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청자와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진 사찰
강진의 도조사... 무명 도공들을 모신 사당도 있어
사찰에 부처가 아닌 무명 도공들을 모신 사당이 있다. 도공들을 모신 사당이라 하여 이름도 도조사(陶祖祀)이다. 이 도조사는 어떻게 하여 사찰에 지어진 것일까? 도조사는 남녁 땅 바다와 가까운 강진의 정수사에 있는 사당이다. 사찰에 부처가 아닌 도공을 모신 사당이 있다는 것이 약간 의외다.
강진의 천태산 자락 아래에 고즈넉이 자리하고 하고 있는 정수사로 가는 길은 단풍든 가을 풍경이 완연하다. 청자 생산지로 유명한 대구면 고려청자박물관에서 수확을 마친 빈 들판과 계곡을 약 6km가량 오르다 보면 정수사(淨水寺)가 나타난다. 뜻을 풀이해 보면 물이 맑은 절이다. 정결함이라는 종교적 의미가 느껴진다.
정수사는 산세가 아주 크지 않은 천태산(549m)의 계곡을 끼고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다. 그리 유명하지 않아서인지 찾는 이들의 발길도 뜸하다.
정수사의 여러 전각 속에서 동쪽 한 켠에 도조사가 자리하고 있다. 도조사는 무명 도공들의 장인정신과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이를 상징하듯 청자로 만들어진 조형물이 사당 앞 마당에 세워져 있다. 도조사의 외벽에는 도공들이 도자기를 굽기 위해 기원하고 굽는 과정들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
정수사는 805년(애장왕 6년)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사찰이다. 오랜 역사를 말해주듯 정수사에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대웅전과 나한전, 산문 등이 있다. 오랜 세월에 퇴락해서인지 대웅전은 해체보수하고 있다.
정수사 산문 밖은 임진왜란의 격전지로도 알려져 있다. 정수사 입구에는 임진왜란시 승리를 이끈 염걸 장군의 전승비가 세워져 있다. 염걸 장군은 1545년(인종1년) 칠량면 율변에서 출생하였는데 기마와 궁술에 출중하였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년) 왜군이 청자 도료를 차지하려고 구강포와 정수사 사이로 쳐들어오자 두 아우 서와 경, 외아들 홍립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섬멸했다고 한다. 염걸 장군은 이순신 장군과 함께 부산 몰운대 전투에 참가하기도 한다.
염걸 장군은 적선이 구강포에 쳐들어오자 수백개의 허수아비를 바닷가에 세우고 의병들이 후퇴하는 척 위장전술을 펼쳐 정수사 골짜기에 매복해 있다가 유인된 적 수 천명을 소탕하였다고 한다.
왜군이 강진만을 경유해 이곳으로 들어온 것은 고려청자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도자기의 도료를 확보하기 위해 청자 산지로 유명한 이곳에 쳐들어 온 것이다.
정수사는 청자 전성기에 강진 고려청자와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진 사찰이다. 도공들은 작품을 구상하거나 가마에 불을 지필 때면 이곳에 찾아와 기도하고 참선으로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였다. 도공들이 정신적 수양을 갈고 닦아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신비의 고려청자를 만들 수 있도록 기도를 올리던 정신적 귀의처 역할을 한 것이다.
우리나라 10대 축제에 오른 강진청자축제가 시작되면 맨 먼저 이곳에서 당시 도공들의 넋을 위로하는 제사를 올린다. 이들의 혼이 오늘날 강진 청자의 맥을 잇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명 도공에 대한 추모제가 열리면 한평생 도공의 삶을 살다간 이들의 넋을 위로하는 천혼문이 읊어진다.
정수사는 천년 역사를 잇게 한 고려 도공들의 참선과 정신적 귀의처 역할이 되어 준 사찰이라고 할 수 있다.
강진의 고려청자
강진은 고려청자의 생산지로 유명하다. 그 고려청자가 생산되었던 곳이 대구면 일대다. 대구면 일대는 12, 13세기 무렵 고려청자가 최고의 기술로 절정을 이루며 생산되던 곳이다. 고려는 당시 중국 다음으로 첨단 제품인 최고의 청자를 만들고 있었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청자는 당시 고려의 수도인 개경으로 싣고 갔으며 일부는 중국으로 까지 수출되었다.
대구면 고려청자박물관이 있는 사당리 일대는 12세기 무렵 최고급 상감청자들이 생산되던 곳이다. 이곳 사당리 앞 들판을 가로지르며 하천이 흐르고 있는데 이 하천은 길게 약 6km의 계곡을 이루며 정수사까지 이어진다.
천태산에서 흘러내린 물은 내를 이루고 사당리 청자마을을 지나 강진만 바다로 흘러간다. 당시 청자를 만든 사람들이 살았던 땅의 젖줄인 셈이다. 이 계곡 주변 일대에서 청자가 생산되었던 도요지가 발견되고 있어 수많은 도공들이 청자를 빚는 일에 종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청자박물관에 가면 당시 생산되었던 고려청자들을 만나볼 수 있다.
고려청자는 정수사가 있는 용운리 일원에서 생산이 시작되어 12~13세기경 지금의 고려청자박물관이 있는 사당리 일원에서 꽃을 피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말 이곳에서 청자가 쇠퇴하기까지 수십 개의 이곳 도요지에서 청자가 생산되었던 것이다.
이 청자를 만들기 위해서 멀리 고향을 떠나 이곳으로 온 도공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최고의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이곳에서 염원의 기도를 올렸다. 이들의 염원과 함께 강진의 고려청자는 화려한 꽃을 피운다.
