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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말 백화점에 진열된 북한 물건의 정체

[커피로 맛보는 역사, 역사로 배우는 커피] 1980년대 말의 커피문화

등록|2024.11.17 17:37 수정|2024.11.17 17:37
흔들리는 세계 질서와 밀려오는 외국 문물들이 '우물 안 개구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들던 시절이 있었다. 1980년대 말이다. 세계 역사, 한국 역사, 그리고, 우리나라 커피 역사에서도 큰 소용돌이가 치던 시절이었다.

국내적으로는 1988년 2월 25일 노태우가 제13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고, 이해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열린 제24회 하계올림픽이 모든 사람의 관심과 언론을 점령했다. 올림픽 이외에는 없는 시절처럼 여겨졌다. 한 신문의 표현대로 올림픽에 모든 사회 동력과 정책적 수단이 동원되면서 시민들은 "만신창이 민생치안"(경향신문 1988년 12월 12일 자)이 주는 불안감을 안고 살아야 했다.

신문 사회면은 올림픽 소식 아니면 "소녀에서 주부까지 대낮 납치 공포" "인신매매 극성" "음란 폭력 비디오 극성" "떼강도가 설친다." "퇴폐이발소 26곳 두 달간 영업정지" "퇴폐 변태영업 극성" 등 혐오 가득한 뉴스로 가득하였다. 우물 안에 던져진 새로운 문물들이 주는 향락 앞에 개구리들이 시끄러웠다.

올림픽 열기가 식어가던 11월 2일부터 국회에 설치된 '5공비리특별위원회'와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에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청문회를 개최하였다. 5공화국의 상징 인물 전두환은 11월 23일 골목길 담화로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한 후 백담사로 떠났다. 이듬해까지 이어진 국회 청문회 활동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친인척과 측근 등 47명을 구속하는 성과를 남기고 1989년 12월 31일 종결되었다.

한반도 밖에서는 1988년 새해의 시작과 함께 소비에트 연방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공산당 서기장의 주도 아래 페레스트로이카라는 이름의 개혁, 개방이 시작되었고, 이는 1989년 11월 9일의 베를린 장벽 붕괴, 그리고 1991년 12월 26일의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로 이어졌다. 1989년 6월에는 중국에서 민주화운동을 폭력으로 억압한 천안문사태가 발생해서 문명 세계를 놀라게 했다.

새로운 커피의 등장

▲ <한겨레> 1989년 12월 1일 자 기사 '원두커피 소비 크게 늘고 있다'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우리나라 역사에서 흥미로운 커피 뉴스가 가장 적었던 해의 하나는 1988년이었다. 올림픽 뉴스의 과다, 국산 차 애용 운동의 여파였다. 대학가에 새로 등장하기 시작한 '공부다방'과 '유니토랑' 정도가 새로운 소식이었다. 공부다방은 요즘의 스터디카페였고, 유니토랑은 대학가 주변에 새로 등장하여 원두커피를 파는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프랑스의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87년 역사를 자랑하던 명소 '푸케 카페'가 폐업 위기를 맞자, 단골손님들이 보존 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생뚱맞은 소식이 눈에 띌 정도였다.(경향신문 1988년 7월 23일 자)

올림픽 열기와 5공 청문회 등으로 언론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지만, 커피의 세계에서는 1980년대 말 매우 큰 변화가 시작되었다. 이것을 상징하는 농담이 당시 미국 한인 사회에 널리 퍼져 있었다. "시민권자는 커피를 블랙으로 마시고, 영주권자는 설탕 또는 밀크 한 가지를 타고, 불법체류자는 둘 다 믹스된 커피를 마신다"는 얘기였다. 이민자들이 미국에 적응해 가는 과정을 커피에 비유한 것이다. 커피 소비 패턴의 변화를 보여주는 농담이었다.

비슷한 흐름이 우리나라 커피 소비시장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한 세대 이상 유행하던 인스턴트커피의 유행이 조금씩 약해지면서 원두커피 소비가 크게 늘기 시작한 것이 이즈음이었다. 서울올림픽 직전인 1988년 5월에 창간된 일간지 <한겨레> 1989년 12월 1일 자는 '원두커피 소비 크게 늘고 있다'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당시 커피 시장이 다양해지면서, 원두커피에 대한 일반 소비자들의 높아진 관심사를 소개하였다.

각 백화점들이 원두커피와 원두커피 조리기를 판매하는 특설코너를 마련하고 있었고, 각 커피 회사들은 원두커피 생산량을 늘려가는 추세였다. 당시 판매되고 있던 국산 원두커피로는 MJC, 자뎅 등이 인기가 있었고, 수입 원두커피는 프랑스 알베르커피, 미국 핀리커피, 스위스 네슬레커피 등이 비싸지만 잘 팔리고 있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커피 맛은 크게 단맛, 신맛, 쓴맛, 떫은맛으로 구분되는데 신맛이 많이 나는 것은 모카, 콜롬비아, 과테말라, 코스타리카, 하와이코나, 멕시코, 킬리만자로 등이며, 쓴 맛은 로부스타, 단맛은 콜롬비아, 모카, 블루마운틴 등으로 소개되었다. 이 중에서 자마이카(자메이카) 블루마운틴은 중성의 맛을 내는데 생산량이 적어 값이 너무 비싼 것이 흠으로 지적되었다.

