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 있게 등 노출도 강행... 영화의 따스함 전하고 싶었다"
[인터뷰] 영화 <한 채>의 이수정 배우
▲ 영화 <한 채> 스틸컷 ⓒ 씨네소파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한 채>는 집 한 채를 얻기 위해 두 가족이 신혼부부 특별공급 아파트를 분양받으려는 과정을 담았다. 한국에서 갖기 힘든 아파트를 소재로 가족의 의미를 묻는다. 집 한 채를 위한 처절한 몸부림은 하나의 목적을 위해 맺은 관계의 복잡한 관계를 훑는다.
영화는 캐릭터의 전사, 스토리의 결말, 의문이 해소되지 않고 편집된 부분이 많아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사실적이다. 캐주얼 시네마 방식 채택해 미니멀한 스태프와 유연한 촬영 방식으로 찍은 영화다.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 비전 부분 최고상인 LG올레드 비전상과 시민평론가상을 받았다.
러닝타임 내내 지적장애를 가진 여성과 아빠, 집 없이 모텔을 전전하며 지낸 딸 고은이 눈에 밟힌다. 죽기 전에 작은 집이라도 남겨주고 싶은 아빠는 불법인 줄 알지만 브로커를 통해 딸이 있는 도경과 위장결혼을 시킨다. 아빠가 '이제부터 끝이라고 하기 전까지 소꿉놀이하는 거야'라는 말을 믿는 고은은 이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빠를 고분고분 따른다.
반짝이는 얼굴을 한 신예 이수정을 13일 강남의 카페에서 만났다. 생의 첫 인터뷰라 떨리는 마음이라며 만남의 의미를 부여했다. 첫 만남, 첫사랑, 첫 출근 등 누군가의 처음에 동반하는 기분이 오랜만이라 함께 들떴다. 이어 흔한 이름을 강조하고 싶은 마음으로 만들었다며 "마음을 전하는 배우가 되고 싶은 보석보다 빛나는 이수정입니다"라고 소개했다. 원석을 만난 기분이 들었다. 단아한 모습과는 반대로 때로는 말괄량이처럼, 수줍은 소녀처럼 다양한 얼굴을 드러냈다. 다음은 배우 이수정과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한 것이다.
"우리 영화는 따스한 온도"
▲ 영화 <한 채> 이수정 배우 ⓒ 씨네소파
- 지적장애가 있는 '고은'은 말, 표정이 잘 없어 감정 상태를 알기 힘들다.
"아빠랑 여기저기 떠돌이 생활을 오래 해 누울 수 있는 곳은 집이라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생각 없어 보이지만 장면마다 의미를 부여하고 특성을 장면마다 나눴다. 가끔은 의사가 뚜렷해 보이기도 하고, 애가 타 보이기도 했으며, 어른같이 행동하려는 모습도 있다. 행동의 연결성을 두면 오히려 이상해질 것 같았다. 그냥 고은이니까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빠랑 있을 때는 어리광 피우는 딸처럼, 사랑(도경의 딸)이랑 있을 때는 엄마처럼, 도경이랑 있을 때는 남편이라는 존재보다 현재를 함께 하는 동지라는 생각이 들도록 분절했다."
- 한국 영화에서 지적 장애를 가진 캐릭터가 많지 않다. 캐릭터 준비 과정이 쉽지 않았겠다.
"드라마 <날아라 개천용> 때 3차 오디션 만에 끝에 지적 장애 임산부를 연기한 적 있다. 그때 관련 다큐멘터리를 찾아보고 분석했던 게 도움 됐다. 지적 장애를 가진 분들의 특성, 버릇을 저것으로 소화해 보려고 했다. 고은의 뇌를 그려 보면서 '세상에 없는 고은을 만들어 달라'는 주문을 누구보다도 잘 해내고 싶었다. 다행히 리허설을 많이 했기 때문에 막히는 부분은 무조건 감독님부터 찾았다. 모르는 건 물어봐야 했다. 오죽하면 현장에서 '근데요.. 감독님'으로 통했을까. (웃음)"
- 초반 고은이 옷 가게에서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사달라고 조르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아빠는 그냥 가자고 하는데 고은은 버틴다. 깎아 달라는 뉘앙스인데 주인에게 은근히 강요하는 듯 보인다. 문호(임후성)가 고은을 키우며도 종종 장애를 앞세워 경제적 이득을 얻었을 거란 게 언뜻 느껴진다.
"고은이 정확하게 인지는 못했겠지만 그것도 놀이의 일종으로 받아들인 거다. 둘이 그동안 비슷한 호흡을 맞춘 경험이 있다는 설정이다. 고은이 마음에 드는 옷을 고르고 아빠는 딸을 잃어버렸다가 찾은 듯 연기하는 거다. 옷 가게에서 마지못해 사주는 상황도 사실 계산된 연기다. 소꿉놀이, 경찰놀이 같은 '놀이'의 일환으로 받아들여도 된다."
