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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나무가 환히 밝혔던 공간, 그 이유를 알았다

중요 역할 했던 곳... 전북 남원 만행산 연화봉 승련사 역사 문화 탐방

등록|2024.11.13 14:09 수정|2024.11.13 14:10

▲ 남원 만행산 연화봉 승련사 ⓒ 이완우


남원 만행산에서 섬진강 상류인 요천을 바라보는 산자락 연화봉(527.9m) 아래에 승련사(勝蓮寺)가 있다. 11월 중순, 만행산 단풍이 연화봉을 거쳐 승련사 사찰로 내려오는 늦가을 계절에, 유서 깊은 승련사를 찾아갔다.

고려 시대부터 수백 년 세월 동안 연화봉 아래의 유서 깊은 승련사가 있었다. 조선 시대 어느 때에 이 사찰은 폐허가 되어 가람(승려가 살면서 불도를 닦는 곳) 터마저 잊혀졌다.

폐허에서 재건된 사연

이 폐허 된 가람 터에 새로운 승련사가 수백 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사실상 창건에 가깝게 40년 전에 중창되었다. 그리고 승련사의 도량 숲속에는 마애(磨崖) 범어(梵語, 산스크리트어) 글자와 신비한 원형 무늬가 새겨져 있다고 알려졌다.

▲ 남원 승련사 육자진언 수막새 야적 모습 (현대 건축 기와 재료) ⓒ 이완우


승련사 입구 사찰 안내판 옆에 이 사찰 지붕에 기와로 얹고 남은 듯 수막새 십여 개가 쌓여 있었다. 이 수막새의 도안이 범어 옴(ॐ) 자였다. 승련사 삼성각 옆 가까운 숲속에 여러 개 바위가 줄지어 있는 기차 바위(식련마을 바위)를 찾았다.

서너 개의 큼지막한 이들 바위에 범어로 새겨졌다는 세로 글씨와 원형 무늬 도상(圖像)이 희미하게 보였다. 풍화가 오랜 세월 진행되어서인지, 바위 표면이 많이 마멸되어 글씨와 원형 무늬 도상이 선명하지는 않았다.

▲ 남원 승련사 육자진언과 불정심인 도상 바위 ⓒ 이완우


승련사 요사채에 가자, 주지 일공(一空) 스님이 반갑게 맞아주고 향기로운 차(茶)를 내어 놓았다.

스님은 이 바위에 쓰인 글씨와 원형 무늬 도상이 ''ॐ मणि पद्मे हूँ'(범어, 옴마니파드메훔) 육자진언(六字眞言) 각자(刻字)와 불정심인(佛頂心印) 도상 3개라고 하였다.

▲ 남원 승련사 육자진언과 불정심인 도상 바위 ⓒ 이완우


스님은 육자진언과 불정심인의 탁본, 여러 자료와 관련 책자를 보여주었다. 선명한 탁본과 자료 사진을 보니 육자진언 글씨와 불정심인 도상이 분명해 보였다.

불정심인 도상은 금강삼매수행도(金剛三昧修行圖)이다. 일공 스님은 승련사의 불정심인 도상은 다섯 겹의 원형 무늬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스님은 이것은 최고의 지혜를 깨달아가는 다섯 가지의 수행 단계의 과정을 의미한다고 설명하였다.

'옴마니파드메훔' 육자진언은 불교의 천수경에 나오는 관세음보살의 진언이다. 육자진언 '옴마니파드메훔'은 "마니주(자비)를 품고 연꽃(지혜) 위에 태어난다"는 의미라고 한다. 티베트인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많이 암송한다고 알려진 진언이다.

티베트 불교가 13세기에 몽골에 전해졌고, 고려 시대 후기에 밀교 계통의 육자진언 암송과 금강삼매수행법(金剛三昧修行法)이 성행하였다. 고려에서 밀교는 상당한 교세를 확립하여 왕실이 귀의하기 했고, 백성은 신앙적 의지처로 삼았다.

▲ 남원 승련사 육자진언과 불정심인 사진 자료. [남원 승련사 마애 불정심인과 육자진언 각자](2023. 남원시] ⓒ 이완우


한편, 승련사는 14세기 중엽 이전에는 금강사(金剛寺)였다. 고려의 대학자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은 <승련사기(勝蓮寺記)>에서 금강사가 승련사로 바뀌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시기에 <선문염송설화(禪門拈頌說話)>를 저술한 각운 선사가 이곳 사찰에 주석하였다고 한다. 즉 승련사는 불교 선종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도량(사찰)이었다.

금강사(金剛寺)는 사찰 이름부터 밀교의 대승불교 도량으로 출발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금강은 금강석으로 다이아몬드이다. 다이아몬드는 가장 뛰어난 보석이며 가장 단단하다. 그래서 금강은, 모든 번뇌를 깨트릴 수 있는 지혜인 반야를 상징한다

승련사의 '옴마니파드메훔' 육자진언은 금강삼매수행의 청각적인 만트라이고, 3개는 불정심인 또는 유가심인(瑜伽心印)은 시각적인 만다라로 볼 수 있겠다. 유가심인의 '유가(瑜伽)'는 범어 어원의 요가(Yoga)를 한자로 가차한 표기이다.

