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농사 마쳐도 기분이 좋지 않아", 늙은 농부의 한숨
[쌀, 밥, 삶①] 한해 결실 거두는 날... 청산농협 공공비축미곡 수매 현장
또 '쌀'을 말합니다. 풍요의 상징인 가을의 누런 들판에서 한숨 내쉬는 농민들을 알기에, 감당하기 벅찬 이야기를 전합니다. "밥 한 공기 300원 보장"이란 농민의 요구는 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관철되지 않았습니다. 더 많은 기사는 <월간 옥이네> 11월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기자말]
▲ 누렇게 익은 벼. ⓒ 월간 옥이네
벼가 노랗게 익어 물결치는 풍경은 풍요로움의 상징이다. 유난히 뜨겁고 길었던 지난 여름을 보내며, 흘린 땀방울만큼의 결실을 수확하리라는 기대가 일었다. 그러나 기후위기는 황금빛 논 위를 무참히 덮쳤다. 때아닌 장마와 병충해로 1년의 수고로움을 자축하며 즐겨야 했을 황금빛 들판에 커다란 구멍이 났다.
예상치 못한 흉작에 가격 폭락까지 더해져 농민들의 마음에도 구멍이 숭숭 뚫렸다. 그러나 참담한 현실에도 농민들은 제때 할 일을 마치기 위해 부지런히 몸을 움직인다. 지난 10월 18일, 바쁜 농민들의 발걸음을 쫓아 충북 옥천군 청산농협 미곡종합처리장(DSC)을 찾았다.
▲ 충북 옥천 청산농협의 공공비축 벼. ⓒ 월간 옥이네
청산농협 미곡종합처리장에서는 오전부터 산물벼 수매 작업이 한창이다. 800kg 톤백 자루가 2개씩 실린 트럭이 창고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할 일은 접수표를 작성하고 쌀 등급을 판정하는 일. 농산물 품질조사원이 쌀 등급을 결정하는 사이 지게차가 트럭에 실린 톤백 자루를 하나씩 옮겨 놓는다. 물량이 많지 않은 날은 내리자마자 불순물을 제거하고 건조 작업에 들어가는데, 이날은 비 예보에 일찍부터 물량이 몰렸다.
"제일 먼저 농민들이 가져온 쌀을 모아 네 번에 걸친 불순물 제거 작업을 해요. 이때 무게랑 수분량을 확인하고요. 그리고 나선 '사이로'라고 부르는 저장고에 뒀다가 건조 후 다시 톤백에 담아 저장합니다. 빠르면 12월에서 1월 중, 늦으면 3월까지 출하 일정이 잡히는데, 그전까진 창고에 보관해 두죠." (청산농협 송정호 계장)
올해 청산농협의 예상 쌀 수매량은 1300톤가량. 청산농협 김홍표 상무는 "옥천군과 정부에서 할당하는 매입량과 별개로 농민들이 가져오는 쌀은 전부 수매해 남은 수량은 자체 판매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10월 중 이뤄지는 산물벼 매입이 끝나면 11월 말부터는 건조벼 매입이 이뤄질 예정이다.
오후에 한바탕 비가 쏟아질 거란 일기예보가 맞을 작정인지 벌써 하늘에 회색빛 구름이 빽빽한데, 미곡종합처리장은 줄지어 들어오는 트럭 행렬로 활기가 돈다. 톤백 자루를 내려놓고 잠시 숨 돌리는 틈을 타 청산, 청성의 농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병충해가 올 거라고 생각을 못 했지"
▲ 충북 옥천 청산면 덕지리 설용석씨. ⓒ 월간 옥이네
20대부터 청산면 덕지리에서 크게 인삼 농사를 짓던 설용석(93)씨는 6년 전 건강 문제로 넓은 땅을 정리했다. 일부 남겨둔 땅을 다른 이에게 맡겼다가 돌려받은 게 지난해 겨울. 아흔이 넘은 나이지만, 노는 땅을 두고 보지 못한 그는 인삼을 심었던 땅에 모를 조금 심었다. 지난 14일, 가족들과 나눠 먹을 양을 제외한 쌀 1200kg가량을 수매로 내놨다. 이날은 톤백을 회수하러 왔단다.
