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부부의 아파트 분양 도전기... 사연이 있어요
[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한 채>
▲ 영화 <한 채> 스틸 이미지 ⓒ 씨네소파
결혼 증명을 위해 신혼부부와 신부의 아버지가 사진관을 찾는다. 경사스러운 순간일 텐데 신부는 통 웃지 않는다. 무슨 불만이 있길래 하고 의문스럽기 시작한다. 본인은 원하지 않는 결혼인가? 요즘 세상에 그런 걸 감수할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일단 사진을 찍긴 찍어야 하는데 분위기가 영 살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은 신부의 아버지에게 사정하며 신부가 웃을 수 있도록 조치를 청한다. 당사자가 아니라 왜 신부의 아버지에게 부탁하는 걸까? 그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뒷짐만 지고 있어서 신부가 영향을 받은 걸까? 마침내 일행 중 한 남자가 하소연 겸 설득을 이어간다.
필요한 분량을 뽑자마자 아까 설득하던 남자가 가족사진도 이참에 찍으시라 권하지만, 매몰찬 표정으로 신부의 아버지는 거절한다. 어지간히 이 결혼이 마음에 들지 않은가 보다. 그런데 함께 찍은 신랑도 표정은 썩 밝지 않다. 대체 무슨 사연이 있길래 이러는 걸까?
미스터리는 곧 풀린다. 신랑과 신부 가족을 오가며 일을 진행하던 남자가 모든 사태의 배후에 서 있다. 부동산업자인 그 남자는 위장 결혼을 통해 서울 근교 신도시에서 분양하는 신혼부부 특별공급 아파트 청약을 노린 것이다.
위장 혼인신고를 치를 두 남녀는 각각 이혼 경력이 있는 '도경', 그리고 발달장애인 '고은'이다. 엄마 없이 딸과 함께 곳곳을 전전하며 수발하는 '문호'와 함께 세 사람은 부동산업자의 상황 설명을 듣고 준비한다. 이들은 도경의 반지하 셋방에서 합숙 훈련 진행하듯 공동생활에 돌입한다. 위장 결혼 혐의를 피하고자 증거를 만들고 호흡을 맞추기 위해서다.
도경에겐 어린 딸 '사랑'이 있지만, 택배 배달과 대리기사로 낮이나 밤이나 바쁜 홀아비가 딸을 돌보기는 어렵다. 역시 전세살이하는 누나 집에 딸을 맡긴 채 가족이 재결합하는 날만 꿈꾸며 고단한 하루를 보내는 처지다. 문호 역시 고은을 돌보느라 제대로 일자리를 얻지도 못하는 처지다. 이들은 업자가 약속한 성공보수를 통해 새롭게 출발하길 꿈꾼다. 서로 상대가 마땅치 않지만 '오월동주' 고사처럼 일단 최소한의 협력은 이뤄져야 한다.
도경과 문호는 대외적으로는 사위와 장인 관계다. 사위의 자취방에 동거하는 장인이라니 좀 모양새가 빠지긴 하지만, 경제력이 없는 신부 가족이 한 집 살림하는 외양이다. 달리 할 일이 없는 신부 가족은 낮에는 도경이 배달을 위해 모는 다마스에 함께 타 일을 거들고, 때론 대리운전하는 도경을 픽업하러 밤에도 동행한다. 낯선 타인들이 좁은 공간에서 한데 부대끼다 보면 일어날 법한 소소한 충돌도 이어진다. 그런 가운데 그들이 고대하던 청약 결정이 다가온다.
위장 가족의 애환을 집어삼키는 부동산 광풍
▲ 영화 <한 채> 스틸 이미지 ⓒ 씨네소파
영화는 원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가족으로 살아가는 세 사람을 중심으로 오늘날 한국 사회 행복의 최소조건으로 설정된 내 집 '한 채'를 둘러싼 애환을 풀어낸다. 그들의 군상 극이 묵직하게 펼쳐지지만, 개성 뚜렷하게 형상화된 주인공들이 탈출할 수 없게 끌어당기는 중력의 중심인 '내 집'이 어쩌면 이 작품의 진짜 주인공이란 생각이 점점 굳건해진다.