▲ 강진 천태산 자락에 자리한 정수사정수사는 고려청자와 관련된 도조사가 있는 사찰이다 ⓒ 정윤섭
강진의 천태산 자락 아래에 고즈넉이 자리하고 하고 있는 정수사로 가는 길은 단풍든 가을 풍경이 완연하다. 청자 생산지로 유명한 대구면 고려청자박물관에서 수확을 마친 빈 들판과 계곡을 약 6km가량 오르다 보면 정수사(淨水寺)가 나타난다. 뜻을 풀이해 보면 물이 맑은 절이다. 정결함이라는 종교적 의미가 느껴진다.
정수사의 여러 전각 속에서 동쪽 한 켠에 도조사가 자리하고 있다. 도조사는 무명 도공들의 장인정신과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이를 상징하듯 청자로 만들어진 조형물이 사당 앞 마당에 세워져 있다. 도조사의 외벽에는 도공들이 도자기를 굽기 위해 기원하고 굽는 과정들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
▲ 도조사 외벽에 그려진 벽화도공들의 청자를 만들기 위한 과정들이 그려져 있다 ⓒ 정윤섭
정수사는 805년(애장왕 6년)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사찰이다. 오랜 역사를 말해주듯 정수사에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대웅전과 나한전, 산문 등이 있다. 오랜 세월에 퇴락해서인지 대웅전은 해체보수하고 있다.
정수사 산문 밖은 임진왜란의 격전지로도 알려져 있다. 정수사 입구에는 임진왜란시 승리를 이끈 염걸 장군의 전승비가 세워져 있다. 염걸 장군은 1545년(인종1년) 칠량면 율변에서 출생하였는데 기마와 궁술에 출중하였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년) 왜군이 청자 도료를 차지하려고 구강포와 정수사 사이로 쳐들어오자 두 아우 서와 경, 외아들 홍립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섬멸했다고 한다. 염걸 장군은 이순신 장군과 함께 부산 몰운대 전투에 참가하기도 한다.
▲ 염걸장군 전승비임진왜란때 왜적을 물리친 전승비로 왜구들은 청자의 도료를 얻기 위해 쳐들어 온 것으로 보고있다. ⓒ 정윤섭
염걸 장군은 적선이 구강포에 쳐들어오자 수백개의 허수아비를 바닷가에 세우고 의병들이 후퇴하는 척 위장전술을 펼쳐 정수사 골짜기에 매복해 있다가 유인된 적 수 천명을 소탕하였다고 한다.
왜군이 강진만을 경유해 이곳으로 들어온 것은 고려청자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도자기의 도료를 확보하기 위해 청자 산지로 유명한 이곳에 쳐들어 온 것이다.
정수사는 청자 전성기에 강진 고려청자와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진 사찰이다. 도공들은 작품을 구상하거나 가마에 불을 지필 때면 이곳에 찾아와 기도하고 참선으로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였다. 도공들이 정신적 수양을 갈고 닦아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신비의 고려청자를 만들 수 있도록 기도를 올리던 정신적 귀의처 역할을 한 것이다.
우리나라 10대 축제에 오른 강진청자축제가 시작되면 맨 먼저 이곳에서 당시 도공들의 넋을 위로하는 제사를 올린다. 이들의 혼이 오늘날 강진 청자의 맥을 잇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명 도공에 대한 추모제가 열리면 한평생 도공의 삶을 살다간 이들의 넋을 위로하는 천혼문이 읊어진다.
정수사는 천년 역사를 잇게 한 고려 도공들의 참선과 정신적 귀의처 역할이 되어 준 사찰이라고 할 수 있다.
강진의 고려청자
강진은 고려청자의 생산지로 유명하다. 그 고려청자가 생산되었던 곳이 대구면 일대다. 대구면 일대는 12, 13세기 무렵 고려청자가 최고의 기술로 절정을 이루며 생산되던 곳이다. 고려는 당시 중국 다음으로 첨단 제품인 최고의 청자를 만들고 있었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청자는 당시 고려의 수도인 개경으로 싣고 갔으며 일부는 중국으로 까지 수출되었다.
▲ 강진 고려청자박물관고려청자의 전성기를 맞이한 이곳의 고려청자를 한눈에 볼 수 있다. ⓒ 정윤섭
대구면 고려청자박물관이 있는 사당리 일대는 12세기 무렵 최고급 상감청자들이 생산되던 곳이다. 이곳 사당리 앞 들판을 가로지르며 하천이 흐르고 있는데 이 하천은 길게 약 6km의 계곡을 이루며 정수사까지 이어진다.
천태산에서 흘러내린 물은 내를 이루고 사당리 청자마을을 지나 강진만 바다로 흘러간다. 당시 청자를 만든 사람들이 살았던 땅의 젖줄인 셈이다. 이 계곡 주변 일대에서 청자가 생산되었던 도요지가 발견되고 있어 수많은 도공들이 청자를 빚는 일에 종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청자박물관에 가면 당시 생산되었던 고려청자들을 만나볼 수 있다.
고려청자는 정수사가 있는 용운리 일원에서 생산이 시작되어 12~13세기경 지금의 고려청자박물관이 있는 사당리 일원에서 꽃을 피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말 이곳에서 청자가 쇠퇴하기까지 수십 개의 이곳 도요지에서 청자가 생산되었던 것이다.
이 청자를 만들기 위해서 멀리 고향을 떠나 이곳으로 온 도공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최고의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이곳에서 염원의 기도를 올렸다. 이들의 염원과 함께 강진의 고려청자는 화려한 꽃을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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