- 영화는 많은 서사가 생략되어 있어 보고 나면 궁금증이 생긴다. 관객이 괄호와 괄호 사이의 빈칸을 채워가야 하는 능동적인 영화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도 여운이 이어지고 토론의 장이 생기도록 하자는 게 우리 영화의 목표였다. 영화제 GV 때 '우리 영화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따스한 온도의 영화다'라고 무대 인사 때 했던 이야기가 기억난다."
-힘들게 찍었는데 편집된 부분 중 기억나는 장면이 있나.
"용기 있게 등 노출도 강행했는데 그 장면이 떠오른다. 도경이 고은의 등을 밀어준 뒤 처연하게 다시 자기 몸을 닦는 장면이다. 고은은 오늘 하루를 이어가는 사람인 거다. 누가 밀어주는 걸 그만하더라도 지금 순간에 집중하는 삶을 사는 존재다. 하루를 충실하게 사는 게 결국 미래를 사는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친구다. 고은이의 미래가 있을 거라고 상상도 했고 행복하라고 메모도 남겨봤다. 장애 등급이 심하지 않아서 언젠가는 독립도 가능하지 않을까. 어디에서든 고은은 잘 살고 있을 거다. (웃음)"
- 지방의 포도밭에 일하러 갈 때 문호가 고은을 도진에게 스스럼없이 맡긴다. 집을 마련하기 위한 일이었겠지만 종국에는 딸의 남편을 찾아준 의미처럼 보이기도 한다.
"문호는 결혼식장에서 딸의 손을 잡고 걸어오다가 신랑에게 넘겨주는 것 같았다. 미래를 마련해서 살아갈 수 있게 '내어주고', '건네주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처음부터 가족을 만들어 주어야겠다는 게 아니었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도경을 믿고 맡길 만한 사람으로 인식했던 것 같다. 딸이 있는 두 남성은 인생도 닮았다. 도경은 따뜻한 사람이다. 딸 사랑이와 위장결혼으로 맺어진 고은을 여전히 책임진다. 시간이 더 지나면 고은은 도경의 아내는 아니더라도 친구, 누나, 딸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봤다."
-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 보다 어찌 보면 위로가 되는 가족의 탄생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 <브로커>가 떠오르기도 한다.
"맞다. 여러 오디션에서 독백 연기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님의 영화로 보기도 했었는데 신기히다. 감독님의 영화도 너무 좋아하고, 기회가 된다면 꼭 참여하고 싶다. 영화 속에서 고은이와 사랑이가 처음 브로커 사무실에서 만났을 때 사탕 먹는 장면만 봐도 알 수 있다. 엄마, 자매, 친구 같은 장면도 영화의 주제를 말해주는 것 같다. 남이지만 둘은 닮아 보이기도 한다. 서로 의지하고 스며들어 간 존재가 되어가는 신이다."
"친언니의 도움으로 배우의 꿈 이뤄"
▲ 영화 <한 채> 이수정 배우 ⓒ 씨네소파
- 배우가 된 계기가 궁금하다.
"학창 시절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을 보고 매료됐다. TV에 나오는 사람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니까 공통점을 발견했던 거 같다. 하지만 부모님을 설득할 용기가 부족해 일반 대학에 진학해 광고홍보학을 전공했다. 어쩌다가 교수님과 친분이 생겨 연기는 잊고 교수님을 따라가려던 일이 잘 안되어 버렸다. 낙동강 오리알이 된 대학교 3학년 때 사춘기 같은 치열한 고민을 했다.
그때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사람이 좋아졌고, 배우가 된다면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사람이 될 수 있겠다 싶었다. 간절함을 눈치챈 언니가 적극적으로 나서 부모님을 설득했다. 딱 1년만 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포기하겠다고 선언하고 시작했다. 그땐 아무것도 몰라서 무모하게 도전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연기 수업한다는 대학 선배의 군대 후임의 소개로 입문했다. 만나자마자 대본을 읽었는데 '내 길이다' 싶었다. 열심히 배웠고 남은 학기를 마치고 무사히 졸업해서 지금의 자리까지 왔다. 좋은 일, 나쁜 일, 힘든 일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이상하게 무언가가 밀어주는 힘이 있었다."
