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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 최시형 동학 2세 교주 되다

[동학대서사시, 모두가 하늘이었다 14] 수운 최제우 선생 탄신 200주년, 동학농민혁명 130주년, 동학과 백성을 위해 목숨을 걸다

등록|2024.11.14 13:13 수정|2024.11.17 10:20

도통전수1863년 8월 14일 달밤 삼경에 수운 최제우 대신사로부터 해월신사 최시형은 동학의 2세 교주 자리를 정식으로 물려받았다. 이후 해월 선생은 오직 수운 선생의 명교를 실천하고 새로운 개벽 세상을 열기 위해 온갖 고난을 견뎌낸다. 해월 선생이 수운 선생으로부터 도통을 전수받는 모습을 박홍규 화백이 그림으로 재현했다. ⓒ 박홍규


해월 최시형에게 도통을 전수하다

그날이었다. 북도중주인 해월 선생은 스승인 수운 선생을 뵙고 가르침을 받으러 1863년 8월 13일(음) 추석을 이틀 앞두고 용담으로 찾아간다. 이날 가을 하늘은 유난히 밝았고, 들녘은 오곡이 익어가는 황금빛으로 변해가며 물결치고 있었다. 늘 그렇지만 해월 선생은 스승을 뵈러 갈 때마다 가슴이 설레었다. 오늘따라 더욱 스승에 대한 그리움이 복받쳐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뭉클한 기분마저 들었다.

추석 명절을 스승님과 함께 지내려는 간절한 심정으로 등에 짊어진 보따리마저 가벼워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아침 일찍 검등골을 출발한 해월은 70리가 넘는 길을 단숨에 달려와서, 정오가 조금 지나 마룡동의 용담에 도착한다.

해월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람의 대접을 받은 것은 수운 스승님으로부터였다.
자신을 온전히 인정해 주는 스승님은 바다의 눈물이요 달처럼 환한 기쁨이었다.
해월은 가난한 노동자로서 배운 것도 변변치 못하였고 가진 것은 더욱더 없었다.
다만 성실하고 착하게 살면서 스승님을 뵙는 것이 전부이다.
너도 하늘이다! 이 말씀을 듣고 해월은 하늘꽃으로 피어났다.
수운 스승님과 함께하면 그 자체로 지상 신선이었다.
아! 무엇을 더 바라고 원할까.
그렇다, 수운 스승의 가르침은 우주를 품은 하늘 같은 가슴이요 한결같이 늘 푸른 소나무였다.

수운 선생은 기다렸다는 반가운 표정을 애써 감추며, "명절 때문에 바쁘실 건데 이렇게 왔는가?"하면서, 해월이 뜻밖에 찾아온 것처럼 맞이한다. 해월 선생은, "스승님께서 외로이 추석 명절을 보내실 것 같아 제가 모시고 같이 지내고 싶어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수운 선생과 해월은 여러 도중(道中)의 일을 의논하며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눈다.

해월 선생은 다음날 14일 온종일 허드렛일을 했다. 간간이 스승과 함께 경전의 내용이며 도의 이치 등을 문답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이내 밤이 되자 수운 선생은 주위 사람을 내보내고 홀로 오랫동안 심고(心告)를 하더니, 해월을 불렀다. 그리고 해월에게, "무릎을 단정히 하고 내 앞에 앉아라"고 하였다. 스승님이 지시한 대로 무릎을 꿇고 단정하게 앉았다. 잠시 후 수운 선생은 해월에게, "손과 발을 굽혔다 펴 보아라"고 하였다.

해월은 갑자기 정신이 아찔해지며 대답은커녕 몸조차 움직일 수가 없었다. 수운 선생은 이를 바라보고 웃으시며 해월을 쳐다보다가 이르시기를, "그대는 어찌하여 이러하나?"하였다. 이 말을 듣자 곧 몸이 움직이며 굴신(몸을 굽힘)이 되었다. 수운 선생 이르기를, "그대의 몸과 팔다리를 좀 전엔 펴지 못하더니 지금은 왜 움직이는가?" 해월은 대답하기를,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고 하였다.

수운 선생 이르기를, "이것이 바로 조화가 대단함이로다. 후세에 난을 당한들 무엇을 걱정하랴, 신중하고 신중하라"고 말씀하였다. 이날 있었던 수운 선생과 해월의 언행에 대해 동학 천도교에서는 두 가지로 해석한다. 하나는 '수운 선생이 수제자 해월에게 도통을 전수하려 단전밀부의 조화를 부려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다'는 설명이다. 또 하나는 '수운 선생이 해월에게 오심즉여심(吾心則如心)의 하나된 마음과 몸 즉 일심동체(一心同體)를 확인하는 과정을 거친 것'이라는 설명이다. 즉 도통전수를 위한 수운 선생의 조화를 말함이다.

분명한 것은 도통전수 과정에서 한울님과 수운 선생이 일심이 된 것처럼, 수운과 해월의 일심(一心)을 확인하였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하겠다.

그날 8월 14일 달밤 삼경(三更)에 수운 선생의 마음과 해월 선생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르러 단전(單傳)의 도통 전수를 행하였다. 이로써 해월 선생은 동학의 2대 교주 자리를 정식으로 물려받는다.

수운 선생은 15일 추석날 새벽이 밝아오자, 하늘 마음을 지키고 바른 기운을 살리는 수심정기(守心正氣)와 하늘의 뜻과 수운 스승의 명교를 받으라는 수명(受命)의 글씨, 변함없이 곧은 마음인 일편심(一片心)의 법문을 해월에 전한다.

