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건지고 백성을 살리는 천명이다
[동학대서사시, 모두가 하늘이었다 18] 수운 최제우 선생 탄신 200주년, 동학농민혁명 130주년, 동학! 동방의 가르침이다
▲ 큰 칼을 목에 찬 수운 최제우 대신사수운 선생은 1864년 1월 20일 대구감영 선화당(宣化堂) 뜰아래서 첫심문이 시작된다. 이때 수운 선생은 큰 칼을 목에 차고 힘겨운 모습으로 끌려와 강제로 무릎을 꿇린다. 그런데 수운 대선생은 형형한 눈빛으로 경상 감사 서헌순, 상주 목사 조영화, 지례 현감 정기화, 산청 현감 이기재 등을 쏘아본다. 이러한 모습을 박홍규 화백이 실감나게 그려냈다. ⓒ 박홍규
동학, 동쪽의 학문이다
수운 선생의 예정된 심문은 연일 내리던 비가 그치자 1월 20일 본격 시작되었다. 수운선생은 4차례, 이내겸은 3차례, 이정화는 3차례, 강원보는 2차례, 나머지는 1차례씩 가혹하리만큼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이때 수운 선생은 큰 칼을 목에 차고 힘겨운 모습으로 비틀거리며 좌우를 한 번 둘러보곤 쓰러지듯 꿇어앉았다. 이날따라 비가 그치고 청정한 하늘이 드러났다.
심문에 나선 감사, 목사, 현감 등 관리들은 날카로운 눈빛과 쩌렁쩌렁한 소리로 교졸들에게, "죄인 최복술을 형틀에 묶어라!"고 명령을 내렸다. 군아의 장교와 나졸들은 익숙한 솜씨로 재빨리 큰 칼을 씌운 채 형틀에 묶는다. 처참한 몰골로 형틀에 묶인 수운 선생은 반듯한 자세를 유지하려 몸을 꼿꼿이 세운다.
그리고 관리들과 교졸들을 똑바로 쳐다본다. 이에 입회한 관리들은 한 목소리처럼, "저놈의 눈빛이 역적이로다!! 여봐라! 저놈이 고개를 숙일 때까지 매우 쳐라!"하며 소리를 지른다.
교졸들의 심한 매질이 시작된다. 수운 선생은 어렸을 때부터 눈빛이 강해 역적의 눈빛이라 놀림을 당했고, 득도 후에는 마치 호랑이 눈빛처럼 강렬하여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수운 선생은 신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기는커녕 호랑이 광채 같은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았다. 순간 관리들은 뭔가 두려움을 느끼는 표정을 감추면서 계속 매질할 것을 명령한다.
수운 선생은 거의 초죽음이 될 때까지 혹독한 매질을 당하여 온몸이 피로 얼룩진다.
이런 과정을 거친 뒤 본격 심문이 시작된다. 심문관은 수운 선생에게, "죄인 최복술(최제우)은 묻는 말에 거짓 없이 답해라. 너는 어디 사는 누구냐?"하고 묻는다.
답하기를, "나의 아명(兒名)은 복술(福述)이고, 관명(冠名)은 제우(濟愚)이며, 살고 있는 집은 경주의 현곡면 가정리 용담에 있다." 묻기를, "울산에 산다는 소문도 있는데 사실이냐?" 답하기를, "5~6년 전 울산으로 이사 가서는 옷감을 사고팔아 생계를 유지하다가 근년에 다시 경주로 돌아와 살고 있다."고 하였다.
참관한 관리들은, "어찌 죄인이 경어를 쓰지 않고 꼬박꼬박 반말을 하느냐?"고 호통을 친다. 수운 선생은, "우리 동학은 남녀노소(男女老少) 가리지 않고 존칭어를 사용한다. 그렇지만 그대들이 함부로 대하고 말하니, 나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격분한 관리들의 질문이 이어지길, "너는 어찌 당을 모아 풍속을 어지럽히는가. 이미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귀신을 부르고 칼춤으로 공중을 나르고 또한, 토색질까지 했다는데' 사실이냐?"