"난 나흘 전에 왔다 갔지. 오늘도 비 소식이 있던데, 그날도 오후에 비가 온대서 비 오기 전에 얼른 수확해 왔었지. 비 오거나 안개가 짙은 날엔 수확하기가 영 안 좋거든. 톤백 가지러왔는데 우리 마을 톤백은 누가 싹 가져갔다네? 마을회관에 가보면 내 것도 있겠지."
농사란 능숙한 농부의 힘으로만 지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때를 맞춰 벼의 성장을 돕는 날씨와의 협업이 필수. 그러나 이제 일상에서까지 체감되는 기후위기가 이 긴밀한 협업을 위협한 지 오래다.
올해는 태풍 피해가 크지 않아 다들 안심하고 있던 여름 끝물에 쏟아진 비가 악수였다. 벼 키가 웃자라 힘을 받지 못하고 쓰러지고(도복), 그렇게 넘어진 알곡이 비를 맞아 싹이 트는 수발아 현상까지. 유난히 뜨거운 이번 여름 탓인지, 지난 겨울이 겨울답지 않게 따뜻했던 탓인지, 벼멸구와 깨씨무늬병, 흰잎마름병까지 찾아오며 벼 농가엔 비상이 걸렸다.
"올해 날도 가물고, 태풍도 크게 안 왔잖아. 그러니 뒤늦게 병충해가 올 거라고 생각을 못 했지. 다들 제때 약을 못 쳐서 피해를 많이 봤어."
"생산비는 다 오르는데, 쌀값은 오를 생각을 안 해"
▲ 충북 옥천 청산면 만원리 김용수씨. ⓒ 월간 옥이네
청산면 만월리 김용수(73)씨는 26살부터 쭉 농사를 지어왔다. "일꾼도 몇 명씩 뒀을 정도"로 크게 농사를 지었던 그는 여전히 드넓은 논밭을 일군다. 벼를 심어둔 논만 해도 8000평에 달하니 "오늘 내내 벼를 떨어 가져다 두기 바쁠 것"이라고.
"이미 톤백 4개 가져다 뒀어. 방금 가져온 것까지 하면 6개. 아직 논에서 계속 수확 중이라 이것만 내려놓고 다시 다녀올 거야. 비 오기 전에 다 할 수 있으면 오늘 마무리하려고. 몇 개 더 가져올진 떨어봐야 아는데, 8000평 중에 1000평 정도는 가족이랑 지인들한테 보내고, 나머지는 다 여기로 가져오지."
김용수씨 논은 다행히 병충해 피해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비에 도복 피해를 봤다.
"올해 비가 안 오더니 또 한참 쏟아져서 벼 키가 너무 컸어. 그 상태로 비가 또 내리니 픽픽 쓰러졌지. 주변에선 잎마름병으로 난리인데, 우리 논은 약을 꼼꼼히 쳐놔서 그런지 피해가 크진 않았어. 그래도 전년만치 (수확량이) 안 나와. 체감상 20~30%는 줄었어."
매년 재해로 인한 피해가 커지는 상황이지만, 김용수씨는 7년 전부터 농작물재해보험에 가입하지 않고 있다. "재해 피해를 인정받기가 어렵고, 인정받더라도 자부담 비율이 커 실질적인 도움으로 느껴지지 않았다"는 게 그 이유. 이에 김용수씨는 오롯이 그 부담을 지고 있다.
그의 요즘 고민은 '일손'이다. "농사를 처음 짓던 해만 해도 여자는 하루 1000원, 남자는 2000원"이었다는데, 이젠 여성 인력은 11만 원, 남성 인력은 13만 원이 기본이란다. 인건비에 비료, 농기계 값까지 생산비는 늘어만 가는데, 쌀값은 오를 기미가 없으니 농사짓는 재미도 뚝뚝 떨어진다.
"농민들은 나이 들어가는데, 인건비는 오르니 농사짓기가 점점 힘들지. 농어촌공사에서 쌀 생산량 많아 쌀값이 떨어진다고 쌀을 못 심게 해. 쌀 말고 콩 같은 거 심으라고 하는데, 콩이 벼랑 비교해 보면 일이 더 많아. 그러니 선뜻 작물 변경할 수가 있나. 우리 마을에도 1200평짜리 논이 아무것도 안 심긴 채로 그대로 있잖아. 그리고 콩도 가격 안정 안 되긴 쌀이랑 다를 게 없어."
