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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이들이 꿈꾸던 세상 실현, 그것이 우리의 추모

트랜스젠더 시민의 존엄과 인권을 최우선으로 고려한 '성별의 법적 인정'을 거듭 촉구함

등록|2024.11.15 13:42 수정|2024.11.15 13:54
성소수자 권리의 위기, 그리고 이를 위해 노력했던 독자적 진보정치의 위기 국면에서, 성소수자 권리 보장과 평등한 한국 사회를 위한 진보정치의 역할과 실천들을 다시금 돌아보고자 합니다.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이 있는 11월을 맞아, 독자적 진보정치를 선언한 노동당, 녹색당, 정의당의 진보 3당이 공동으로 오마이뉴스 기고를 진행합니다. 트랜스젠더 권리 보장을 위한 각 당의 정책들과, 성소수자 당사자인 당원들이 가진 삶의 경험을 함께 나누며 트랜스젠더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려 합니다.[기자말]

누구나 존중받는 차별 없는 사회정의당 성소수자위원회 로고 ⓒ 정의당


어떤 사람들에게 죽음은 유독 가까이 있다. 떠나간 이들을 추모하고, 남은 이들의 마음을 추스르는 일은 성소수자 커뮤니티의 주요한 역할 중 하나가 됐다. 정의당 성소수자위원회는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Transgender Day of Remembrance, TDoR)을 맞아 혐오와 폭력에 스러진 많은 동료들을 그려본다.

친구 K의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는 2로 시작한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점을 이미 느끼고 있었다. 여자들만 분홍색으로 옷을 입히는 게 불편하고 싫었다. 청소년이 되자 자신과 다른 성별의 규범을 강요받는 일이 늘었다. 사람들은 옷차림과 머리 길이에 관심이 많았다.

중학교 1학년, 남들처럼 치마 교복를 입고 오라는데 도저히 못 해 학교를 며칠 빠졌다. 담임도 아닌 옆 반 선생님이 이야기를 잘해줘 바지를 입고 3년간 다녔다. 그러나 공동생활의 일상 곳곳에서 예상치 못한 불편함과 만나야 했다. 화장실은 아예 피하고 싶은 공간이었다. 아무리 더워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 혼자 있을 때조차 자신의 몸을 드러내기 싫어서, 샤워하거나 옷을 갈아입을 때 일부러 불을 끄곤 했다.

그는 전기기술을 배웠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일을 한다. OO여자고등학교 졸업이라고 적힌 이력서를 설명하는 일은 어려웠다. 성인이 된 후 스물한 살 때 처음 간 투표소 입구서 "본인 맞아요?" 추궁당한 이후로 단 한 번도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다.

대학을 갓 마친 청년이 전세사기를 당해 수천만 원의 빚을 업고 사회생활을 시작한다는 뉴스를 접한다. 많은 이들이 그 처지를 공감하고 슬퍼하고 심지어 함께 분노한다. 그와 일면식도 없지만, 높은 주거비와 불안한 셋방살이, 그리고 사회에 막 나왔던 때의 막막함을 알기 때문이다.

성소수자 차별 반대퀴어문화축제에서 축사를 하고 있는 故 노회찬 前 의원 ⓒ 정의당


우리는 앞서 어느 트랜스젠더 남성의 삶의 조각들을 감히 엿봤다. 교육, 건강, 노동, 참정을 비롯한 삶의 많은 영역에서 이토록 많은 도전을 받는 트랜스젠더 시민의 존재가 우리 사회 인권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이러한 현실은 변화해야 한다는 인식을 여러분과 함께 가지고 싶다. 나아가 그가 거쳐온 어려움을 접한 여러분들이 트랜스젠더의 곁에 서주기를 나는 바란다. 우리 반 학생이 아니더라도 교복 바지를 입을 수 있도록 거들어준 옆 반 선생님이 돼주기를 바라고, 트랜스젠더를 비하하는 농담을 들었을 때 제지하는 동료가 돼주길 바란다.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 돼준다면 우리 사회는 변화할 것이다.

트랜스젠더의 삶을 둘러싼 논의의 지형은 다층적이고, 거기에는 많은 긴장이 있음을 안다. 그러나 내가 만나 함께 밥 먹고, 담배 피우고, 부대끼며 지내온 트랜스젠더들은 구체적인 얼굴을 가진 현실의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은 어떠한 이념도 현상도 아니다. '문화전쟁'을 위한 투사도, 정치적 올바름을 강요하며 누군가를 윽박지르려는 사람이 아니다. 어느 종교나 가정을 무너뜨리기 위한 특공대도 아니다. 그들은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이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존재 그대로, '나로서' 살고 싶을 뿐이다.

그가 겪어온 어려움은 트랜스젠더라는 성별 정체성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성별의 불일치에 따른 불편함을 최소화할 수 있는 제도가 미비하기 때문이다. 트랜스젠더를 둘러싼 왜곡과 편견이 팽배하기 때문이다.

2013년 서울서부지법은 성별 정정에 외부 성기 형성이 필수적이지 않다는 결정을 내리며 이렇게 말했다.

"관용은 나에게 편안한 사람들과 편안한 삶의 방식을 공유하는 공간을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불편한 사람들과 불편한 삶의 방식을 함께할 공간을 내어주는 것으로서 차이를 뛰어넘는 동등과 배려와 존중을 의미한다."

성별인정법 법안 발의 기자회견장혜영 당시 국회의원이 대표발의한 성별의 법적 인정에 관한 법률안 발의 기자회견. 장혜영 의원의 옆으로 박한희 변호사, 故 이연수 활동가 등 트랜스젠더, 성소수자 활동가들이 함께 서 있다. ⓒ 정의당


지난해 TDoR을 맞아 장혜영 정의당 의원은 '성별의 법적 인정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장 의원은 이날 "추모의 의미는 돌아가신 분들을 기억하는 것이자 현재를 살아가는 분들과 연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트랜스젠더 당사자이자 우리의 동료 활동가인 박한희, 이연수와 함께 선 자리였다.

지난 1년, 진보정당을 둘러싼 많은 환경이 변했다. 그러나 성소수자의 삶은 충분히 변하지 않았다. 누구든지 있는 그대로 존엄하고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고, 그리하여 누구도 죽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여러분과 함께 만들고 싶다. 성소수자를 향한 혐오와 차별을 깨고, '누구나 존중받는 차별 없는 사회'를 쟁취할 그 날까지 정의당 성소수자위원회는 멈춤 없이 나아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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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 '내 성별은 내가 결정', 지금 한국 정치에 필요한 발상 https://omn.kr/2ax8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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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글쓴이인 권순부씨는 정의당 성소수자위원회 위원장,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집행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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