원두커피와 함께 커피 조리기도 다양하게 소개되고 있었다. 가장 간단하게 여과지를 이용한 방법, 알코올로 끓이는 기구, 필터를 누르는 기구 등이었다. 당시 시장의 90% 이상을 점유하고 있던 동서식품의 한 직원은 "앞으로 10년 안에 원두커피 수요가 인스턴트커피 수요를 앞지르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MJC의 기획과장은 "소비자들의 기호가 질 위주의 제품 선호로 나아가고 있는 만큼 원두커피 개발에 힘쓸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들의 전망이나 계획은 이후 우리나라 커피 시장의 미래를 정확하게 보여주었다. 정확하게 10년 후인 1999년에 원두커피 소비의 촉매제가 된 스타벅스 1호점이 이화여대 앞에 문을 열었다.

이런 시대적 흐름을 반영하며 새로운 커피들이 등장하였다. 1989년 8월 1일 신문 광고를 통해 등장한 '아메리칸 미네랄커피'도 그중 하나였다. ㈜배문교역이 "새로운 커피문화가 시작된다"라는 광고 문구를 내걸고, "미국에서 최고급 커피로 알려진" 구르메 커피 3종과 레귤러 커피 2종을 수입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아쉽게도 이 커피는 소비자들의 호응을 얻지 못한 채 사라졌다.

두산그룹은 세계 최대의 커피 기업인 스위스네슬레와 합작으로 한국네슬레를 설립했다. 그리고 인스턴트커피와 원두커피, 그리고 커피 크리머를 생산, 시판하기 시작한 것이 1989년 12월 7일이었다. 한국네슬레는 '커피의 새로운 세계 네스카페'라는 광고를 통해 동서식품의 아성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한국네슬레의 카네이션 커피메이트는 동서식품의 프리마와 경쟁하였다. 이후 동서식품과 한국네슬레는 한동안 국내의 커피와 커피 크리머 시장을 놓고 대결하는 양대 라이벌이 되었다.

국내 커피 소비의 확대에 따라 커피 생산 국가인 콜롬비아의 국립커피생산자연합회도 신문 광고를 통해 자국 커피의 우수성을 직접 알리기 시작하였다. 국가 차원에서 커피 광고를 시작한 첫 사례였다. 1959년에 등장한 가공의 캐릭터, 노새와 함께 서 있는 커피 농부 후안 발데스 사진과 함께 "가장 부드럽고 맛과 향이 뛰어난 최고급 커피"라는 광고 문구는 많은 커피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마일드커피의 등장이었다.

북한산 커피잔도 백화점에서 판매돼

▲ 1989년 5월, 현대백화점은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효도.보은선물 행사의 일환으로 분단 이후 최초로 북한산 2중 투각백자 커피잔세트를 북한상품 특설매장에서 일반인에게 판매했다. ⓒ 연합뉴스


원두커피 소비의 증가와 함께 커피 마시는 방식에서도 변화가 시작되었다. 고급 원두를 이용하여 드립커피를 제공하는 새로운 형태의 카페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박상홍, 박원준, 서정달, 박이추 등 우리나라 1세대 바리스타들이 등장한 것이 1980년대 말이었다. 오사카에서 커피를 공부한 박상홍은 드립커피의 장인이었고, 도쿄에서 커피를 배운 박원준은 구로동과 신촌에서 드립커피 전문점 다도원을 열었다.

서정달은 신촌에서 융드립 전문가로 명성을 얻었다. 1948년 일본 출생인 박이추가 귀국하여 혜화동에 가배 보헤미안을 창업한 것이 1988년이었다. 2004년에 강릉 사천으로 옮기기까지 16년 동안 보헤미안을 중심으로 새로운 커피 문화를 확산시키는 동시에 많은 커피인을 배출함으로써 우리나라 커피 제2의 물결을 선도하였다.

1980년대 말에 갑자기 등장한 냉전의 종식과 커피 열풍은 북한산 커피잔 세트가 시내 백화점 매장에 등장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이어졌다. 냉전의 붕괴라는 흐름 속에 노태우 대통령은 1988년 7월 7일 '민족 자존과 통일 번영을 이한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하였다. 6개 항 중의 하나가 "남북한 교역의 문호를 개방하고 남북한 교역을 민족 내부 교역으로 간주한다"였고, 이에 따라 북한의 물품이 공시적으로 수입, 판매되기 시작하였다.

1989년 1월에 북한 물품의 반입이 승인되고, 3월에 부산항에 들어온 북한 물품이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매대에 등장한 것이 이해 5월 6일이었다. 당시 판매를 시작한 북한 물품 중에는 커피세트가 포함되어 있었다. 커피를 많이 마시지 않던 북한에서 남쪽 시장 동양을 파악하고 커피세트를 제작하여 교역 물품에 포함시킨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었다.

주부들이 새로 생긴 신상 카페를 점령하는 문화가 언론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었다(동아일보 1988년 12월 27일 자).

1980년대 말에 시작된 우리나라 커피 소비문화의 변화는 지속성을 지닌 채 40년을 달려왔다. 커피 소비 순위에서는 세계 15위권 국가, 카페 분위기와 커피 맛에 있어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에 시작된 남북 교역은 부침을 반복한 끝에 최소한의 명맥조차 끊긴 암울한 시대를 살고 있다. 지혜롭지 못한 민족에게 역사는 진전은커녕 반복의 모습도 보여주지 않는다.

('커피가 묻고 역사가 답하다'의 저자, 교육학교수)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이길상(2021). 커피세계사+한국가배사. 푸른역사.
이길상(2023). 커피가 묻고 역사가 답하다. 역사비평사.
동아일보, 조선일보, 매일경제, 경향신문, 한겨레 1988년과 1989년 기사 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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