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사고 일으킨 산부인과 의사의 솔깃한 제안
[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딜리버리>
*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산부인과 개원의 '귀남'과 재력가 집안의 딸 '우희'는 세상 부러울 것 없는 부부다. 단 한 가지만 제외하면 말이다. 귀남에겐 장인, 우희에겐 아빠인 '태식'은 후손을 낳지 못하면 유산 상속에서 빼버린다는 소리를 병상에 누워서도 빼먹지 않는다. 부부는 걱정이 태산이다. 설마 하면서도 정말로 당연히 물려받으리라 의심한 적 없는 상속에서 열외가 되면 큰일이다. 뭔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용을 써도 2세는 소식이 없다.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부부가 함께 검진을 받아봤으나 결과는 현재 상태로는 자식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한다. 보통 큰일이 아니다.
전혀 다른 상황에 놓인 커플이 있다. 옛날 '달동네'를 저절로 연상하게 만드는, 도착하려면 마치 등반하듯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을 올라가야만 산비탈 다세대주택에서 셋방살이하는 '미자'와 '달수'다. 미자는 합격할 기약이 없는 공무원시험 준비생이고, 달수는 얼마 전부터 직장도 그만두고 집에 틀어박혀 휴대전화로 게임에만 몰두하는 무직자다. 답이 없는 백수 커플인 셈이다. 오늘도 미자는 생활비를 마련해보려 중고거래를 시도하지만, 상대는 짝퉁으로 의심하며 거래를 거부한다. 한숨 푹 내쉬며 다시 비탈길을 올라간 미자는 게임을 하느라 쓰레기봉투도 내놓지 않은 달수를 한심하게 바라본다. 둘은 당연한 듯 티격태격을 개시한다.
하지만 오늘은 평소와 좀 다른 상황이다. 싸우다 지쳐 넌더리가 난다는 표정을 한 미자는 자신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알린다. 하지만 둘은 전혀 축하할 기분이 아니다. 온통 잡동사니와 쓰레기로 가득한 셋집에서 직장도 없는 둘이 아이를 낳아서 뭘 어쩔 도리가 있냐는 무언의 합의가 이뤄지는 순간이다. 임신은 했는데 아이를 출산할 계획이 없다면? 아이를 지워야 한다. 산부인과에서 어렵게 중절 수술을 시도하지만, 어떻게 된 영문인지 낙태에 실패한 걸 확인한다. 어렵게 마련했을 수술 비용 생각에 분노가 하늘을 찌를 듯 기세로 미자는 달수를 끌고 산부인과로 쳐들어간다.
하필 그 병원은 귀남의 산부인과다. 졸지에 의료사고가 난 셈이니 그는 머리를 쥐어짤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마침 그의 곁에는 아내 우희가 와 있었다. 입양이라도 몰래 해야 할 판이라 대책을 논의하러 온 것이다. 미자의 임신 상황을 들은 우희의 눈빛이 반짝 빛나기 시작한다. 기왕 낙태하려 마음을 먹었다면, 차라리 아이를 낳는 대신에 자신들에게 주면 되지 않냐는 생각이 문득 우희의 머릴 스친다. 생각해 보니 모두를 만족시킬 탁월한 선택 아닌가. 자신의 아이디어에 만족하며 조심스럽게 제안을 던진다. 대신에 출산하기 전까지 매달 생활비와 근사한 주거를 제공하고, 원하는 아이를 얻으면 '성과급'도 주겠다는 조건을 내민다. 네 사람은 계약서에 서명한다.
한국 사회 계급과 세대를 각기 표상하는 등장인물 캐릭터 유형
귀남은 별 볼 일 없는 집안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 의사가 되었다. 이만하면 자수성가의 모범 사례라 할 만한 존재다. 자신의 성취에 뿌듯해할 법도 한데, 그는 여전히 초조하고 주눅이 들어 있다. 아내와 연애해서 결혼에 골인했고, 충분히 성공적인 경력을 쌓아나가는 중이지만, 그는 부유한 처가에 대한 열등감을 여전히 간직한 상태에 마치 연옥에 갇힌 것만 같은 상태다. 게다가 아이를 낳지 못하고 시간만 흘러가자 어디에도 드러내지 못할 속내를 몰래 품고 있기도 하다. 둘 중 누가 불임의 원인인지 진실은 베일에 가려 있다.