<한 채> 속 사건의 핵심은 수도권 어딘가 신도시 아파트단지다. 한창 건물이 올라가고 특수를 노린 부동산 사무소가 곳곳에 즐비한 이곳에 입주하기 위해 주인공들은 고군분투한다.
도경과 문호의 머릿속은 각자의 셈법으로 복잡하기만 하다. 원래는 그저 명의만 빌려주고 적정한 대가를 받아 안정된 생활자금을 마련하는 게 목적이다. 하지만 그 기본전제에 충실한 도경과 달리, 문호는 그들에게 절대로 문을 열어줄 리 없는 이 신흥 중산층의 세계에 발 들이고 싶은 욕망을 문득 내비치곤 한다.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어가던 그들 사이의 묵은 갈등이 폭발하는 숨은 배경이기도 하다.
제목인 '한 채'는 영화 속 다양한 형태로 변주된다. 누구나 이들의 목적인 신축 아파트를 떠올릴 테지만, 막상 작품을 접하면 머릿속이 복잡해지게 마련이다. 실제로 이야기 내내 그들이 머무는 '한 채'는 도경이 거의 잠만 자던 변두리 반지하 투룸이고, 그들이 가짜 가족에서 우여곡절을 거치며 보통의 가족이 될 가능성을 만드는 곳이다. 도경의 딸이 얹혀 지내는 누나의 집도 주인이 전세금 올려달라 해서 근심 가득한 작은 아파트다.
시작부터 별다른 해설 없이 상징적 도입부가 주제의식을 극대화한다. 아버지와 딸은 하룻밤 잠자리를 위해 동네 여관을 전전한다. 부녀는 여관 주인을 찾지만,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문호와 고은, 불안정노동을 전전하며 장애를 지닌 빈곤층에 허름한 방 한 칸마저 쉽게 허락하지 않는 도시의 민낯이다. 반면에 택배 일을 거들며 사건사고가 연거푸 벌어지는 비좁은 다마스 승합차 안은 연속극 속 티격태격 가족 풍경처럼 심심할 틈이 없다.
건조한 터치, 하지만 연민을 담은 카메라
▲ 영화 <한 채> 스틸 이미지 ⓒ 씨네소파
결국 진 주인공이라 할 부동산 광풍에 주인공들이 어떻게 휘말리는지, 과연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지 관객이 추적하는 전개로 영화는 진행된다. 영문 제목 'Berefts'는 어원상 '빼앗긴'의 의미다. 어슐러 르 귄의 SF 고전 <빼앗긴 자들>이 자연스레 연상된다. 사기와 위장이 아니면 안식을 취할 집 한 채 얻기 불가능한 주인공들 처지에 대한 제작진의 시각이 어떠한지 일깨우는 장치다.
도경과 문호, 고은과 사랑, 도경의 누나 가족까지 모두 게으르거나 도덕적 타락과는 거리가 멀다. 딱히 남을 해치지도, 부당이익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낮이나 밤이나 열심히 일하는 근면함과 함께, 피곤해도 밥을 차려 먹이고 자녀에게 충실한 우산이 되는 선량한 이웃에 가깝다. 그들은 하루하루 버티는 것만도 벅찬 고단한 삶에 머문다. 반면에 이들을 이용하는 존재들이 돈 놓고 돈 먹기라는 말처럼 여유 자본과 정보력, 전문지식을 통해 부를 불리는 세태를 제작진은 '빼앗긴 자들'의 드라마로 풀어낸다.
부동산 문제와 빈곤층의 애환은 한국 독립영화의 마르지 않는 원천이라 <한 채>의 기본 개요만 보고 고개를 흔드는 이도 나올 법하다. 그러나 익숙한 내용을 뻔하지 않게 변주하고자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흔적이 뚜렷하다.
