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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수록 독립지사, 형편 어려워 귀국 못 해

[오늘의 독립운동가 70] 11월 18일 타계한 전명운 의사

등록|2024.11.18 09:29 수정|2024.11.18 10:03

▲ 전명운 의사, 전남 담양읍 향교리 소재 '전명운 의사 기념 조형물' ⓒ 국가보훈부


전남 담양군 담양읍 향교리 1번지에 '전명운 의사 기념 조형물'이 있다. 전 의사 타계 61년 후인 2008년 3월 23일에 건립되었다.

왜 그토록 늦었느냐고 탓할 일이 아니다. 본디 국가가 할 일인데 하지 않았고, 국가가 곧 국민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의거 100주년을 맞아 뜻깊은 사업을 완수해준 전명운의사기념사업회 담양종친회에 오직 감사해야 할 따름이다.

국가가 아니라 문중이 세운 전 의사 기념물

전명운(田明雲) 의사는 전남 담양 출신은 아니다.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따르면 1884년 6월 25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같은 국가보훈처 누리집의 '1996년 1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에는 '1884년 6월 25일 서울 종현(현 명동성당 부근)에서 아버지 전성근과 어머니 경주 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기술되어 있다.

국가보훈부의 두 공식 기록이 다르니 어느 쪽이 맞는지 알 수가 없다. 우리나라의 독립운동 현창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단적으로 말해주는 상징이라 해도 무방할 사안이다. 전명운 의사는 국사 교과서에도 나오는 인물이니 말이다.

교과서 인물인데도 출신지 파악도 안 돼

'이달의 독립운동가'의 다음 대목은 '선생의 호는 죽암이고, 본관은 담양이다. 선생은 조실부모하여 맏형인 명선의 밑에서 자랐지만, 어려서부터 천성이 영민하고 용감하여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미였다고 한다'이다. 담양에 기념 조형물이 건립된 까닭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전 의사는 1947년 미국에서 타계했다. 향년 63세였다. 미국으로 건너가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독립운동단체에도 참여하던 중 당시 친일파 미국인으로 이름이 높던 스티빈스를 저격해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세계 만방에 떨쳤다.

하와이 노동 이민 거쳐 미국 본토로 옮겨가

서울 한성학원에서 수학하던 1905년 5월 노동 이민으로 하와이에 갔다가, 그 이듬해인 1906년 6월 미국 본토로 가서 철도 노동자·알래스카 어장 노동자로 일했다. 그러면서 안창호 등이 1905년 4월 조직한 항일 민족운동 단체 공립협회 청년회에서 활동했다.

그러던 중 1908년 3월 21일 일제의 임명을 받아 대한제국 외교 고문으로서 일본 앞잡이 노릇을 해온 스티븐스가 자기 나라 미국에 와서 기자회견을 하며 "일본의 한국 통치는 한국을 발전시킬 수 있는 잘된 일" 등의 망언을 서슴지 않는 일이 발생했다.

"한국은 일본 덕에 발전 중" 망언 일삼는 스티븐스

공립협회 등 미국 내 독립운동 단체의 회원들은 스티븐스에게 대표단을 보내 망언 취소를 요구했다. 일본 정부로부터 여섯 차례나 훈장을 받은 스티븐스가 한국인들의 요구에 응할 리 없었다. 이로써 전 의사는 스티븐스 처단을 결심했다.

때마침 스티븐스가 워싱턴에 가기 위해 3월 23일 페리 선창을 이용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전 의사는 급히 권총을 구한 다음 아침 일찍 바닷가로 가 대기했다. 9시 30분쯤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 주재 일본 총영사 소지장조(小池張造)의 안내를 받으며 나타났다.

전 의사가 '이때다!' 싶은 시기에 맞춰 권총을 발사했다. 그러나 명중하지 못했다. 마음이 급해진 전 의사는 권총 몸체로 스티븐스를 가격했다. 스티븐스도 반항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격투가 벌어졌다.