우희는 소위 사회적으로 말하는 금수저다. 집에 딸만 둘이다 보니 남자 형제에게 일방적으로 전 재산을 빼앗길 위험은 덜하지만, 언니에게만 다 간다거나 엉뚱하게 아빠가 기부라도 해버리는 건 용납할 수 없다. 태생이 부잣집 딸인지라 막상 노동 같은 건 해볼 리 없이 부유한 배경을 전시하는 '인플루언서'로 스스로 규정하고 소일하는 중이다. 어떻게든 2세를 만들어야 하는데, 입양도 원하는 바대로 얻으려면 1년 넘게 기다릴 판이다. 게다가 아빠는 구세대답게 혈연에 대한 집착이 확고하다.
달수는 요즘 미디어에서 자주 언급하는, 의지는 박약한 데다 미래에 대한 고민 같은 건 1도 엿보이지 않는 청년세대의 전형으로 등장한다. 그의 초반 분량만 본다면, 대체 미자가 그의 뭘 보고 동거하게 된 것인지 영문을 알 수 없을 지경이다. 딱히 그렇게 주저앉은 상태가 된 데에 관한 과거사도 딱히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게으르고 향상심이 부재한 존재일 따름이다. 생각 복잡한 미자 옆에서 귀남과 우희가 제안한 인생역전 기회에 표정 관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한심함이 극한의 짜증을 유발하는 캐릭터에 불과하다. 그러나 계약이 성립되고, 생각이 복잡한 미자를 돌보며 그의 마음 속에 변화가 시작된다.
네 사람의 교차가 <딜리버리>의 핵심 요소이지만, 가장 중요한 건 미자의 심리와 신체 변화일 것이다. 네 배우의 연기력이나 캐릭터 특질이 크게 차이가 보이진 않는데도, 제작진은 유독 미자에게만 혼자만의 순간들을 중요 국면마다 부여한다. 이는 넷 중에서도 핵심이 미자라는 증거다. 정이 생길 여지라곤 눈 씻어봐도 통 찾아볼 수 없던 달수와 미자가 대체 어떻게 만났는지, 어쩌면 미자 역시 공시생 타이틀 걸어놓고 무 대책으로 시간만 흘리다 도피성으로 상대와 만나고, 덜컥 임신해버린 것일지 모를 일이다. 본인이 나중에 독백하듯, 이건 사랑도 뭣도 아니고 그저 욕망과 질투로 점철된 삶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달수가 후반부에 보이는 급격한 변화와 비교해 천천히 하지만 물이 포도주로 본질이 바뀌듯 미자의 시간은 그를 변화시킨다.
여기에 추가될 기능형 캐릭터가 있다. 어쩌면 이 영화의 가장 거대한 실체이자 흑막 그 자체일 존재다. 바로 이 사단을 불러온 원인유발자, 우희의 아빠 '태식'이다. 사실 그의 본명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저 네 사람이 좋든 싫든 감당해야 하는 손바닥 세계관에서 절대자에 해당하는 인물인 것이다. 귀남이 늘 눈치를 보게 만드는 거대한 부를 움켜쥔 채, 생사여탈 권한을 쥔 것처럼 가족 위에서 군림하는 절대자이자,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 속에서 자식들을 경쟁시키지만, 결국엔 자기 핏줄에게 부를 세습하려는 재벌그룹 회장과 태식은 한 몸과도 같다. 넷이 서로 물고 물리게 만드는 부를 둘러싼 동상이몽은 결국 그가 불씨를 당기고 기름까지 부은 결과인 것이다.
인간의 물신화-상품화를 극명하게 구현한 묵시록적 설정
영화는 저출산 시대에 대한 진단, 여전히 강고한 핏줄에 대한 집착, 노력이 무의미해지고 일확천금 결과만 바라보는 세태, 기득권층의 도덕적 해이, 여기에 입양과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시선, 그리고 비인간화-물신화가 굳어지는 일상의 조명까지 무척이나 다양한 요소를 결합하려 욕심을 드러낸다. 어떤 부분은 혼합되어 부가 효과를 창출하지만, 다른 조각은 설익거나 겉돌기도 한다. 감독의 첫 번째 장편영화는 대개 그러한 법이다.