龍潭水流四海原 劍岳人在一片心
용담수류사해원 검악인재일편심
(용담의 물이 흘러 네 바다의 근원이 되고, 검악에 사람이 있어 하나의 곧은 마음이다.)

용담의 물은 용담에 사는 수운 선생을 상징하고, 검악의 사람은 검곡에 사는 해월 선생을 상징하는 것으로, 용담연원의 도통 전수가 사사로움이 아니라, 천명(天命)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해월 선생은 8월 14일 정식으로 도주(道主) 즉 동학의 제2세 교주로 임명되어 도통을 물려받았다.

해월 선생이
수운 선생으로부터
동학 2세 교주를
물려받은 것을
하늘의 뜻이라
할 수 있지만,
그것보다는
수운께서 해월의
사람 하나 됨됨이를 보고
참사람이었기에
그렇게 하셨으리라.

[목판화] 새 세상을 여는 사람들목판화 앞줄 중앙 최제우, 우측으로 최시형, 손병희, 박인호, 손천민, 좌측으로 손화중, 전봉준, 김덕명, 이방언, 김개남, 뒷줄 중앙 장흥여전사 이소사, 동학접주 등 무명 동학군들이다. 박홍규 화백은 동학지도자들을 의관정제한 모습으로 재현했다. ⓒ 박홍규


산하의 큰 운이 우리 도로 돌아온다

수운 선생이 해월 선생에게 도통을 전수한 무렵, 청하도인 이경여(李敬汝)가 산에 움막을 치고 사람들을 모아 동학의 주문 수련을 시키다가 이웃의 고발로 경상 감영에 체포되어 끌려가 고문을 받고 영덕 땅으로 정배(定配_귀양)되는 사건이 터졌다. 영덕에 사는 도인들은 그를 구해내기 위해 2만 냥을 모아 죄를 면하려고 속전(贖錢)을 내고 사건을 해결하였다.

최초의 동학 봉기로 평가되는 1871년의 이필제 난의 전말을 기록한 <신미아변시일기(辛未衙變時日記)>에 따르면 "우리 고을에서 6~7년 전(1863년)에 동학의 무리가 있었다. 여러 고을의 동류들과 오가며 궁촌에 소굴을 만들고 무리를 모아 거리낌 없이 교를 세워 멋대로 행하였다. 이후 고을 선비들은 그들과 관계를 끊는 글을 돌렸고, 죄상을 들어 함께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당시 유생들의 동학을 바라보는 시각이 그리 곱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영양과 진보의 도인들이 일원산에 들어가 산막을 치고 집단 수도를 한 사실이 관에 고발되어 한때 소동이 벌어졌다. 서헌순의 장계 중 이내겸 문초 부분에 "일월산 풍설은 영양과 진보 사람이 산 밑에 막을 치고 모여 학습한 일이 있었으나 최복술(최제우)이 입산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동학도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지자 관의 탄압이 늘어나고 있었다. 수운 선생은 8월 20일경 '산하의 큰 운이 우리 도로 돌아온다'로 시작하는 탄 도유심급(歎道儒心急)을 지어 반포하였다. 제자들의 수도에 대한 조급한 마음가짐을 경계하고 올바른 수련 자세를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바로 동학도인들의 급한 마음을 탄식하면서, '산하의 큰 운이 우리 도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뜻이 담긴 글이다.

당시 민중들은 굶주리고 병들고 학대받는 고통에서 벗어날 새로운 희망이 오직 동학뿐이라는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동학에서 말하는 '다시개벽'의 새로운 세상이 빨리 왔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 세상을 이루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때 수운 선생은 여러 편의 시를 지었는데, 주로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말씀과 고난의 시기를 극복하여 대도(大道)의 세상을 열어가야 한다는 내용이다.

최후의 생일 잔치와 천황씨 반포

1863년 10월 28일(음)은 수운 선생의 39회 생일이었다. 우리 나이로 40살이 되는 날이다. 이날 많은 제자와 도인이 모여 생일 잔치를 벌였다. 수운 선생은 사실 제자들에게 생일 잔치를 열지 않았으면 한다고 뜻을 전했다. 그러나 해월 선생이 수운 선생 몰래 통문을 돌리고, 영덕 접의 도인들에게 각기 준비시켜 잔치를 크게 열었다. 이때 찾아온 사람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날 생일 잔치에서 제자들과 푸짐하게 잘 차려진 음식을 드신 후 좌우를 돌아보며, "세상에서 나를 천황씨(天皇氏)라 하리라"고 엄숙히 말씀하였다. 다시개벽의 새 세상을 여는 천도(天道)를 폈으니, 천지(天地)를 연 천황씨와 같다는 말씀이다.

수운 선생은 다시개벽의 시조로 최후의 생일 잔치가 된 자리에서 무극대도(無極大道)인 천도·동학을 창도한 주인으로서 '천황씨'라 선언하여 반포한 것이다. 이후 동학에서는 '1세 교조 수운 최제우는 천황씨(天皇氏), 2세 교주 해월 최시형은 지황씨(地皇氏), 3세 교주 의암 손병희는 인황씨(人皇氏)'라 존칭하는 것이 정착되었다.

천황씨 수운 대선생님, 그 천황씨가 다시 오실 때가 되었단다.
그 천황씨는 우리 모두가 수운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수운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늘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늘이 되어 다시 천황씨의 일을 할 때가 되었단다.

덧붙이는 글 이윤영 기자는 동학혁명기념관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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