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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막 탈의하는 여자선수들이 충격? 더한 것도 있습니다

[주장] 잔디 논란부터 탈의실 문제까지... 오죽하면 지소연 선수가 작심 발언 했을까

등록|2024.11.19 19:47 수정|2024.11.19 19:47
지난 17일, 내가 속한 여성 풋살팀은 한 아마추어 풋살 대회에 참여했다. 경기 고양시에서 열린 이 경기는 고양종합운동장을 통째로 빌려 진행됐다. 우리 팀은 매번 인조 잔디에서 경기를 치르다가 생애 처음으로 천연 잔디를 밟는 영광을 누렸고, 나 역시 여러 생각이 스쳤다. 프로 축구선수들은 이런 곳에서 경기를 뛰는구나. 걸을 때마다 잔디 향이 올라오니 기분이 남다르네. 이런 곳에서 경기를 하면 백방으로 뛰어도 발바닥도 덜 아프고, 반바지 입고 태클을 세게 해도 다리 화상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

그 순간 한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지난 9월 인천남동아시아드에서 열린 디벨론 WK리그 인천현대제철과 서울시청의 경기. 전반 20여 분쯤 인천의 코너킥을 막아낸 서울시청 11번 박희영 선수가 운동장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스프린트를 감행해 상대편 골대에 슛을 때려 넣는 장면. 그 멋진 순간이 오버랩된 이유는 운동장에 깔린 잔디 상태 때문이었다. 저 언뜻언뜻 보이는 갈색 흙은 뭐지? 설마 잔디가 다 벗겨진 건가? 아무리 그래도 프로 리그인데?

▲ 지난 9월 인천남동아시아드에서 열린 디벨론 WK리그 인천현대제철과 서울시청의 경기 관련 kwff 인스타그램 화면 갈무리 ⓒ thekwff


선수들이 뛰고 있는 그 운동장은 잔디 구장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언뜻 보아도 흙 반, 잔디 반이었으니까. 오죽하면 SNS 댓글에 골 장면보다 잔디 이야기가 더 많을까. "와, 잔디야 풀밭이야?", "이럴 거면 차라리 인조 잔디를 써라."

수원FC위민 팬인 한 친구는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창녕WFC가 꼴찌하는 이유가 있어요. 그 팀 주경기장 잔디를 보면... 정말 말이 안 돼." 말이 안 되는 열악한 곳에서 어떻게든 말이 되는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죽어라 뛰어야 하는 선수들의 마음은 어떨까. 감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다른 여자 축구팀 상황은 어떨까. 처음 여자 축구팀 경기를 보러 가던 날이 생생하다. 서울시청의 경기를 보러 상암 서울월드컵경기장으로 향한 날, 나는 평소 남자 프로축구팀인 FC서울의 경기를 구경가는 것처럼 월드컵경기장 중앙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날 경기장은 1시간 뒤 경기가 진행된다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한산했다. 길을 잘못 들었나? 당황한 나는 만나기로 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거기 아니야. 보조경기장으로 와."

오다가다 보조경기장을 본 적이 있다. 유소년 축구팀 아이들이 뛰던 곳. 여자 축구는 여기서 뛰는구나. 서둘러 달려간 그곳의 출입구에는 어떤 안내원도, 물품을 검사하는 안전요원도 없었다. 메인 경기장에서는 선수들이 손톱만 하게 보이는 3층에 입장할 때도 '음료 뚜껑을 따서 들어가라'고 안내하며 안전에 힘쓰는데, 선수들이 눈앞에 왔다 갔다 할 정도로 가까운 이곳에는 그 어떤 조치도 없다니. 강아지와 산책하다가도 쓱 들어갔다 나올 수 있는 그 경기장에 들어간 나는 듬성듬성 앉아 있는 여자 축구 팬들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축구는 90분 진행되지만 90분 안에 끝나지 않는다. 풋살과 달리 중간에 흐름이 끊겨도 시간을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에 지체된 만큼 추가 시간이 주어진다.

이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추가 시간이 주어졌다. 그러나 경기를 지켜보는 우리는 그 시간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다. 전광판에 몇 분이 남았는지 표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판이 손을 올리며 휘슬을 불 때야 비로소 '끝났구나' 알 수 있었다. 같은 '서울'의 마크를 달고 있어도, 경기장 크기만큼이나 비교되는 대접을 받을 수도 있는 거구나. 내가 아무리 전 세계에서 제일가는 선수가 된다 해도, 한국에서라면 여성인 나는 현실의 이런저런 이유로 보조경기장에서 뛰어야 하는 거구나.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대우를 해달라

▲ 지소연이 14일 오후 서울 서초구 더 리버사이드 호텔에서 한국프로축구선수협회(선수협)가 주최한 여자 실업축구 WK리그 시상식에 앞서 취재진과 인터뷰하고 있다. ⓒ 연합뉴스


남녀 포함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A매치 최다 득점자인 지소연 선수는 자신의 인터뷰집 <너의 꿈이 될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린 선수들과 동료들에게 내가 걸어온 길이 가볼 만한 길로 보였으면 좋겠다. 내가 그들에게 꿈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좀더 자신을 믿고 꿈을 꾸며, 목소리 내길 부끄러워하지 말고 부딪혀보기를 희망한다."