제목이 왜 '딜리버리(배달)'인 걸까? 영화 속에서 단서가 제시된다. 내일이 없는 나날을 보내던 미자와 달수 커플은 어떻게든 뱃속 아이를 '자본'으로 삼아 새로운 출발을 다짐한다. 이제 사람답게 살아보자며, 미자는 달수에게 당장 나가서 돈 벌어오라고 내쫓는다. 물론 귀남과 우희 부부가 원조해준 덕분에 당장 생활이 막막할 리 없다. 그런데도 닦달에 못 이긴 채, 본인 역시 재기하고자 얻은 일자리는 택배 관련 업무다. 과거 IMF 구제금융 당시 실직한 회사원들이 건설노동자로 마지막 재기를 꿈꾸듯 지금은 쿠팡으로 상징되는 온라인 상품배달이 그 자리를 채운 것이다.
그런 미자의 속마음은 아마 영화 속 가장 인상적인 단어, '보증금'으로 함축된다. 둘이 동거하던 산동네 셋집 보증금도 미자가 냈고, 그들에게 희망이 된 근사한 아파트도 미자가 품은 아기 덕이란 것이다. 이때까진 미자도 아이에 대한 애착 따위 없이 그저 자본 혹은 상품으로 간주하던 셈이다. 아이는 그저 자신들에게서 부잣집으로 배송될 '상품'에 불과했다. 이 인식이 변하면서 둘에겐 지옥이 닥치지만, 그들을 구원하는 것 역시 그 때문이다.
민감한 사회적 주제를 차별성 있게 담기 위해 제작진은 코미디 정서를 전폭적으로 활용하려 시도한다. 하지만 점점 더 소재가 가진 무게감 탓에 이야기는 블랙 유머가 탈각되고 우연적인 발단에서 촉발되는 사건과 심리 드라마로 기울어진다. 전개상으로는 당연한 귀결이다. 초중반까지 이어지는 사회풍자와 슬랩스틱이 결부된 유머 코드가 그렇게 잘 녹아들진 않았기에 더 그렇다. 하지만 민감한 분위기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종종 툭 끊어지는 느낌이 드는 건 사실이다.
일말의 아쉬움, 그리고 영화가 놓인 자리에 대한 단상
원인은 대충 이렇다. 화면 밖의 실제 사회상이 거의 고스란히 영화 속에 투영되는 방식이기 때문일 테다. 코미디가 웬만큼 절묘하게 치고 빠지지 않고는, 오히려 직설적인 사실주의보다 몇 곱은 더 높은 정밀도가 요구되게 마련이다. 품이 여간 들어가지 않는다. 게다가 기조가 변경되는 과정에서 연착륙도 신경을 써야 한다. 그런 고비를 영화는 종종 인물들, 특히 미자의 화면 밖을 응시하는 표정으로 넘기려 한다. 이제 아이돌 출신이란 꼬리표는 떼어내도 무방한 배우 권소현의 연기에 의지하는 셈이다. 크게 어긋나진 않은 선택이다.
하지만 나머지 배우들, 특히 정평이 난 김영민과 우희 역의 '큰 소현'이라 현장에서 불렸다는) 또 다른 권소현의 연기력은 좀 더 보여줬어도 될 법했다. 원래 기득권 집단, 악역 캐릭터의 복잡한 내면이 깊숙이 묘사되어야 극적 밀도가 높아지게 마련인데 반면에 달수의 캐릭터 변화는 다소 끼워 맞춘 형태에 가깝다. 그런 부분에 관해 연출상 아쉬움이 남는다.
임상수 감독이 리메이크한 <하녀>에서 부잣집 사모님에겐 자식이 곧 부와 권력의 세습 수단이다. 그는 아이를 많이 낳고 싶다며 키울 여력 되는데 왜 안 낳냐 말한다. 하지만 절대적 다수 사회 구성원에게 이는 적용되지 않는다. 불과 10년 사이에 영화 속 대사는 모두가 절감하는 지배적 현상이 되고야 말았다. <딜리버리> 역시 그 자장 아래 놓인 작업일 것이다.