답하기를, "먼 데서나 가까운 데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부득이 만나 주었기 때문에 도당(徒黨)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지, 붓을 잡고 귀신을 내리게 했거나, 칼춤을 추면서 공중으로 솟아올랐거나, 돈과 쌀을 토색질한 일은 애초에 없었다. 선생이니 제자니 하는 소리도 내가 자칭한 것이 아니다."
묻기를, "그럼 소문과 다르다는 것인가?" 답하기를, "우리 도(道_천도·동학)는 간악한 종교와는 달라서 애초에 숨기거나 속이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묻기를, "그럼 무엇으로 생활을 하였는가?" 답하기를, "나는 경주 백성으로서 아이들에게 공부 가르치는 것을 직업으로 삼아왔다. 또한 옷감장사와 철점사업으로 생활을 유지해왔다. 단 한 번도 누구에게 돈을 요구한 사실이 없다."하였다.
묻기를, "말이 동학이지 서학과 같은 것이 아닌가?" 답하기를, "내가 의관을 갖추고 행세하는 사람으로서, 양학(서학)이라고 하는 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고 옳지 않다. 천도(天道)는 하늘을 공경하고 하늘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13자 주문(呪文)으로 된 글을 지어서, 동학이라고 불렀는데, 동쪽 나라의 학문이라는 뜻에서 취한 것이다. 이미 다 내가 지은 경서에 밝혀놓았다."하였다.
관리들은 수운 선생의 답변을 막으며, "죄인은 묻는 말에만 답하라, 어찌 여기서 경서(경전) 운운하는가."하며, 사학과 반란에 관련 있는 것 이외 다른 논리나 경전 이야기를 차단하였다. 그리고 수운 선생의 논리에 밀리는 듯하자 일단 심문을 쉬고 관리들은 대책회의에 들어갔다.
「수운,
자신을 죽이려고
잡아간 자들도
하늘이어라.
수운,
온갖 고문과 매질에도
끄떡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정정당당하게 밝힌다.
수운에게는 삶과 죽음도
오직 하늘과 같아
추호도 두렵거나
염려의 기색은
찾아볼 수 없다.
육신은 찢어져
죽을 것만 같아도
정신은 불멸의 하늘이었다.」
▲ 수운 대신사 검결 모습수운 선생은 심심연마를 위해 자주 칼노래와 칼춤을 추셨다. 칼춤은 단련을 위한 검술차원을 뛰어넘어 보국안민, 제폭구민, 척양척왜의 상징적인 무술 훈련으로 승화된다. ⓒ 박홍규
칼노래를 반란으로 몰다
이들은 대구 경상 감영 선화당, 경상 감사 서헌순의 집무실에서 곧바로 대책회의에 들어갔다. 숙의 끝에 합의한 내용은 첫째, 최복술(최제우)이 지었다는 '칼 노래'를 반란의 역적으로 몰기로 하였다.
둘째, 수운 선생의 후계자 최경상(최시형)의 피신처를 대라는 것으로 심한 고문을 가하기로 했다. 셋째, 동학을 유학의 이단과 서학의 모방인 사학으로 규정하여 뿌리를 뽑기로 하였다. 그리고 조정에 올리는 장계의 내용을 조작하여 동학의 명분을 없애버리는 것으로 대책회의를 마쳤다.
수운 선생에 이어 두 번째 문초 차례는 이내겸이었다. 이내겸은 스승의 혹독한 문초를 지켜보면서, 과연 살아나갈 수 있을 것인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또한 수운 스승의 제자답게 죽기를 각오하고 당당하게 맞설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문초에 들어가기도 전에 집단구타 즉 심한 몽둥이타작을 당했다. 가혹한 매질로 아예 얼을 빼버리고 의도하는 쪽으로 진술을 받아내려는 수작이었다. 이러한 방법은 잡혀온 모든 동학도인들에게 해당되었다.
