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스물셋, 창문 너머로 빵과 생리대를 던지다
[여성노동자의 자기역사쓰기 7-2] 남성전기에서의 노조활동과 심상정 언니와의 인연
'여성노동자 자기역사쓰기'는 여성노동자들이 자기 삶과 노동의 경험을 젠더관점으로 재해석함으로써 노동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여성' 노동자로서 자긍심을 고취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과 더불어 기록되지 않은 여성노동자들의 경험을 되살리기 위한 목적으로 기획되었습니다. 이 사업을 통해 10여 명의 공공운수노조 조합원들은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 역사적 배경 속에 딸로서, 아내로서의 경험한 것을 돌아보고 여성 노동자로, 한 인간으로서 자기 성장의 역사를 기록하였습니다.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아가며 고통스러웠던 기억, 신나게 투쟁했던 경험, 조합원에서 간부로 성장한 경험을 모두 담아냈습니다. 왜 노조가 필요했는지, 노조활동을 통해 어떻게 성장했는지 등 개개인의 목소리를 통해 2024년 현재의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과 투쟁을 함께 고민하고 연대하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기자말]
미스롯데를 꿈꾼 17살, 라이터 공장에 취직하다
그곳에 노동조합이 있었다
한 번은 사용자 측과 협상을 하러 갔는데 그 사무실 화장실을 갔더니 화장지가 하얀색이었다. 우리는 누런색 화장지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도 깨끗한 화장지 쓰고 싶다"고 요구해 작업장 화장실 화장지를 모두 바꿨다. 노조에 가입하면서 봉산 탈춤도 배웠고 꽃꽂이와 연극도 배웠다. 난생처음 머리띠 두르고 농성도 했다. 그런데 왠지 두렵거나 낯설지가 않았다. 잘못된 것을 바꾸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 사명감을 가지고 내가 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기 전에는 공장에서 일하는 우리 같은 공순이들만 노동조합을 하는 줄 알았다. 넥타이 매고 일하는 사람들은 노조를 하지 않는 줄 알았다. 실제로 당시에 우리 회사 사무실에서 일하던 사람들도 우리를 노조한다고 무시했다. 그러나 그런 것에 대해서는 문제를 제기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들과 우리 사이는 하늘과 땅만큼 멀다고 생각했다. 당시 노동조합을 겪으면서 노조는 꼭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구로공단 노동자들의 파업(구로동맹파업)이 있었을 때는 우리도 연대를 갔다. 우리는 대우어패럴에 빵과 생리대를 창문 너머로 던져주기도 했다. 내 나이 23살에 난생처음 겪은 파업, 우리 사업장에서도 파업을 하자 청바지 입은 백골단이 각목을 들고 공장으로 몰려들어 왔다. 나는 너무 무서워서 그 길로 집으로 도망 왔다. 나중에 들으니 노조 간부들은 연행되어 난지도까지 끌려갔다고 했다. 그때 도망 나온 이후로 남성전기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하게 되었지만, 노조를 하던 그 시기에는 정말 이후로도 경험하지 못 한 것들을 겪었다.
▲ 1985년 6월 24일 농성하는 대우어패럴 노동자들 모습 ⓒ 구동파20주년기념사업회
인생에 예행 연습은 없다
남편과는 10년을 연애하고 29살에 결혼했다. 처음 남편을 만났을 때 남편은 대학생이었고, 내가 자주 가는 음악다방에서 DJ를 하고 있었다. 잘생긴 DJ가 내 신청곡을 꼬박 틀어주니 마음이 갔다. 남편과 연애할 때는 남편에게 노조활동을 하며 배웠던 데모송도 많이 불러줬다. 그때는 한 남자를 알면 결혼까지 해야 하는 줄 알았다.
결혼하고 보니 남편은 인물 빼고는 잘난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다. 시집살이도 심했다. 스트레스 때문에 편두통과 위경련을 달고 살았다. 먹지도 못 하고 응급실을 밥 먹듯 드나드니 살이 계속 빠졌다.
첫 아이를 가졌을 때 전치태반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 겨우 출산을 했는데, 그때 내 키와 몸무게가 168cm에 51kg이었다. 그런 데다 남편이 사업을 하다 빚을 져서 그걸 갚느라고 TV 재연 배우 일도 계속했다.