<작품정보>
딜리버리
Delivery
2023|한국|코미디
2024.11.20. 개봉|101분|15세 관람가
감독/각본 장민준
출연 김영민, 권소현, 권소현, 강태우, 동방우 외
제작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배급 ㈜마노엔터테인먼트
▲ "딜리버리"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 ⓒ ㈜마노엔터테인먼트
산부인과 개원의 '귀남'과 재력가 집안의 딸 '우희'는 세상 부러울 것 없는 부부다. 단 한 가지만 제외하면 말이다. 귀남에겐 장인, 우희에겐 아빠인 '태식'은 후손을 낳지 못하면 유산 상속에서 빼버린다는 소리를 병상에 누워서도 빼먹지 않는다. 부부는 걱정이 태산이다. 설마 하면서도 정말로 당연히 물려받으리라 의심한 적 없는 상속에서 열외가 되면 큰일이다. 뭔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용을 써도 2세는 소식이 없다.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부부가 함께 검진을 받아봤으나 결과는 현재 상태로는 자식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한다. 보통 큰일이 아니다.
하지만 오늘은 평소와 좀 다른 상황이다. 싸우다 지쳐 넌더리가 난다는 표정을 한 미자는 자신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알린다. 하지만 둘은 전혀 축하할 기분이 아니다. 온통 잡동사니와 쓰레기로 가득한 셋집에서 직장도 없는 둘이 아이를 낳아서 뭘 어쩔 도리가 있냐는 무언의 합의가 이뤄지는 순간이다. 임신은 했는데 아이를 출산할 계획이 없다면? 아이를 지워야 한다. 산부인과에서 어렵게 중절 수술을 시도하지만, 어떻게 된 영문인지 낙태에 실패한 걸 확인한다. 어렵게 마련했을 수술 비용 생각에 분노가 하늘을 찌를 듯 기세로 미자는 달수를 끌고 산부인과로 쳐들어간다.
하필 그 병원은 귀남의 산부인과다. 졸지에 의료사고가 난 셈이니 그는 머리를 쥐어짤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마침 그의 곁에는 아내 우희가 와 있었다. 입양이라도 몰래 해야 할 판이라 대책을 논의하러 온 것이다. 미자의 임신 상황을 들은 우희의 눈빛이 반짝 빛나기 시작한다. 기왕 낙태하려 마음을 먹었다면, 차라리 아이를 낳는 대신에 자신들에게 주면 되지 않냐는 생각이 문득 우희의 머릴 스친다. 생각해 보니 모두를 만족시킬 탁월한 선택 아닌가. 자신의 아이디어에 만족하며 조심스럽게 제안을 던진다. 대신에 출산하기 전까지 매달 생활비와 근사한 주거를 제공하고, 원하는 아이를 얻으면 '성과급'도 주겠다는 조건을 내민다. 네 사람은 계약서에 서명한다.
한국 사회 계급과 세대를 각기 표상하는 등장인물 캐릭터 유형
▲ "딜리버리"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 ⓒ ㈜마노엔터테인먼트
귀남은 별 볼 일 없는 집안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 의사가 되었다. 이만하면 자수성가의 모범 사례라 할 만한 존재다. 자신의 성취에 뿌듯해할 법도 한데, 그는 여전히 초조하고 주눅이 들어 있다. 아내와 연애해서 결혼에 골인했고, 충분히 성공적인 경력을 쌓아나가는 중이지만, 그는 부유한 처가에 대한 열등감을 여전히 간직한 상태에 마치 연옥에 갇힌 것만 같은 상태다. 게다가 아이를 낳지 못하고 시간만 흘러가자 어디에도 드러내지 못할 속내를 몰래 품고 있기도 하다. 둘 중 누가 불임의 원인인지 진실은 베일에 가려 있다.
