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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센병 환자 있다는 소리에 자원"

43년째 한센생활시설 성심원에 사는 스페인 출신 유의배 신부

등록|2024.11.19 08:41 수정|2024.11.19 09:13

▲ 산청 성심원에서 외로운 분들을 위해 헌신하는 유의배 신부 ⓒ 오문수


'성심원'은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읍 산청대로1381번길 17에 있다. '예수 성심대축일'을 기해 설립되었기에 '성심원'이라고 이름 지었고 약 60여 년간 한센인들의 터전이 되었다.

현재 (재)프란치스코회가 운영하는 산청성심원은 한센생활시설인 '성심원'과 중증장애인거주시설인 '성심인애원' 그리고 '산청인애노인통합지원센터'로 구성된 사회복지시설이다.

산청성심원은 가족과 사회로부터 소외받은 한센인을 가족으로 받아들여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며 복지 증진을 통한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 왔다. 성심원의 설립 목적은 그리스도의 복음 정신과 프란치스꼬 성인의 모범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하는 데 있다.

▲ 오른쪽 지리산 산자락 밑에 성심원이 보인다. 성심원을 가기 위해서는 다리를 건너야 한다 ⓒ 오문수


성심원에 가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몸소 실천하는 파란 눈의 이방인이 있다. 스페인에서 온 산청성심원 본당 '유의배(Uribe)' 주임신부. 그는 한국에서 43년째 살고 있다. 유 신부님을 만난 곳은 5월 17일로 소록도 개원 기념일 행사장에서다.

강당에서 유창한 한국어로 <타향살이>노래 부르는 걸 보고 "저 분이 누구입니까?"라고 묻자 "성심원에 계시는 유의배 신부님입니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처음에는 <타향살이> 노래의 음이 좋았는데 가사를 알고 보니 더 좋아졌다"는 유 신부.

소록도에서 잠깐 인사만 나눈 몇 달 뒤 신부님과 만나기로 한 날 성심원을 방문했다. '성심원' 직원 곽경희씨는 "신부님은 가족보다 더 가족같은 분"이라고 소개했다. 수인사를 한 후 고향이야기가 오갔다. 유 신부의 고향은 피카소의 그림으로 유명해진 '게르니카'다. 그가 한국에 대해서 알게된 계기를 말씀했다.

▲ 유의배 신부의 어릴 적 모습 ⓒ 오문수


"당시 제가 6살이었는데 어느날 방송을 들은 아버지가 '스페인 내란 같은 전쟁이 한국에서도 벌어지고 있다'고 말씀하셔서 한국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됐어요. 신학교 다닐 때 선배들이 꼬레아 간다더라 그런 소리 듣고 아버지가 말한 꼬레아 생각이 났어요. 와서 보니까 많이 발전해 있더라고요. 이제 부자 되었잖아요?"

"한국은 제2의 고향"이라고 말한 그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하나님 뜻대로 여기 있을 겁니다" 라고 말하며 "한국인들은 공동체를 위하고 어려운 이들에게 관심 가지며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유 신부는 성심원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들의 학부형이기도 했다. 부모 대신 학교에 가서 담임을 만나고 서툰 한국어 실력으로 숙제를 도와주고 운동회에 가서 아이들과 함께 뛰었다. 그런 세월이 가는 동안 유신부의 검은 머리, 검은 수염은 백발이 되었다. 유 신부가 신학을 공부하게 된 계기와 성심원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인연을 얘기했다.

"삼촌의 영향을 받아 학창 시절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역사학자와 선교사 중 하나였어요. 나는 그 나라 사람들이 사는 것을 직접 보고 싶어서 선교사를 택해 볼리비아 티티카카 호수 인근에 있는 코파카바나 성전에서 2년간 근무했어요.

스페인에도 한센 병원이 있었어요. 한센병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파라과이 한센병 환자를 도우려고 했는데 진주로 발령받았습니다. 진주에 근무할 때 성심원에 한센병 환자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자원해 이곳에 왔습니다. 성심원에 오게 된 것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이국 땅에서 외로운 분들을 위해 헌신

유 신부가 한국에 근무하는 동안 부모님이 돌아가셨고 고향에는 동생들만 있다.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았지만 아버지의 임종 순간 함께하지 못한 아픔을 얘기했다.

"1992년에 어머니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10년 후인 2002년 3월 23일에 돌아가셨어요. 토요일에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비행기표가 없었어요. 제일 빠른 게 월요일이어서 그걸 예약해 놓고 기도했어요. 아버지 보게 해달라고. 그런데 일요일 오전에 돌아가셨어요. 슬펐어요."

▲ 성심원 초기에는 경호강을 건너는 다리가 없어서 배를 이용했다. 환자들을 건네줬던 뱃사공의 말에 의하면 "배를 건널 때 울지않는 분이 없었어요"라고 말했다. ⓒ 오문수


유 신부가 1980년 성심원에 근무할 때 550명에 달했던 환자들이 지금은 60명으로 줄었다. 성심원에서 돌아가신 분들은 728명으로 유 신부가 오시기 전 100여 명이 사망했고 신부님이 오신 후 629명이 사망했다. 1990년도부터는 정부 지원을 받아 장애인도 받는다. "염습도 직접한다"고 말한 그가 한 마디 보탰다.

▲ 복도에서 만난 장애인 소년을 끌어안아 주는 유의배 신부 ⓒ 오문수


"가장 가슴 아픈 환자는 돌아가시면서 신부님 '아빠하세요'라고 말씀하신 분이 있었어요. 항상 생각납니다. 염습할 때 옷 갈아입히고 몸 씻길 때 다리도 없고 팔 없는 환자를 보면서 가슴 아팠어요."

500~600여 명을 떠나보내는 동안 150여 명의 염을 직접 한 유 신부는 성심원 가족에게는 성직자 이상이었다. 가족이 없는 한센인에게도 가족이 있는 한센인에게도 삶의 마지막 시간에는 늘 유 신부와 직원들이 있었다. 성심원에 계신 한센인들이 유신부에게 거는 기대다.

"내가 죽더라도 홀로 남겨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 유 신부가 내 삶의 마지막을 배웅해 줄거라는 믿음은 변하지 않아요."

혈육을 멀리한 채 머나먼 이국 땅에서 심신이 외로운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유 신부님의 방에 갔더니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살아 있는 동안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죽을 때 두려움이 없다."

▲ 유의배 신부 방에 걸려있는 사진으로 유신부를 정말 좋아했다는 환자의 사진과 함께 “살아 있는 동안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죽을 때 두려움이 없다”는 글귀가 보인다. 환자는 고인이 되셨다고 한다. ⓒ 오문수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여수넷통뉴스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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