"농민 정치인 더 많아지길"
▲ 충북 옥천 청성면 최진중씨. ⓒ 월간 옥이네
청성면 궁촌리 최진중(71)씨는 이날 오전 8시부터 전날 작업한 톤백 6자루를 옮겨뒀다. 비가 온대서 일찍 작업을 시작했는데, 아직 2000평 넘게 작업이 남아 마음이 바쁘다.
"올해 작황이 안 좋아. 9월에 햇빛이 좋으려나 싶었는데 해가 너무 강해서 벼가 안 여물고 말랐더라고. 그거뿐이야? 벼멸구, 깨씨무늬병 피해도 있어서 수확량이 10%나 떨어졌어. 벼농사를 15년 넘게 했는데, 갈수록 상황이 안 좋아져."
지난해 수확기 평균 산지 쌀값이 80kg당 20만2797원을 기록했던 데 비해 올해는 18만4848원(10월 15일 기준)에 머무르고 있으니 그 속이 더 답답하다.
"1년 농사에 드는 비용은 매년 오르는데 쌀값은 떨어지기만 하니 한숨만 나오지. 트랙터, 콤바인 기름값이며, 모판, 비룟값 다 올랐지. 작년까진 제초제를 1만 원에 샀는데, 올해부턴 1만1000원이더라고. 날씨도 안 도와줘, 정부도 안 도와줘. 이러니 1년 농사 마쳤는데도 기분이 좋지가 않아."
최진중씨가 바라는 건 "농민 입장에서 말해줄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다.
"쌀값 떨어질 때 도움을 받던 변동직불제가 갑자기 없어졌잖아. 농업인 안전보험, 농업재해보험 같은 걸 들어놔도 크게 도움 되는지도 모르겠어. 게다가 이런 보험도 개인적으로 알아서 들어야 해."
변동직불제는 쌀값이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질 때 차액의 85%를 지원하는 제도로 2020년 폐지됐다. 이후 쌀 자급률이 떨어질 것을 우려해 시장격리제도가 법제화되고, 공익직불제가 도입됐으나 농민 입장에선 체감되는 효용이 크지 않다는 평이다.
"농가지원정책이 자꾸 바뀌니까 그 피해를 다 농민들이 지는 거야. 그 변화도 농가에 보탬이 되는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그 반대로 가고 있는 것 같아. 농민 입장에서 말해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더 그래. 이 마음을 푸념할 곳도 없고, 그저 지켜만 봐야 한다는 게 속상하지. 정말 농민에게 도움이 되는 정책이 생기려면 농민 국회의원이 더 많아져야 해."
쌀값 안정은 누구의 몫일까
▲ 공공비축 벼. ⓒ 월간 옥이네
'밥 한 공기 쌀값 300원'은 2018년 농민들이 쌀 목표가격 인상을 요구하며 외친 구호다. 이를 한 가마(80kg)로 환산하면 약 24만 원이지만, 결국 정부의 쌀 목표가격은 20만 원으로 결정됐다. 그러나 올해 산지 쌀값은 18만 원 선에 머물며, 목표 쌀값마저 지켜지지 않고 있다.
쌀 목표가격인 20만 원을 지켜내라는 농민들의 목소리에 농림축산식품부는 10월 15일 쌀 9만5000톤을 추가 격리하기로 결정했다. 이어 10월 28일에는 벼멸구·호우 등으로 피해를 본 벼를 전량수매 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결정이 쌀값 정상화에 유의미한 영향을 줄지 확인되지 않은 가운데, 공공비축미 매입 현장을 찾은 농민들은 "올해 산지 쌀값 추이를 보니 12월 말 발표될 공공비축미 매입 가격을 기대하긴 어려워 보인다"는 반응이다. 공공비축미 매입을 진행하는 농협은 매입 직후 농민들에게 20kg당 4만 원을 우선 지급, 차액은 연말에 지급할 예정이다.
농업농민정책연구소 녀름은 최근 15년간 세 차례에 걸쳐 발생한 쌀값 폭락 사태(2009~2010년, 2015~2017년, 2021~2022년)의 원인으로 예측할 수 있었던 쌀 생산량 증대와 소비량 감소에 대응하지 못한 정부의 안일한 대처를 지적했다. 더불어 "기후위기와 식량위기의 시대에 농업부문의 공공정책 강화가 아닌 시장에 맡기는 방식을 고수하는 한 쌀값 폭락은 또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녀름 이슈보고서 348호). "쌀값 문제는 단순히 쌀 생산 과잉이 문제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 방침은 논에 벼가 아닌 일반 작물 재배하는 경우 지원금을 지급하는 등 쌀 생산을 억제하는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는 쌀값 하락 요인을 '과잉 생산'으로만 전제한 결과다. 동시에 국내 쌀 생산량의 10%(40만8700톤)를 넘어서는 쌀을 수입하고 있는 정부의 행태는 이해하기 어렵다.
