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게임에 들어간 '완경' 단어를 두고 일부 누리꾼들이 "페미니즘 표현"이라며 불매운동까지 벌이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전문가들은 해당 단어에 문제가 없을 뿐만 아니라 누리꾼들의 행위를 "부끄러운 일"이라고 지적했고, 보드게임 회사 또한 "표현을 거두지 않는 것이 세상 모든 여성에 대한 예의"라고 밝혔다.

국내 최대 보드게임 제작유통사 '코리아보드게임즈'는 지난 4일 홈페이지를 통해 '메디컬 미스터리: 뉴욕 응급실'이라는 제품의 출시를 알렸다. 코리아보드게임즈는 상품 상세 페이지에 제품 일부 사진도 공개했는데, 한 사진에 "환자는 완경기가 지난 53세 폴리네시아계 여성"이라는 문구가 담겼다.

완경은 폐경과 함께 여성의 월경 종료를 뜻하는 단어로 쓰인다. '완(完)'이라는 글자에 담겨 있는 긍정적 의미 때문에 최근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보이콧 로고 만들고, 대표 이력 사상검증까지

그런데 이 보드게임이 공개된 후 온라인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에 "코보게(코리아보드게임즈) 안에도 페미가 있는 것이냐"는 게시글이 올라왔다. 디시인사이드뿐만 아니라 각종 보드게임 커뮤니티에서도 "페미니즘 관련 단어를 사용했다", "꼴페미" 등의 원색적인 비난과 "사과와 용어 수정을 약속하라"는 주장이 이어졌다.

특히 보드게임 커뮤니티 중 하나인 '보드라이프' 등에서는 "불매에 동참한다"는 인증 글이 연달아 올라왔다. 또 코리아보드게임즈 대표의 실명과 과거 이력을 기재한 게시글과 함께 "알고 보니 기업의 대표가 그쪽 정치사상을 가졌다"라는 '사상검증식' 댓글이 이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집단행동에 다른 누리꾼들은 "20년간 아무 이상 없이 잘 운영된 회사의 사장을 갑자기 사상 검증하냐", "게임은 게임일 뿐", "규정에 어긋나는 댓글들이 너무 많다. 욕설, 비꼼, 저격이 난무하네" 등의 비판 글을 남기기도 했다.


김민문정 한국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는 완경이란 단어를 빌미로 불매운동 등을 벌인 누리꾼들을 두고 "몰상식한 행위이며 부끄러운 일"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완경이라는 단어는 중년 여성들이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경험을 긍정할 수 있도록 표현하자는 취지에서 나온 단어"라며 "(비난을 보내는 누리꾼들은) 그런 용어의 의미에 대한 인식이 안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지난해 집게손가락만 나오면 화들짝 놀라서 삭제하고 사과하는 사건들이 있었다. 이는 말도 안 되는 주장과 사실에 대한 왜곡, 개인에 대한 인권 침해 행위 등에 기업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굴복한 것"이라며 "무분별한 불매 등 비상식적 행동을 해도 된다는 잘못된 사회적 메시지를 준 게 문제다. 타인에 대한 존중과 성찰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다르거나 마음에 안 들면 낙인찍고 혐오하고 개인의 권리를 침해해도 된다는 생각으로까지 간 것 같다"고 지적했다.

황인아 산부인과 전문의는 지난해 6월 유튜브 채널에 '완경이라는 좋은 말을 두고 왜 폐경이라는 말을 쓰세요?'라는 제목의 영상에서 폐경·완경 용어 사용에 대한 생각을 전하기도 했다.

그는 "제가 폐경이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는 의학적인 용어이기 때문이고, 의사로서는 그렇게 쓰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라면서도 "(하지만) 완경이라는 단어를 쓰는 분들과 의사소통하기 위해서는 완경이라는 단어를 가끔 사용할 수 있다. 진료를 보러 오시는 환자분들은 완경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하는데, 제가 '그게 뭐냐. 아니다. 폐경이라고 얘기하셔야 된다'라고 말할 필요는 없잖나"라고 설명했다.

이어 "폐경이라는 단어는 충분히 중립적인 단어라고 저는 생각하고, 완경이라는 단어도 의사소통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괜찮다고 생각한다"라고 덧붙였다.

코리아보드게임즈 "어머니와 여성에 대한 예의"

코리아보드게임즈는 12일 오후 7시께 홈페이지에 올린 입장문을 통해 "보드게임을 즐기는 우리들도 모두 각자의 어머니가 있었기에 세상에 태어난 존재"라며 "저희는 완경이라는 표현을 거두지 않는 것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와 여성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코리아보드게임즈는 "충분한 검토가 부족한 채로 완경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단어를 수정하지 않기로 최종 결정했다"라며 "고객의 의견 중에는 이 단어가 엄밀한 의학적 용어가 아니라는 지적도 있었다. (하지만) 언어는 시대에 따라서 바뀌고 의학 용어조차도 그렇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의학의 최대 목적은 사람을 건강하게, 아프지 않게 하는 것"이라며 "폐경을 겪은 당사자들은 상실감이나 좌절감 등 다양한 부정적인 감정을 겪는다고 하는데, 완경이라는 표현은 삶의 단계 하나를 완료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에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는다는 느낌이라고 한다. 단어 하나를 대체하는 것으로 그들에게 긍정적인 기분을 들게 해준다면 써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