고려 말 충신들 한시 문집에도 등장하던 곳

▲ 남원 승련사 육자진언과 불정심인 사진 자료. [남원 승련사 마애 불정심인과 육자진언 각자](2023. 남원시] ⓒ 이완우


고려 말 충신인 목은(牧隱) 이색, 포은(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와 더불어 친교가 깊었던 도은(陶隱) 이숭인(1347~1392)은 그의 문집 <도은집>에 이곳 승련사를 칠언절구 한시로 읊었다.

金剛僧舍在城東 (금강승사재성동)
一樹山茶滿院紅 (일수산다만원홍)
何一更爲花下客 (하일갱위화하객)
醉看香霧灑空濛 (취간향무쇄공몽)

남원성 동쪽의 금강승사(승련사)는
동백꽃 한 그루 꽃 온 가람 환하게 밝구나.
언제 다시 동백꽃 한 그루 아래 길손이 되어 취해 볼까?
동백꽃 향기 안개처럼 허공에 뿌려진 이슬비를.

'산다(山茶)'는 차나뭇과의 동백나무이다. 고려 말 승련사에는 커다란 동백나무 한 그루가 있어서 그 나무의 수많은 붉은 꽃이 온 가람을 환하고 밝게 물들였다고 한다.

이 동백나무와 동백꽃은 금강삼매수행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은 아닐까? 아마도 승련사가 금강삼매수행의 중심 도량이었음을 비유하는 듯하다.

승련사의 마애 육자진언 각자와 불정심인 도상이 조선 시대 초기에 새겨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에 이곳 승련사는 억불숭유의 탄압 속에서도 진정한 수행자의 목표를 바위에 보란 듯이 튼실하게 새겼다.

다시 말하면, 승련사는 참선 수행을 주도하며 조선 불교의 명맥을 잇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승련사는 어느 시기부터 퇴락하여 폐사지가 되었다. 이 사찰에 모셔졌던 대장경과 삼존불상은 진안 마이산 금당사로 옮겨져 봉안되었음이 밝혀졌다.

▲ 남원 만행산 연화봉 승련사 금당 ⓒ 이완우


승련사가 다시 가람의 면모를 갖춘 것은 40여 년 전부터이다. 경훤(敬昍, 1946~) 스님이 발원하여, 승련사를 창건하듯이 다시 일으켜 세웠다고 한다. 현재는 비구니 스님의 선수행(禪修行) 도량으로서 내실 있는 면모를 갖추었고, 경훤 스님의 제자인 일공(一空) 스님이 큰 뜻을 이어가고 있다.

경훤 스님이 폐사지인 이곳에서 새로운 가람을 세울 때, 바위에 새겨진 글씨와 도상들을 보고 처음에는 무속의 부적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오대산 적멸보궁 뒤에도 이러한 도상이 있어서 알아보고, 밀교의 도상임을 확인했다고.

이 사찰 바위의 육자진언 각자와 불정심인 도상을 살펴본 일부 문화재 전문가들은 '이곳 승련사에 있는 마애 불정심인 금강삼매수행도는 여느 절에서 찾아보기 힘든 희귀한 수행도이다. 특히 이곳 승련사의 마애 육자진언 '옴마니파드메홈' 각자가 새겨져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란 취지로 말했다고 한다.

경훤 스님의 제자 일공 스님이 말했다.

'스승님은 현재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토굴에서 참선 수행에 정진하고 계시지요. 이곳 승련사의 금강삼매수행도는 국내에서 독보적이에요. 마애 불정심인(유가심인) 도상인 금강삼매수행도가 국내에 몇 사찰에 있지만, 육자진언(옴마니파드메훔) 각자와 함께 있는 곳은 여기 승련사가 유일해요.'

승련사에서 산길을 내려오며 가람 뒤편에 부드럽게 솟은 연화봉을 바라보았다. 연화봉 아래 승련사, 커다란 연꽃 속의 별천지를 방문하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연꽃은 반야의 지혜와 깨달음의 경지를 함축하는 친숙한 상징이다.

승련사의 마애 육자진언 각자와 불정심인 도상이, 차후 국가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잘 보존되기를 바란다. 동백나무 한 그루의 수많은 동백꽃이 승련사 가람을 다시 환하게 밝힐 것이다.

▲ (왼쪽 위) 남원 승련사 안내판 내용, (오른쪽 위) 승련사 육자진언과 불심정인 바위 현장, (왼쪽 아래) 승련사 대웅전 앞 차나무 꽃, (오른쪽 아래) 승련사 대웅전 앞 작은 명자나무 꽃 ⓒ 이완우


덧붙이는 글 위 기사를 쓰며 '남원 승련사 마애 불정심인과 육자진언 각자'(2023. 남원시) 도지정문화재 등의 지정 요청 자료보고서를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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