해도 천만 원 단위니, 큰 마음 먹고 수술을 받으러 가야 한다.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원치 않는 성노동에 뛰어드는 사례도 있다고 한다.

그래도 단순히 트랜지션에 들어가는 비용만 생각하면 감수할 만하다. 문제는 이와는 별개의 문제로 받고 있는 정신과 치료에도 비용이 꽤 나간다는 것이다. 모든 정신질환이 성소수자이기 때문에 안고 사는 것은 아니겠지만, 정상성에서 벗어난 것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에서 '비정상'인 성소수자로 산다는 것은 상당한 스트레스를 감내해야 하는 일이다.

숨기고 아닌 척 해도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밝힌다고 해도 누군가의 불쾌한 반응이 즐거운 일은 아니다.그래서인지 다른 성소수자들을 만나봐도 대부분은 정신과를 다니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노동당-무지개행동 성소수자 인권과제 정책간담회22대 총선 시기에 열린 노동당과 성소수자차별반대무지개행동의 정책간담회 및 정책협약식 ⓒ 노동당


법적 성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트랜스젠더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사회적 여성성을 강화한다'며, 트랜스젠더가 성별 고정관념을 재생산하는 주범인 것처럼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트랜스젠더들도 '여성적'으로 꾸미지 않아도 여성으로 인정받는 것을 원한다.

나 역시도 그렇다. 누군가에게 언니, 누나라고 불리고, 다른 누군가를 언니, 오빠라고 당당하게 부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내 외모와 스타일링이 얼마나 '여성스러운지'는 사소한 문제다.

그렇기에, 지난 총선 노동당의 공약이었던 '법적 성별 자기기입제'가 꼭 필요하다고 느낀다. 외성기 수술을받고, 외모와 체형의 변화까지 보여줘야 트랜스젠더로 인정할 수 있는 생각을 법의 영역에서 지워버리고, 성별과 신체적 특징이 꼭 연관돼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다. 법적으로 인정받는 성별 또한 자기 자신이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는 이성애자 남성이 여성 공간을 침범해 성폭력을 저지를 가능성을 이야기할지도 모르겠다. 분명 더깊은 논의가 필요한 일이겠지만, 여성과 성소수자는 모두 젠더를 기반으로 한 억압으로 인해 고통받는다는사실은 분명하다. 법의 영역에서도 공고한 가부장적 성별 고정관념을 무너뜨리고, 서로의 권리를 강화하기 위해 연대할 때에야 여성과 성소수자 모두가 자유로워진다고 믿는다.

성소수자 건강권 보장, 공공이 책임져야

성소수자를 위한 공공의료서비스 또한 절실하다. 앞서 이야기했듯 트랜지션에는 상당한 비용이 든다. 호르몬 요법을 비롯해 트랜지션을 위한 의료적 조치들은 건강보험 적용이 되지 않고, 대부분의 성소수자가 안고 있는 우울증 등의 정신적 문제를 치료하는 데 추가적인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조치라는 인식 자체가 없을뿐더러, 성소수자들에게 건강보험 혜택을 주는 것이 '세금 낭비'라는 악선전도 팽배하다.

그러나 충분한 의료 서비스도 결국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병은 푹 쉬면 나으니 병원은 필요 없다'라고 이야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트랜지션도 마찬가지 문제라고 생각한다.

또한, 정신건강의 문제는 성소수자만의 이슈는 아닌, 많은 현대인들이 함께 공유하는 문제가 아닌가. 의료체계가 효율성이 아닌, 인간의 존엄한 삶을 목적으로 작동하게 된다면 성소수자들의 삶도, 다른 모두의 삶도 더 나아질 것이다.

노동당 성소수자위원회 정책집담회노동당 성소수자위원회는 노동당의 성소수자 정책을 성소수자, 앨라이 당원들이 함께 논의하는 정책집담회를 여러 차례 진행했다. ⓒ 노동당


진보정당의 존재 의의는 사회적 소수자들의 직접정치

나는 이런 꿈을 함께 꾸는 노동당에 큰 애정을 가지고 있다. 성소수자, 앨라이인 당원들과 함께 토론하고, 그런 토론이 당의 정책에 반영된다. 앞서 언급한 법적 성별 자기기입제, 성소수자 전문 공공의료서비스와 같은 것들도 성소수자 당원들의 의견이 직접 반영된 노동당의 정책이다. 정책 자체도 훌륭하지만, 이것이 단순히 지지율을 위한 것이 아닌 성소수자 당사자가 만들고 제안한 것이라는 점에 자부심을 느낀다.

노동당과 같은 작은 정당에서 활동하기보다는, 큰 정당이 성소수자 인권에 주목하도록 견인하는 것이 낫지 않느냐고 말할 수도 있겠다. 사실 해외에는 보수정당에서도 성소수자 권리를 위한 정책을 내는 사례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진보정당과 거대 양당에는 큰 차이가 있다.

거대 양당이 서민과 약자를 위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당을 움직이고, 당이 대변하는 사람들은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다. 최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차별금지법보다 서민들의 먹고 사는 문제가 우선"이라는 발언이 화제가 되었으나, 정작 그 직후 민생은커녕 명백한 부자 감세인 금융투자소득세 폐지에 합의하지 않았던가. 성소수자의 인권도, 민생도, 본인들의 정치적 기득권 유지 앞에서는 모두 부차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진보정당, 노동당의 당원이다. 모두가 진보정치의 위기를 말하지만, 사회적 소수자들의 직접정치를 구현하고 있는 것이 진보정당이 재기할 수 있는 기반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이 있는 한 우리 사회에 남은 진보정당의 역할도 여전히 남아 있다. 성소수자의 당인 진보정당, 노동당에 더 많은 성소수자들이 함께해 스스로를 위한 정치를 만들어나가길 강력히 권해드린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인 정석운님은 노동당 성소수자위원회의 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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