- 연기를 포기하려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
"제가 서른이 되면 연기를 그만둘 줄 알았다. 외모에 대한 이야기나 나이 제약도 심해서 그런지. 20대 때는 마치 시한부 선고받아 놓은 사람처럼 연기했던 기억이다. 막상 서른이 되니까 업계 관계자의 말이 틀렸던 거지.. (웃음) 지금 20대 후배를 만나면 지금 잘 놀아야 삼십 대가 달라진다고 말하고 다닌다. 나이는 정말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실감했다."
-그만두려 할 때마다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이 있나.
"팬데믹 때 어렵게 3차까지 봤던 오디션에서 눈빛이 좋다는 말을 들었다. 10년 정도 이 일을 하면서 헛발질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는데 제자리걸음만은 아니었겠다 싶더라. '조금 더 해' 같은 응원처럼 들렸다. 그리고 이상하게 아르바이트를 잡으면 일이 들어왔다. (웃음) 물론 부모님 집에 있으니까 돈이 많이 들어가는 건 아니었지만 500만 원으로 1년을 버텼다. 그때마다 언니가 사소한 심부름을 시키면서 용돈을 줘서 의지도 많이 되었다. 배우의 길로 밀어준 언니를 부산국제영화제 때 불러서 <한 채>를 보여주었더니 장문의 문자로 편지를 써줘서 감동했다."
- 인생 영화는 무엇인지. 앞으로 특별히 맡고 싶은 장르, 캐릭터가 있나.
"인생 영화는 해외 작품으로는'비포 시리즈'인데, 한국 작품 중에는 <가족의 탄생>이 있다.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신념을 간직한 배우가 되고 싶다. 예전에는 뭐든 다 하고 싶었는데 요즘은 <멜로가 체질>처럼 말맛이 살아 있는 코미디를 해보고 싶다. 코미디를 잘하면 어떤 연기도 가능하다는 말을 믿고 있다. SNL을 보면서도 저라면 어떻게 했을지 상상해 보기도 했다. 사실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 처음 보면 소심하고 얼어버리는 편이라 친해지는 데 시간이 걸린다. 다만 편한 사람 앞에서는 재미있는 편이다. 삼남매가 부모님 성대모사를 시작으로 누가 누가 웃기나 개그 본능을 감추지 않는다. 웃음으로 경쟁하다 보니까 쌓여버린 노하우다."
- 말맛이 살아 있는 티키타카 코미디도 있지만 대부분은 넘어지고 망가지는 슬랩스틱 코미디나 B급 유머가 섞인 장르가 대세다.
"단편 <영지>를 촬영가 기억난다. 아파트 단지에 노상방뇨하는 사람을 경비 아저씨와 잡으려고 고군분투하는 장면을 찍을 때 '쑥'하고 코미디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의 합을 맞추고 타이밍을 계산하는 것도 재미있고, 모니터링하는 것도 신났다. 광고 촬영장에서도 망가지는 역할이 다수였다. 박카스 선생님 편에서는 민낯이 등장하고, 햇반 광고 때는 눈 돌리며 망가지니까 현장에서 스태프들이 너무 좋아하더라. 주저 없이 들어올 테면 들어와 봐 생각하면서 빼지 않는 게 저의 장점인 것 같다."
- 장편 영화 데뷔작이다. <한 채>는 어떤 의미로 남을지 생각해 봤나.
"<한 채>는 첫 독립 장편영화이지만 한계를 시험하는 경험이었다. 한계를 정하면 딱 거기까지만 할 수 있을 것 같아 우려되어 한계 없이 일하고 싶다. 촬영 때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볼까 의문이었는데 부국제를 지나 개봉까지 앞두고 있어 시원섭섭하다. 제가 <한 채>로 떠오르는 샛별이 되고 싶다면 요행이다. 여전히 연기를 하고 있다는 점을 알리고 싶다. 덕분에 많이 고민해 볼 수 있었다."
-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나.
"사람이 한 분야에서 10년 정도 일하면 장인이 된다고 하는데 배우는 그 과정에 포함되지 않는 것 같다. 앞으로 10년을 채우는 마음으로 연기하고 싶다. 10년 후 장인이 되어 있을지 장담은 못 하겠지만 꾀부리지 않고 성실하게 연기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어느 길이든 밟아가면서 꾸준한 배우가 되는 게 목표다. 준비된 사람에게 기회도 오는 거니까. 영어, 일본어 회화도 준비하고 있다.
또 드라마 <굿보이>를 찍고 있다. 상대역이 오정세 선배님이다. 현장에서 늘 연기 스타일을 관찰하고 배우고 있다. 짝사랑하는 역할이기도 하고 실제로도 팬이라 아닌척하면서도 은근히 좋아하고 있다. 선배님의 코미디를 보면서 꿈을 좇게 되었다. 비슷한 느낌의 캐릭터도 조금씩 변주를 주어 늘 짜릿하다. 저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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