▲ 공공비축 벼. ⓒ 월간 옥이네
농림축산식품부는 지난 9월 21일 "쌀 수입은 WTO 관세화 개방으로 인해 부과된 의무이며, 대부분은 가공용으로 사용돼 밥쌀용 쌀시장에서 차지하는 물량은 미미한 수준"이기에 "쌀 수입이 공급과잉의 원인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낮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즉석밥, 막걸리 등 가공쌀 소비가 증가하는 현상과 늘어가는 공공비축미 재고를 사료용으로 소진하겠다는 정부 대책 앞에서 수입쌀이 국내 쌀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음은 명확해 보인다.
주교종 옥천살림협동조합 상임이사는 "적정 수준의 쌀값 책정도 과제지만, 대농이 아닌 일반 소규모 농가에서는 현재 목표 쌀값으로도 생활 영위가 쉽지 않은 현실"이라며 "쌀값 문제는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공적 차원에서 장기적인 관점으로 풀어갈 문제"라고 지적한다.
"쌀값 하락은 한두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기에 개인과 지자체의 노력만으론 현 상황을 바꾼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만, 농가를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가능한 행동들을 이어간다면 장기적으로 쌀값 하락을 해결할 밑바탕을 마련할 수는 있을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
그의 제안은 로컬푸드 확산과 함께 그간 건강한 지역농산물을 더 많은 지역 주민이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온 지역 농민 운동의 핵심을 담고 있기도 하다.
"옥천군 내에서 옥천쌀을 소비할 수 있는 기반 마련부터 시작할 수 있겠죠. 특히, 지역 사회복지기관에서 계약 방식 문제로 옥천쌀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데, 옥천군에서 적극적으로 나서 대안을 마련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역 식당에서 옥천쌀 구매 시 산지 쌀값 차액 또는 일부 인센티브를 지원하는 방법도 있고요. 지자체 차원에서 더욱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 쌀값 안정은 누구의 몫일까. ⓒ 월간 옥이네
옥천군은 2022년 '식량산업종합계획(2023~2027)'을 발표, 2024년까지 ▲농가조직계약재배 기반 마련 ▲지역 내 소비 전략 수립 ▲분질미 관련 시설 투자를 달성하겠다는 미곡 분야 달성 계획을 수립한 바 있다.
옥천군농업기술센터 농업정책과 조도연 과장은 "옥천쌀 소비 확대를 위해 직거래 판로 모색해 연결하는 군 차원의 노력을 전개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2024년 올해 옥천군은 ▲부산 동래구청(360kg) ▲한국외식업중앙회 제주시지부(184t)를 통해 지역 쌀 소비 판로를 확대했다.
기존에 옥천 쌀을 정기적으로 구매해오던 ▲하나님의 교회 고앤컴연수원(27.2t) 역시 올해 쌀 직거래를 진행했다. 더불어 옥천군은 지난 5월 개소한 옥천군공공급식센터가 옥천성모병원, 옥천군장애인보호작업장, 옥천군립치매전담요양원과 업무협약을 맺는 등 지역 기관의 지역 농산물 소비를 확대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한편, 2024년 옥천군 벼 수매량은 3929톤(산물벼 126톤, 건조벼 2913톤, 친환경벼 890톤)으로 집계됐다. 이는 올 한 해 옥천군 생산 벼 총량(6774톤)의 58%에 해당한다. 옥천군은 올해의 경우 지난해보다 친환경 벼 수매량을 대폭 늘렸다고 밝혔다. ㄱ김민석 옥천군농업기술센터 농업정책과 원예유통팀장은 "지난해 친환경 벼 수매량(187톤)이 농가 수요의 20%에 그쳤던 것과 달리 올해는 친환경 벼라면 100% 수매했다"며 "최종 수매 실적은 지난해(약 3천767톤)보다 4%가량 상승했다"고 설명했다.
월간옥이네 통권 89호(2024년 11월호)
글 이혜빈 사진 이혜빈‧김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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