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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산가옥의 어제와 오늘, "역사 흔적 남겨야" 여론도

"일제가 남긴 치욕의 역사 되풀이되지 않게 남겨놔야"... 완도 지역 현황은

등록|2024.11.15 10:46 수정|2024.11.15 10:48

▲ ⓒ 완도신문


'적산가옥(敵産家屋)'은 적의 재산이란 뜻으로 적국의 사람들이 남긴 건축물을 말한다. 그래서인지 일반인의 시선은 그리 곱지만은 않다. 우리 땅에 있는 적산가옥은 일제가 남긴 우리나라 수탈의 흔적이기 때문에 지워야 한다는 주장이 많았다.

김영삼 정부 때는 일제 청산의 분위기가 고조했다. 문민정부의 시작을 알리는 의미로 조선총독부청사를 철거했다. 독도 영유권 주장과 일제의 잔재라는 의미 확대로 한옥으로 지어진 육당 최남선의 생가까지 파괴할 정도였으니, 그때 일본과의 외교적 분위기가 살벌했다. 그러나 외형만을 보존한 서울도서관이 된 옛 서울시청사는 대표적인 적산으로 남았다. 일본과 가까운 부산에는 일본식 가옥이 1만4000채가 넘는다. 전국 곳곳에 적산의 흔적이 많다.

군산과 목포도 마찬가지다. 그곳은 일제강점기 때 호남에서 생산한 쌀을 일본으로 반출하는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적산가옥은 군산, 포항, 목포, 나주, 영산포, 부산, 인천 등 식민지 수탈의 근거지였던 항구도시에 아직 남아 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하자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쫓겨 가면서 국가에 귀속된 재산 중 일반에게 불하된 일본인 소유의 주택이 적산가옥이다.

광복 이후 미군정에 의해 적산가옥은 빠른 속도로 불하가 진행됐고, 그 과정에서 여러 분쟁을 불러왔다. 국내에 있던 대부분의 적산가옥은 광복 후 일반인에게 불하됐다.

▲ ⓒ 완도신문


1945년 미국은 우리나라에 미군정청을 두고 통치하면서 일본인 소유재산을 '패전국 소속 재산 동결 및 이전 제한의 건'과 '조선 내 일본인 재산의 권리 귀속에 관한 건'에 의거해 인수했다.

그리고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의 재산과 토지 인수를 위해 '신조선회사'를 설립했다. '신조선회사'는 이듬해 '신한공사'로, 1948년 3월 22일 다시 '중앙토지행정처'로 명칭을 변경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1949년 12월 9일, 법률 제74호가 제정돼 귀속재산법이 만들어졌다.

1950년 3월 시행령이 공포돼 1956년 9월까지 20만7842건이 처리될 정도로 적산가옥 불하를 빠른 속도로 진행했다. 적산가옥을 두고 사회단체와 정치권에서는 '일제의 흔적을 지워야 하느냐, 보존하느냐'의 논쟁을 끊임없이 제기해 왔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적산가옥을 일본식 주택으로만 볼 수 없다고도 한다. 말하자면 지붕의 형식과 창문은 일본식이지만, 온돌과 두꺼운 벽을 사용한 것은 한국식이며, 벽난로나 입식 구조는 서양식이라는 것. 더욱이 적산가옥엔 일본인들이 살았던 기간보다 해방 뒤 한국인들이 살았던 기간이 더 길다는 견해다.

우리나라에 있는 적산가옥은 전통 일본식 가옥이 아닌 유럽식, 서양식, 일본식이 짜깁기 된 근대유산의 산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래서 일본인들이 남긴 흔적이기에 막연한 반감을 가질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근대에 우리나라에 도입된 주택의 한 형태로 봐야 한다고도 본다.

적산가옥과 근대건축물을 역사 교육과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는 사례가 많다. 전북 군산은 일제 강점 100주년 때 월명동과 영화동을 '근대역사 경관'으로 지정하고 적산가옥을 관광자원으로 개발했다. 군산항은 일제 강점기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한 기지로 이용됐다.

그곳에는 적산가옥 100여 채가 아직 남아 있는데, 군산시는 일대를 근대역사 탐방로로 만들었다. 또 등록문화재인 조선은행 군산지점과 장미동 옛 나가사키18은행 군산지점, 시마타니 농장 귀중품 창고는 각종 공연장과 미술관으로 활용한 '예술창작 벨트'로 조성했다.

제주시에는 원형이 그대로 남아있는 적산가옥 1채가 있는데, 2024년 10월에 우수건축자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지금은 적산가옥을 보존하자는 사회적 분위기가 크다. 대표적인 예로 '목포의 딸'이라는 별칭을 얻게 된 손혜원 전 국회의원의 역할이 한몫했다. 그는 목포 지역의 적산가옥을 사들여 예술인들의 창작공간으로 활용해 목포의 근대유산을 관광자원화 했다.

그러나 적산가옥을 보존하는 일은 그리 쉽지가 않다. 국가유산청이 2005년 서울시 용산구 적산가옥 2채를 등록문화재로 올리려고 했지만 소유자의 반대로 실패했다.

적산가옥이 등록문화재가 되면 정부의 지원도 받고 적절히 활용할 수 있지만, 소유자들이 개발이익을 우선시하기 때문에 보존과 활용방안은 거의 검토되지 않는다고.

적산가옥은 대부분 문화공간으로 주목받기도 한다. 전시공간이나 게스트하우스, 카페 등으로 리모델링하는데, 이색적이라며 젊은 층에게 인기다. 영화촬영지로도 활용된다.

이처럼 적산가옥 분쟁은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광복 후 친일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대한민국정부의 수립으로 친일 인사가 득세했고, 좌우 이념 투쟁도 격화했다. 6.25 전쟁으로 정부 자료가 대부분 소실됐고, 5·16 군사쿠데타 이후에는 경제 부흥이 우선시 돼 과거사 청산은 뒷전으로 밀려 버렸다.

하지만, 학계에서도 가치가 있는 적산가옥 보존을 주장한다. 일제가 남긴 침략의 증거이며 치욕의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교훈의 대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치독일이 남긴 흔적을 오히려 되살린 프랑스와 홀로코스트의 역사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유대인들의 사례를 들기도 한다.

전남 완도 지역에도 적산가옥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다. 군청사 뒤편으로 또는 구도심 인근에 여전히 몇몇 적산가옥의 형태가 뚜렷이 보인다. 청산면 도청항 골목길에도 있다.

완도 지역은 전국의 3대 항일운동의 성지다. "항일운동의 역사가 완벽히 증명되려면 일제 침탈의 흔적이 분명히 남아 있어야 한다"며 지역 내 적산가옥 보존가치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 있다.

일제 침탈에 의해 빼앗긴 사수도 분쟁을 목도한 지금, '일제의 흔적을 보존해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지역사회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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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심 속에 사라져가는 '적산가옥'들 https://omn.kr/2azmx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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