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꽝" 소리 나더니 도시 쑥대밭... 취재기자들도 넋이 나갔다
[윤찬영의 익산 블루스] 이리역 폭발사고 47주기, 우리에게 남긴 것들
▲ 폭발 사고 현장의 모습 ⓒ 익산시
"꽝! 굉음이 울렸다. 그리고 천지는 암흑에 잠겼다. 뒤이어 꽈과광- 굉음이 연거푸 터졌다. 땅과 하늘이 부르르 떨었다." - 김호경의 소설 <삼남극장>
지금으로부터 꼭 47년 전인 1977년 11월 11일 저녁, 전북 익산에서 일어난 '이리역 폭발 사고'를 그린 소설 속 장면이다. 실제론 어땠을까. 폭발 지점에서 약 600m 떨어진 곳에 있던 나훈 전 <경향신문> 기자는 원자폭탄이 떨어진 줄 알았다고 했다. 폭발의 위력은 그만큼 컸다.
"저 원자폭탄 떨어진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그렇게 굉음이 컸다 이 말이요. 그래서 그 굉음이 나는 그 순간에 '아, 원자폭탄 떨어졌는가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그때 45살 먹은 내 선배 기자는 땅바닥에 앉아서 엉엉 울 정도로 그렇게 충격이 컸어요."
▲ 폭발 사고로 무너진 건물들 ⓒ 익산시
옛 이리역(익산역) 동쪽으로 길게 이어진, 도심에서 가장 번화했던 거리에 서 있던 나지막한 건물들은 모조리 무너져 내렸고, 바닥은 온통 깨진 유리 조각들로 뒤덮였다. 전기가 끊긴 도심은 한순간에 암흑천지로 바뀌었고, 사람들은 불빛 한 점 없던 캄캄한 어둠 속에서 이유도 모른 채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대체 이 엄청난 폭발 사고는 왜 일어났을까.
1977년 11월 11일, 이리역에선 무슨 일이 있었나
사고가 일어나기 이틀 전인 11월 9일 오후 9시 43분, 한국화약주식회사(현 한화)가 만든 다이너마이트 914상자(22t)와 초산암모늄 200상자(5t), 초산암모늄 폭약 100상자(2t), 뇌관 36상자(1t) 등을 실은 화물차가 인천역을 떠났다. 인천의 한국화약적재소에서 실려 온 것들로 최종 목적지는 광주였다. 화물의 운송을 맡은 이는 호송원 신무일 씨였다.
영등포역을 거쳐 다음 날인 10일 오후 10시 31분 옛 이리역에 도착한 열차는 4번 입환대기선(기관차와 연결·분리하려고 화물차나 객차가 대기하는 곳)에 멈춰 섰다. 당시 '폭발물 철도 운송규정 제46조 화약류의 운송'에 따르면, '화약류는 되도록 도착정거장까지 직통하는 열차에 의하여 운송하여야' 했지만 이 화물차는 그러지 않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기관차를 배정하는 직원들이 신씨에게 이른바 '급행료'라는 뒷돈을 요구했다. 하지만 돈이 없던 신씨는 별수 없이 하루가 넘도록 역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
다음 날인 11일 저녁이 되도록 출발을 못 한 신씨는 역 앞 식당으로 나가 술을 마셨다. 그러고는 잠을 자려고 다이너마이트가 실린 화물차로 돌아왔다. 화약을 실은 화차 내부에는 호송원이라고 해도 들어갈 수 없도록 하고 있었지만 잠자리가 마땅치 않았던 그를 막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신씨는 총포화약류 취급면허조차 없었다.
신씨는 가지고 있던 양초에 불을 붙여 상자 위에 세워두고는 침낭으로 들어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얼굴이 화끈해 일어난 그의 눈앞엔 불에 타고 있는 상자들이 들어왔다. 촛불이 쓰러지면서 상자에 불이 옮겨붙었던 것.
▲ 폭발 현장 ⓒ 익산시
당황한 신씨는 침낭으로 불을 꺼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화물칸에서 뛰어나와 "불이야"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를 처음 들은 건 약 55m 떨어진 2호선에 있던 조차수 김하곤씨였다. 그는 곧바로 21m 떨어진 보선사무소의 조역 채희석씨에게 달려갔고, 채씨는 인터폰으로 500m 떨어진 북방의 간수초소에 '불이 난 화차를 격리시키라'고 지시한 뒤 경찰에 신고했다.