자신의 후배들이 자신보다 나은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하고 싶다는 그는, 가능할 때 힘 있게 목소리를 내라고 다독이는 그는, 최근에도 자신의 목소리를 냈다. 국내 여자축구 선수들이 경기를 위해 옷을 입을 데가 없어 가림막 없는 천막에서 옷을 갈아입는 현실을 꼬집은 것이다.

한국프로축구선수협회 회장을 맡은 그는 지난 11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우리 선수들은 라커룸이 없는데도 당연하게 화장실이나 천막 아래에 들어가 그냥 옷을 갈아입는다"라며 "이게 미국이면 큰일 나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 같은 '천막 탈의'는 외국이라면 난리가 날 일인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선수들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다"라고 덧붙였다.

이는 비단 '옷을 갈아입을 데를 만들어달라'는 의미만은 아닐 것이다. 선수로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대우가 무엇인지 질문한 것이다. 그 어떤 안전장치도 없는 상황에서, 아무나 마구 들어올 수 있는 보조경기장에서 뛰는 것도 모자라 가림막 없는 천막에 사람을 세워놓고 옷을 갈아입게 하는 것이 인도적으로 맞느냐는 물음이다.

'연봉'에 대한 이야기도 언급했다. "WK리그 최고 연봉이 5000만 원으로 10년째 그대로다." 5000만 원이 많아 보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비교해보면 어떨까. 2014년 임금노동자 평균 연봉은 3240만 원이었다. 짜장면 값은 4500원이었다. 2024년인 지금은? 임금노동자 평균 연봉은 4200만 원, 짜장면 값은 7000~8000원 내외다. 물가가 1.5배 오를 동안 여성 프로 축구선수들의 연봉은 계속 동결인 것이다. 심지어 '최고 연봉'이 저 정도라면 나머지 선수들은 어떨까. 생계를 위해 어딘가에서 투잡을 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실업축구인 WK리그의 현실도 무시할 수 없다. 남자 축구에 비해 리그와 팀을 향한 주목도가 떨어지다 보니 TV 중계나 홈 경기 수입 등으로 수익을 내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2022시즌 지소연 선수를 영입한 수원FC위민은 리그 최초로 유료 관중을 받기 시작했는데, 평균적으로 2022년 102명, 2023년 218명 정도에 그쳤다고 한다. 단독 스폰서나 파트너십 문의도 없었다고.

그렇기 때문에 정부와 축구계가 여자 축구의 구조적 어려움을 탈피하기 위해 다방면에서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잔디, 탈의실, 연봉 등의 문제들은 결국 여성 축구를 향한 사회적·제도적 무관심이 결정적 원인일 수 있다.

글로벌 회계회계·컨설팅 업체 딜로이트의 지난 3월 보고서를 보면, WK 리그보다 1년 늦게 시작한 잉글랜드 여자슈퍼리그(WSL)의 경우 상업 스폰서를 유치해 2022~2025년 스폰서십 재계약 시 연봉을 2배 올리는 식으로 선수들의 여건을 개선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 지난 9월 인천남동아시아드에서 열린 디벨론 WK리그 인천현대제철과 서울시청의 경기 중계 화면 ⓒ iTOP21sports


위에서 언급한 인터뷰집에서 지소연 선수는 "나는 누군가가 불가능하다고 할 때마다, 내 앞의 한계를 만날 때마다, 매일 해야 하는 것들을 꾸준히 하며 불가능과 한계를 넘어섰다"고 말했다. 이를 '넘사벽(너무 뛰어나서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사람)'인 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도전으로 보아서는 곤란하다. 이 말은 곧 '지소연은 지소연이니까'라는 한 문장으로 끝나버릴 확률이 크니까.

그보다는 그가 느꼈던 한계가 무엇이었는지 직시하고, 그와 같은 시행착오를 겪지 않도록 그가 걸어간 길을 좀 더 세심하게 닦아주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그의 시행착오를 마중물 삼아 나타나는 제2, 제3의 지소연은 그보다 한 단계 더 높은 한계를 마주할 테고, 결국 이를 깨뜨리는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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