그러다 아이가 세 살 되던 해에 남편에게 폭행을 당했다. 폭행이 세 번 정도 반복된 뒤 이혼을 결심했다. 이혼할 때 "위자료 안 받아도 좋으니 아이는 내가 키우겠다"고 했는데 그렇게 됐다. 남편은 바로 재혼해서 가정을 이뤘고, 양육비는 받지 못했다. 남편이 내 앞으로 진 빚도 고스란히 떠안았다.
이후 생각해 보니 시어머니도 평생을 아들 하나 보며 살아오셔서 그러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어머니가 위암과 폐암으로 돌아가시기 전, 나를 보고 싶어 하신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찾아뵈었다.
시어머니는 현관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나를 맞으셨다. 덩치가 크셨던 분이 32kg까지 마른 몸으로 "나 좀 용서해 달라"고 우시는데, 나도 모르게 시어머니를 끌어안고 울었다. "저도 어렸으니 잘 몰랐다"라고, "저도 어머니께 잘한 것만 있겠느냐"고 울었다. 그렇게 시어머니를 용서해 드리고 보내드렸다.
나는 남편을 정말 좋아했다. 남편이 없으면 못 살아갈 줄 알았다. 그러나 이혼을 하고 나니 전혀 다른 세상이 내 앞에 펼쳐졌다. 너무너무 자유롭고 행복했다. 늘 나를 괴롭히던 스트레스도 사라졌다. 딸과 둘이 잘 살아가기만 하면 됐다.
호프집을 하다가 문을 닫고, 마트며 식당이며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러다 보험설계사를 거쳐 요양보호사로 일하게 되었다. 평일에는 요양원에서 일하고, 주말에는 보험 일을 했다. 요양원은 퇴직금을 주지 않으려고 나를 해고했는데, 그 후엔 재가요양사로 일했다. 그렇게 일을 해도 빚을 갚느라 살림이 늘 빠듯했다.
딸이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방 한 칸짜리 전세방에서 12년을 살았다. 한 칸짜리 방에서 딸은 책상도 없이 공부했다. 학원도 한 번 못 보내줬는데 혼자 공부해서 법대에 떡하니 합격한 딸이 너무 대견하고 고마웠다. 게다가 딸이 좋은 회사에 취직한 덕분에 대출금을 받아 한 칸짜리 전세방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그 빚을 갚기 위해 재가 요양 일을 세 개씩 받아서 했지만 정말 행복했다.
요양보호사로 7년을 일하고, 너무 힘들어 일을 그만두었다. 재가요양사로 일하면서는 파출부 취급을 받았다. 한 시도 쉬지 못 하게 하는 이용자들 때문에 몸이 말이 아니었다. 손가락이 부어서 구부릴 수도 없었다. 일을 그만두고 일자리를 구하는데 갈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았다.
청소 일에 대해서는 나도 편견이 있었던 데다, 새벽에 출근할 자신이 없어 망설였다. 하지만 먹고 살아야 하니까, 마침 친한 언니가 소개를 해줘서 국민은행 본사 청소일을 거쳐 지금의 연세재단빌딩으로 왔다. 전자회사도 다녀봤고, 호프집도 해봤고, 식당일도 해봤고, 요양보호사, 보험설계사 등등 온갖 일을 다 해봤지만, 이 일이 제일 편하다. 마음이 편하다는 말이다. 내 일만 제대로 해놓으면 간섭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천하의 김민순이가 미화 일을 한다"라고 하지만, 나는 지금 행복하다. 내가 행복하면 그만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면 된다. 나는 그렇게 살아왔다.
내가 지금 일하고 있는 이곳은 노동조합이 만들어진 지 꽤 오래되어서 급여도 복지도 다른 주변 사업장보다 훨씬 좋다. 예전처럼 앞장서서 간부로 노동조합 활동을 할 용기나 에너지까지는 없지만, 집회 한 번 빠지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하고 있다. 이제는 평조합원의 위치에서 간부들의 활동을 뒷받침해주고 싶어서다.
인생엔 예행연습이 없다. 한 번 사는 인생이니, 정말 최선을 다해 열정적으로 살았다. '오늘은 이렇게 힘들어도 내일은 웃는 일이 생기겠지', '내일은 좋아질 거야'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 할 것 같은 날도 많았지만 나를 다독이며 다시 일어섰다. 그래서 나는 쓰러질 것 같아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오뚝이를 참 좋아한다. 이제는 나를 쓰다듬어 주고 싶다.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다고.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