우희는 소위 사회적으로 말하는 금수저다. 집에 딸만 둘이다 보니 남자 형제에게 일방적으로 전 재산을 빼앗길 위험은 덜하지만, 언니에게만 다 간다거나 엉뚱하게 아빠가 기부라도 해버리는 건 용납할 수 없다. 태생이 부잣집 딸인지라 막상 노동 같은 건 해볼 리 없이 부유한 배경을 전시하는 '인플루언서'로 스스로 규정하고 소일하는 중이다. 어떻게든 2세를 만들어야 하는데, 입양도 원하는 바대로 얻으려면 1년 넘게 기다릴 판이다. 게다가 아빠는 구세대답게 혈연에 대한 집착이 확고하다.
달수는 요즘 미디어에서 자주 언급하는, 의지는 박약한 데다 미래에 대한 고민 같은 건 1도 엿보이지 않는 청년세대의 전형으로 등장한다. 그의 초반 분량만 본다면, 대체 미자가 그의 뭘 보고 동거하게 된 것인지 영문을 알 수 없을 지경이다. 딱히 그렇게 주저앉은 상태가 된 데에 관한 과거사도 딱히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게으르고 향상심이 부재한 존재일 따름이다. 생각 복잡한 미자 옆에서 귀남과 우희가 제안한 인생역전 기회에 표정 관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한심함이 극한의 짜증을 유발하는 캐릭터에 불과하다. 그러나 계약이 성립되고, 생각이 복잡한 미자를 돌보며 그의 마음 속에 변화가 시작된다.
네 사람의 교차가 <딜리버리>의 핵심 요소이지만, 가장 중요한 건 미자의 심리와 신체 변화일 것이다. 네 배우의 연기력이나 캐릭터 특질이 크게 차이가 보이진 않는데도, 제작진은 유독 미자에게만 혼자만의 순간들을 중요 국면마다 부여한다. 이는 넷 중에서도 핵심이 미자라는 증거다. 정이 생길 여지라곤 눈 씻어봐도 통 찾아볼 수 없던 달수와 미자가 대체 어떻게 만났는지, 어쩌면 미자 역시 공시생 타이틀 걸어놓고 무 대책으로 시간만 흘리다 도피성으로 상대와 만나고, 덜컥 임신해버린 것일지 모를 일이다. 본인이 나중에 독백하듯, 이건 사랑도 뭣도 아니고 그저 욕망과 질투로 점철된 삶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달수가 후반부에 보이는 급격한 변화와 비교해 천천히 하지만 물이 포도주로 본질이 바뀌듯 미자의 시간은 그를 변화시킨다.
여기에 추가될 기능형 캐릭터가 있다. 어쩌면 이 영화의 가장 거대한 실체이자 흑막 그 자체일 존재다. 바로 이 사단을 불러온 원인유발자, 우희의 아빠 '태식'이다. 사실 그의 본명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저 네 사람이 좋든 싫든 감당해야 하는 손바닥 세계관에서 절대자에 해당하는 인물인 것이다. 귀남이 늘 눈치를 보게 만드는 거대한 부를 움켜쥔 채, 생사여탈 권한을 쥔 것처럼 가족 위에서 군림하는 절대자이자,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 속에서 자식들을 경쟁시키지만, 결국엔 자기 핏줄에게 부를 세습하려는 재벌그룹 회장과 태식은 한 몸과도 같다. 넷이 서로 물고 물리게 만드는 부를 둘러싼 동상이몽은 결국 그가 불씨를 당기고 기름까지 부은 결과인 것이다.
인간의 물신화-상품화를 극명하게 구현한 묵시록적 설정
▲ "딜리버리"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 ⓒ ㈜마노엔터테인먼트
영화는 저출산 시대에 대한 진단, 여전히 강고한 핏줄에 대한 집착, 노력이 무의미해지고 일확천금 결과만 바라보는 세태, 기득권층의 도덕적 해이, 여기에 입양과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시선, 그리고 비인간화-물신화가 굳어지는 일상의 조명까지 무척이나 다양한 요소를 결합하려 욕심을 드러낸다. 어떤 부분은 혼합되어 부가 효과를 창출하지만, 다른 조각은 설익거나 겉돌기도 한다. 감독의 첫 번째 장편영화는 대개 그러한 법이다.