일단 흔한 뉴스 기사에 살만 붙이는 식 관행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것만도 독창성을 평가받을 만하다. 사회 불평등을 문제로 삼지만, 이를 위해 적지 않은 자본을 투입해야 하는 장편영화 제작과정의 모순을 직시한 제작진은 최대한의 자율성을 얻기 위해 규모를 축소하는 제작방식을 고수한다. 돈을 쓰는 대신에 몸으로 때우는 고생길을 택한 것이다.
'독립'영화가 무엇인지 모호해진 시대에 이런 태도는 호감 가는 미덕이다. 장편치고 단출한 촬영 회차를 듣고 경악했지만, 20번 넘는 사전 연습을 통해 촬영을 알차게 보완하는 것은 물론, 비전문 배우를 활용해 사실감을 강화했다.
극도로 상황 설명을 배제하고, 일상 수다나 극적 전환을 축약한 표현방식을 채택해 움직이는 풍경화를 관찰하듯 관객 스스로 상황을 판단하고 분석하게 만든다. 이를 통해 부동산 계급사회가 도시 빈곤층의 일상이란 미시적 영역을 어떻게 구축하는지 세밀하게 묘사하면서도 과도한 메시지를 경계하는 접근법이 완성된다.
'불행배틀' 없이 빈곤을 재현하는 작업
▲ 영화 <한 채> 스틸 이미지 ⓒ 씨네소파
그렇게 영화는 불행 포르노나 천하제일 불행대회로 비판받는 뻔한 양산형 독립영화 전개로 기울지 않으면서도 시의적절한 주제의식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는 데 성공한다. '성취'라 해도 좋을 정도다. 뜯어볼수록 흥미로운 구석이 많다. 보고 있으면 당연히 이렇겠지 하는 관객의 고정관념을 타격하는 세밀한 장치가 보물찾기하듯 숨어 있어 발견하는 재미가 퍽 쏠쏠하다. 남들 다 하는 작법에 의존하지 않고 주어진 조건에 최선을 다하면 흥미로운 변주가 여전히 가능하다는 증빙 사례 중 하나다.
분양을 목표로 우여곡절 가득 파국의 위기가 몇 번이고 닥치지만, 언제 붕괴해도 이상하지 않을 위장 가족이 끝내 버티는 잡초 같은 기운, 그 저력을 통해 은근히 우리에게 익숙한 전통적 가족 기능과 역할을 온존하는 방향성이 미화나 포장 없이 통하는 게 놀랍다. 결말의 해석은 각자의 몫이지만, '집'의 의미와 그곳을 둥지로 삼은 '가족'의 원초적 기원을 새삼 돌아보게 만드는 흥미로운 귀결임엔 분명하다.
모범답안처럼 뭐든 구체적으로 설명을 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관객이라면 영화가 끝날 때까지 해명되지 않는 불투명한 결론에 당혹스럽겠지만, 가족의 관계와 희생의 의미를 성찰하게 만드는 여백을 탐구하는 재미가 만만하지 않다.
문호가 자녀를 독립시키는 과정과 그들이 먹고 자는 공간의 분리가 연동되는, 무척이나 정석적인 설정을 어떻게 상징적으로 구축할지에 관한 고심이 진하게 묻어난 작업이다. 여기에 조금만 삐끗해도 욕먹기 딱 좋은, 장애인 묘사의 톤 앤 매너까지 심사숙고한 흔적이 역력하다. 영화관 바깥의 풍경과 누수 없이 직결되면서도, 예술적으로 상징하고 응축해 표현하는 미덕이 풍성한 영화다.
▲ 영화 <한 채> 포스터 이미지 ⓒ 씨네소파
[작품정보]
한 채
The Berefts
2023|한국|드라마
2024.11.20. 개봉|90분|12세 관람가
감독 정범, 허장
출연 임후성, 이수정, 이도진, 이주형, 지성은
제작 DGC & 타이거시네마
배급 씨네소파
2023 28회 부산국제영화제 LG올레드 비전상/시민평론가상
2024 25회 가치봄영화제 관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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