신씨가 도망치는 사이 불붙은 화물차로 달려간 이들도 있었다. 김영덕(50), 이경세(42), 공인배(50), 임사견(30), 박재술(26), 최평식(41), 강태호(35) 씨 등 7명의 철도 검수원이었다. 그들은 다이너마이트에 불이 붙은 줄도 모르고 불을 끄려고 화차로 달려갔다가 폭발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철로에서 빠져나와 목숨을 건진 호송원 신씨는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로 역에 잠들어 있다가 나훈 <경향신문> 기자에게 발견되었다. 경찰에 체포된 그는 '중실화 업무상중과실치사상혐의'로 구속된 뒤 이듬해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뒷돈을 요구하며 열차를 역에 묶어둔 철도 직원도 징역 8월을 선고받았다.
한순간 무너진 도시, 그리고 깊은 상처들
▲ 폭발로 무너진 창인동의 모습 ⓒ 익산시
"지축을 뒤흔든 폭음과 함께 삽시간에 초토로 변한 이리시내는 온통 화약냄새로 가득찼으며 12만 명의 이리시민은 한밤을 공포 속에 새웠다. 시가는 온통 깨어진 유리파편과 초연으로 뒤덮여 전장의 폐허를 방불케했다. 사고가 난 역 구내는 육중한 철마가 마치 부서진 성냥갑처럼 쭈그러들어 나자빠져 있었고...(중략) 역 구내와 역대합실에는 미처 치우지 못한 시체가 여기저기 나뒹굴었고 부서진 집 앞에서 가족을 잃고 추위 속에 밤새 통곡하는 유족들의 울부짖음이 처절하기만 했다." - 1977년 11월 12일 자 <경향신문> 기사 " 엄청난 한밤의 날벼락... 순식간에 절반이 폐허로"
이 폭발로 모두 59명이 죽었고, 1402명이 다쳤다. 폭발 지점에는 깊이 15미터, 직경 30미터에 달하는 커다란 웅덩이가 생겼다. 철로에 대기하고 있던 차량 117량이 파괴되거나 쓰러졌고, 파손된 철로는 길이로 따져 1650미터에 달했다. 근처 철로들도 모두 엿가락처럼 휘어졌고, 이리역 주변은 물론 수km 근방까지 이리 시내는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었다.
"취재기자들도 넋이 나갔다. 거리에 나온 이들 대부분이 머리가 깨졌거나 몸에 상처를 입고 있었다. 세 아이처럼 거리에 그냥 눕혀놓은 시체도 적잖았다. 사람들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몰랐다. 그냥 꽝-하는 폭음이 들리더니 건물이건 사람이건 풀썩 뛰어올랐다 내려앉았고 후폭풍이 몰아쳤다. 튼튼한 역 건물이 거의 날아갈 정도로 센 폭발이었으니 주변 집들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역 반경 500m 이내 건물은 거의 다 부서졌다." - 민병욱 당시 <동아일보> 기자가 쓴 '옛날 신문 - 그 시절 그 이야기'
역 주변 모현동과 창인동(철인동) 일대는 쑥대밭이 되었다. 창인동은 전체 가구의 43.4%에 달하는 744가구, 3385명이 집을 잃었다. 모현동에선 60가구가 완전히 무너졌고, 전체 2216가구의 22.5%인 499가구 2448명이 이재민 신세가 되었다. 이리시 전체로는 1674가구 7873명이 갈 곳을 잃었다.
▲ 폭발 사고가 일어나기 전 창인동 풍경. 다닥다닥 붙어있는 지붕들이 보인다 ⓒ 익산시
철인동은 '철도 옆 창인동'을 가리키는데, 이곳엔 한국전쟁 피난민들과 빈민들이 몰려들면서 주민이 늘었고, 성매매 여성과 거리의 부랑아들도 스며들었다. 하필 이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또 이날 역 건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삼남극장'에선 약 600명이 모인 가운데 당시 인기 절정이던 가수 하춘화씨의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 극장 지붕으로 커다란 기차 바퀴가 날아드는 바람에 무대 위 슬레이트 지붕이 내려앉았고 7명이 목숨을 잃었다.
하씨는 분장실에 있다가 무너지는 천장이 어깨로 떨어져 의식을 잃고 쓰러졌는데, 무명 사회자였던 이주일씨가 하씨를 들쳐메고 극장을 빠져나왔다고 한다. 지금 삼남극장 자리에는 수요양병원(익산시 중앙로1길23)이 들어섰다.