제목이 왜 '딜리버리(배달)'인 걸까? 영화 속에서 단서가 제시된다. 내일이 없는 나날을 보내던 미자와 달수 커플은 어떻게든 뱃속 아이를 '자본'으로 삼아 새로운 출발을 다짐한다. 이제 사람답게 살아보자며, 미자는 달수에게 당장 나가서 돈 벌어오라고 내쫓는다. 물론 귀남과 우희 부부가 원조해준 덕분에 당장 생활이 막막할 리 없다. 그런데도 닦달에 못 이긴 채, 본인 역시 재기하고자 얻은 일자리는 택배 관련 업무다. 과거 IMF 구제금융 당시 실직한 회사원들이 건설노동자로 마지막 재기를 꿈꾸듯 지금은 쿠팡으로 상징되는 온라인 상품배달이 그 자리를 채운 것이다.
그런 미자의 속마음은 아마 영화 속 가장 인상적인 단어, '보증금'으로 함축된다. 둘이 동거하던 산동네 셋집 보증금도 미자가 냈고, 그들에게 희망이 된 근사한 아파트도 미자가 품은 아기 덕이란 것이다. 이때까진 미자도 아이에 대한 애착 따위 없이 그저 자본 혹은 상품으로 간주하던 셈이다. 아이는 그저 자신들에게서 부잣집으로 배송될 '상품'에 불과했다. 이 인식이 변하면서 둘에겐 지옥이 닥치지만, 그들을 구원하는 것 역시 그 때문이다.
민감한 사회적 주제를 차별성 있게 담기 위해 제작진은 코미디 정서를 전폭적으로 활용하려 시도한다. 하지만 점점 더 소재가 가진 무게감 탓에 이야기는 블랙 유머가 탈각되고 우연적인 발단에서 촉발되는 사건과 심리 드라마로 기울어진다. 전개상으로는 당연한 귀결이다. 초중반까지 이어지는 사회풍자와 슬랩스틱이 결부된 유머 코드가 그렇게 잘 녹아들진 않았기에 더 그렇다. 하지만 민감한 분위기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종종 툭 끊어지는 느낌이 드는 건 사실이다.
일말의 아쉬움, 그리고 영화가 놓인 자리에 대한 단상
▲ "딜리버리"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 ⓒ ㈜마노엔터테인먼트
원인은 대충 이렇다. 화면 밖의 실제 사회상이 거의 고스란히 영화 속에 투영되는 방식이기 때문일 테다. 코미디가 웬만큼 절묘하게 치고 빠지지 않고는, 오히려 직설적인 사실주의보다 몇 곱은 더 높은 정밀도가 요구되게 마련이다. 품이 여간 들어가지 않는다. 게다가 기조가 변경되는 과정에서 연착륙도 신경을 써야 한다. 그런 고비를 영화는 종종 인물들, 특히 미자의 화면 밖을 응시하는 표정으로 넘기려 한다. 이제 아이돌 출신이란 꼬리표는 떼어내도 무방한 배우 권소현의 연기에 의지하는 셈이다. 크게 어긋나진 않은 선택이다.
하지만 나머지 배우들, 특히 정평이 난 김영민과 우희 역의 '큰 소현'이라 현장에서 불렸다는) 또 다른 권소현의 연기력은 좀 더 보여줬어도 될 법했다. 원래 기득권 집단, 악역 캐릭터의 복잡한 내면이 깊숙이 묘사되어야 극적 밀도가 높아지게 마련인데 반면에 달수의 캐릭터 변화는 다소 끼워 맞춘 형태에 가깝다. 그런 부분에 관해 연출상 아쉬움이 남는다.
임상수 감독이 리메이크한 <하녀>에서 부잣집 사모님에겐 자식이 곧 부와 권력의 세습 수단이다. 그는 아이를 많이 낳고 싶다며 키울 여력 되는데 왜 안 낳냐 말한다. 하지만 절대적 다수 사회 구성원에게 이는 적용되지 않는다. 불과 10년 사이에 영화 속 대사는 모두가 절감하는 지배적 현상이 되고야 말았다. <딜리버리> 역시 그 자장 아래 놓인 작업일 것이다.
<작품정보>
딜리버리
Delivery
2023|한국|코미디
2024.11.20. 개봉|101분|15세 관람가
감독/각본 장민준
출연 김영민, 권소현, 권소현, 강태우, 동방우 외
제작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배급 ㈜마노엔터테인먼트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