경상 감사 서헌순의 장계보고서를 보면, 이내겸과 제자들의 진술 내용이 조작되었는지 아니면 무서워서 거짓 진술하였는지 모르지만 공초록 내용에는 전혀 수운 선생의 제자다운 언행을 볼 수가 없다.
예나 지금이나 가혹한 고문에 의해 거짓 자백을 받아내는 것은 비슷하다고 본다. 또한, 진술 내용이 조작되어 억울한 누명을 쓰고 평생을 살아야 하는 비인권적이며 비도덕적인 일들이 수없이 많았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오죽하면 수운 선생의 아들까지 고문하고 조작하여 아버지와 동학의 명예를 실추시키려 했는지 본 기록들을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이렇듯 공갈협박 즉 심한 매질과 고문에 의한 자백 강요로 거짓 진술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동학의 경전 내용과 수행의 방법 등 동학사상의 올바른 이치에 대해서는 일체 차단하고 죄를 뒤집어씌워 사학과 반란의 집단으로 몰았다. 동학을 없애고 수운 선생에게 사형을 내려 완전 청산하려는 음모는 그렇게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수운 선생은 그리 쉽게 굴복하지 않았다.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희생으로써 천도 즉 동학을 지키려는 자세는 변함이 없었다. 수운 선생의 2차 심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운 선생은 한울님께 지극히 심고를 드리고, 13자 주문을 때로는 입으로, 때로는 마음으로 읽고 있었다.
「수운,
거짓자백으로
위기를 모면하려면
하늘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고
양심을 저버린
인간이 되기에
죽음을 각오로
오직 하늘과 백성을 위한
일편단심이었다」
세상을 건지고 백성을 살리는 천명이다
주문수행을 하면 어디서 그런 용기가 솟아나고 당당해지는지 수운 선생 자신도 헤아리기 어려웠다. 수운 선생은 '삼칠자(三七字_21자 주문) 그려내니 세상 악마 다 항복하네'의 강시가 떠올랐다. 그리고 마음으로 다짐했다. '내 선으로써 악을 다 물리치리라. 죽음이 와도 나의 이상은 굽힘이 없으리라'는 각오를 다졌다.
재차 심문도 역시 혹독했다. 형틀에 묶어 주리를 트는 즉 양다리 사이에 긴 나무를 끼워 양쪽으로 잡아당기며 비트는 악형이었다. 살이 찢겨지고 뼈가 으스러질 것 같았다. 이를 악물고 아무리 참아보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렇지만 수운 선생은 전혀 굽힘이 없었다. 이런 방법으로 사전에 기선을 제압하고 의도대로 진술시키려는 수작이었다.
심문관이 묻기를, "최복술 너는 사설의 주문으로 세상을 속이고, 사술의 부적으로 백성을 속였고, 반역의 칼노래로 난(亂)을 모의했다. 이런 것들은 사기술과 반역이니, 실토하라" 하였다. 수운 선생이 답하기를, "나의 주문(呪文)과 영부(靈符)는 사사로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건지고 백성을 살리는 천명에서 나온 것이다. 칼노래는 심신단련으로 천지와 일체화하는 도법"이라고 정론을 펼치기 시작하면 곧 매질과 고문으로 차단하였다.
심문관은 수운 선생을 초죽음으로 만들어 의도한 자백을 강요받고, 후계자 해월 선생을 잡아들이기 위해 악형의 고문을 다 동원한다, 이에 수운 선생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신념에 굽힘이 없었다. 그러나 공초록은 자신들의 이로운 내용으로 어떤 것은 사실대로 어떤 것은 위작되어 기록된다.
「수운,
혹독한 악형,
죽음을 앞두고
어디서 그런
담담함과 슬기로운
자세를 유지할까.
수운의 심신은
한울님의 조화로
사람이 하늘로서
조금도 허점이나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
덧붙이는 글
이윤영 기자는 동학혁명기념관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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