사고로 달라진 도시 풍경들, 그리고 47주기
▲ 사고 현장을 찾은 박정희 전 대통령 ⓒ 익산시
사고가 일어난 뒤 박정희 정권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호남 민심이 돌아서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야 했고, 위기를 기회로 돌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터. 정부는 사고 직후 중앙재해대책본부를 꾸리고 창인동과 모현동 그리고 소라산 아래에 급하게 천막촌을 조성하고 이재민을 머물게 했다. 사고 한 달 뒤인 12월 9일, 박 대통령은 소라산 천막촌을 찾았다.
이 사고는 익산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사고가 일어난 지 일주일만인 11월 19일 정부는 '새이리 건설 계획'을 발표한다. 이리시 시설 복구에 109억 1100만 원, 이리역 주변 정화 사업에 20억 8900만 원을 투입하기로 했고, 그 밖에도 제2공단 건설과 재개발지구 개발사업 등을 추진하기로 했다.
이들 계획에 시민의 폭넓은 요구가 담기진 못했다는 평가도 있고, 2년 뒤 박정희 대통령이 죽고 유신정권이 무너지는 바람에 모든 계획이 실행에 옮겨지지도 못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부터 별다른 변화가 없던 이리역 주변 풍경이 사고가 일어난 뒤 크게 바뀐 것만은 틀림없다.
사고가 난 지 1년이 지난 1978년 11월 10일, 역사가 있던 자리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새 역사가 들어섰고, 그 앞으로 4차선 도로(중앙로)가 새로 났다. 역에서부터 원광대학교 방향으로 이어진 길(익산대로)도 더 멀리까지 뻗어나가게 됐다. 폭발로 무너졌던 중앙동엔 현대식 상가들이 들어서면서 오늘날의 모습에 가까워졌다.
모현동에는 사고가 난 지 200일 만인 다음 해 7월, 26개 동 1180가구가 살 수 있는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이 아파트단지는 2010년 재건축되어 모현동 신도시로 또 한 번 거듭나게 된다.
▲ 새롭게 난 중앙로의 모습 ⓒ 익산시
1995년 이리시가 익산군과 합쳐지면서 '이리'라는 이름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역명도 '익산역'으로 바뀌었다. 2015년 4월엔 고속열차(KTX) 호남선이 개통하면서 같은 해 9월 역사는 다시 한번 커졌다.
사고가 일어난 지 어느덧 47년이란 긴 시간이 흘렀다. 도시는 이 사건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신귀백 익산근대문화연구소 소장은 "안전이라는 테제를 이 도시의 자산으로 가져오지 못한 게 안타깝다"고 했다.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 등을 거치면서 안전이라는 화두가 우리 사회의 중요한 테제로 자리 잡았다. '4.3 사건'을 겪은 제주가 오래 세월 동안 시민사회와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또 최근 한강 작가의 작품으로 '평화의 섬, 제주'로 거듭났다. 우리도 '이리역 화약열차 폭발 사고'라는 가슴 아픈 사건을 계기로 안전이라는 화두를 도시의 상징으로 삼아보려는 시도를 해보는 건 어떨까 생각한다. 오래된 일이라고, 또 좋지 않은 이미지를 준다고 감추려고만 할 게 아니라 오히려 이걸 자산으로 삼을 수 있는 지혜를 발휘했으면 한다."
▲ 익산역 뒤로 해가 지고 있다. ⓒ 서태멘
도시 전체가 이토록 강렬한 경험을 공유하는 일은 흔치 않다. '이리역 폭발 사고'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을 뿐 아니라 도시 곳곳에도 그 흔적이 깊이 새겨져 있다. 그러니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또 애써 지우려 한다고 해서 쉽게 지울 수 있는 건 아니다. 비록 그것이 가슴 아픈 기억일지라도, 도시가 품은 이야기는 도시와 함께 오래도록 이어지는 게 옳지 않을까. 아직 어딘가에 미처 꺼내지 못한 이야기가 남아있진 않은 지, 다시금 짚어봐야 할 의미가 있는 건 아닌지도 돌아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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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학 시민교재 – 익산, 도시와 사람>, 익산시, 2019.6.20.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 41주년 이리역 폭발사고 시민백서>, 익산시, 201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