저격했지만 명중 못해 권총 몸체로 가격

그 시각, 역시 스티븐스 처단을 결심하고 같은 장소에서 기다리던 지사가 있었다. 장인환이었다. 그는 전 의사와 아는 사이도 아니었다. 그런데 자신이 저격을 하기 전에 낯선 한국인이 총격을 가했다 실패하고 격투를 벌이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장인환은 부랴부랴 권총을 꺼내어 세 발을 쏘았다. 두 발은 스티븐스의 가슴과 다리에 명중했고, 다른 한 발은 전명운의 어깨에 맞았다. 스티븐스는 사흘 뒤인 3월 25일 죽었다. 전명운은 미국 법정에서 왜 스티븐스를 습격했느냐는 미국 검찰에 이렇게 말했다.

"일본이 우리의 국권을 빼앗고 토지를 약탈하였다. 그들은 우리의 생명을 없애려 하였고 자유행동을 못하게 하였다. 스티븐스는 한국의 월급을 먹는 자로 일본을 도우며 우리를 배신했다. 나는 애국심으로 그 놈을 포살하려고 했다."

전명운 의사의 거사 동기는 미국의 여러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다. 신문을 본 우리 동포들은 물론 미국인들까지도 전 지사의 애국심에 감동했다. 동포들은 거사 당일 두 지사의 후원회를 조직했다. 후원회는 통역 선발, 재판 지원 활동, 변호사 선임 등을 지원해 일제 침략 실상을 세계 만방에 널리 알리기로 했다.

이승만, 두 의사를 위해 통역 맡아달라는 요청 거부

이때 이승만은 '장인환 · 전명운의 스티븐스 저격 사건' 통역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거절해 동포사회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또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3년 사이에 한국은 전통이 지배하는 느림보 사회에서 활발하고 웅성대는 산업경제의 중심으로 변모했다'고 오히려 찬양했다.(서울신문 2012년 12월 2일자)

공립협회는 스티븐스를 '공리(公理)의 적', 일본을 '자유의 적'으로 규정하고 두 의사가 스티븐스를 포격한 것은 '자유 전쟁'이라 선포했다. 두 의사의 의거가 민족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전쟁, 즉 '독립전쟁'의 일환이라는 사실을 세계만방에 강조한 것이었다.

미국 신문들도 스티븐스 저격 좋게 평가

상당수 미국 신문들도 '스티븐스는 한국의 공적(公敵)'이라는 제목 아래 두 지사의 친일 미국인 처단 사건을 크게 보도하면서 '인류의 양심이 살아있다'라고 평가했다(〈이달의 독립운동가〉). 대다수 미국인들도 동정을 표시했고,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던 동포들의 성원도 밀려들었다.

일제는 전명운 지사에게 사형 또는 무기 징역이 선고되도록 하려고 갖은 책동을 부렸지만 1908년 6월 28일 저격으로 스티븐스가 죽은 것도 아니고, 증거도 불충분하다 하여 무죄 석방되었다.

증거불충분으로 석방, 연해주에서 안중근 도와

전 지사는 '장인환 의사의 재판이 진행 중에 미국에 있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변호사의 권유에 따라 1908년 12월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갔다.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들의 보복 살해가 우려된 때문이었다.

전 지사는 연해주에서 안중근 의사와 만나 의기투합한 끝에 그가 조직한 독립운동단체 동의회(同義會)에 가입해 활동했다. 그 이후 전 지사는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와서 의용군(義勇軍)을 조직, 군자금을 모집해 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하였다.

지사는 로스앤젤레스 캘버리(Calvary) 천주교 묘지에 묻혔다가 1994년 4월 고국으로 봉환되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이달의 독립운동가' 마지막 문장이 눈물겹다.

"선생은 생계가 어려워 일자리를 찾아 여기저기를 전전하는 고독한 생활을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선생은 그토록 그리던 조국 광복을 맞이하였지만, 귀국하지 못하고 1947년 11월 18일 이국의 땅 미국에서 63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덧붙이는 글 국가 인정 독립유공자가 1만8천여 분 계시는데,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하려면 1500년 이상 걸립니다. 한 달에 세 분씩 소개해도 500년 이상 걸립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날, 의거일 등을 중심으로 '오늘의 독립운동가'를 써서 지사님들을 부족하나마 현창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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