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토록 빛나는, 이토록 깊은 '풀'의 세계
[리뷰] 성민우 초대전 '풀의 정원', 아트센터 자인에서 오는 28일까지
무심하게, 저토록 빛나게, 너무도 조용하게 '풀'은 성장하고 존재감을 드러낸다. 인간의 시선이 머물지 않는, 대지를 뒤덮은 풀들은 저마다 '생명의 숲'을 가꾸어 간다. 주어진 환경에 성실하게 적응하고 생과 죽음을 반복하면서, '풀'은 '지상에서 가장 낮은 정원'을 만들어 가고 있다.
'풀의 미학'을 탐구해 온 작가 성민우의 개인전이 아트센터 자인에서 <풀의 정원 Grass Garden>을 주제로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풀의 정원' 연작, '풀의 초상' 연작, '오이코스-부케' 연작, '오이코스-공생' 작품을 통해 '일년생-풀'의 존재를 드러내고, 그가 탐구해 온 '풀:Grass의 세계'와 '생태:Oikos의 공간'을 소개한다.
풀의 자리
흰 우주를 가득 채운 일백여 별들이 붉은 빛을 뿜어내며 저마다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숲(調和, Cosmos)을 이룬 우주는 시간에 붙들려 메말라져 가고, 공백을 채워나간 별들은 무음(無音)의 목소리로 떠들어 댄다. 부서진 은가루(銀粉) 비단 위에 펼쳐놓은 '일년생-풀'은 백색 우주(白-宇宙)를 만들어내고, 그 틈을 산책하며 빛을 내는 '풀벌레'들은 붉은 별로 자리한다.
성민우 작가는 동양과 서양에서 단 한번도 제대로 화폭(畫幅)에 담기지 못한, 그저 캔버스 주변을 유영(游泳)하며 '무음의 소리'만 내고 있던 '일년생-풀'(一年生植物)을 자신의 협력자로 소환하여 공동 작업을 하고 있다. 작가가 20년 간 끈질기게 사유(事由)하고 있는 관계론적·생태학적 시선과 '성실한 노동'이 더해져, '풀-존재'는 한국화의 특별한 소재이자 작품으로 자리 잡았다.
풀의 초상
성민우가 그간 집중해 온 '일년생-풀'의 소재적 시원(始原)을 조선시대나 중국 송·원대 '초충도(草蟲圖)'에 기댈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전의 것들이 수기와 수양의 상징으로 기능했을 뿐만 아니라 사실주의적·실용주의적 형태를 지닌 반면, 작가의 작업 '일년생-풀'은 그것의 '존재 자체'(Being itself, 開示性)를 대상으로 하며, 이를 생태적이고 지구적인 사유로 확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달리 볼 필요가 있다.
소재(素材)의 미학은 과거의 전통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작가에게 '일년생-풀'은 그 자체로 삶과 죽음의 반복이며,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성민우의 작업에서 풀과 벌레의 재현은 '비사실주의적'이다. 작가는 이전의 '초충도'나 '본초서'에 그려진 사실적인 배경과는 달리 '비현실적 재현'을 만들어내고 있다. 작가가 구상한 재현은 '현실의 재현'이 아니다. 작가가 담아내는 것은 '존재-자체의 재현'이자 '존재의 열림'(開示性)이다.
작품에는 존재의 환희와 메마름, 생명의 빛과 어두움이 드리워져 있으며 자연의 환상과 현실이 담겨 있다. 그렇기에 작품 안에서 풀-존재는 "내게 귀 기울일 필요는 없소. 그러나 나는 여기 있소"라며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공생의 공간, 오이코스
모든 것은 '오이코스Oikos'로부터 시작된다. 집과 가정, 그 안에 속해 있는 재산과 자산 모두를 아우르는, 고대 그리스의 이 개념은 인간의 생활 경제부터 지구의 생태환경까지 포괄한다. 성민우의 작업에 등장하는 수 많은 풀들과 생태적 메시지는 한결같이 '오이코스'로 연결된다. 풀들의 정원은 곧 오이코스의 정원이 되는 것이다.
오이코스에서 모든 생명이 마주하는 지점에서, 존재들의 정원이 오이코스로 연결되는 지점에서 '오이코스(적)-공생'이 가능해진다. 그 공간은 깊은 고요와 생명의 소리가 가득 채워지는 공간이며, 각 존재의 생명에 대한 열망이 유성(有聲)의 목소리로 전환되는 장소이다. 이 곳이 바로 '공생의 공간'이자 '아름다움의 장소'다.
정원 너머의 세계 : 모든 '사이-존재'들을 위하여
모든 철학이 '개념(槪念)으로 만든 자화상'인 것처럼, 모든 예술 작품은 '선(線)으로 만드는 자화상'이다. 성민우의 풀도 마찬가지다. 풀은 작가 성민우의 은유이며, 그 자신도 풀과 풀 사이를 산책하는 '사이-존재'다. 그리하여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명체, 모든 주변 식물(혹은 주변인)과 귀화 식물(혹은 귀화인), 모든 하찮은 것들과 기피하는 것들이 '서로 사이를 내어주며' 공생해야 할 '사이-존재'다. 작가의 말대로 "모든 살아 있는 것은 위대한 것"이며, "삶(生)은 의무"인 까닭이다.
'풀의 미학'을 탐구해 온 작가 성민우의 개인전이 아트센터 자인에서 <풀의 정원 Grass Garden>을 주제로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풀의 정원' 연작, '풀의 초상' 연작, '오이코스-부케' 연작, '오이코스-공생' 작품을 통해 '일년생-풀'의 존재를 드러내고, 그가 탐구해 온 '풀:Grass의 세계'와 '생태:Oikos의 공간'을 소개한다.
▲ 풀의 초상 & 풀의 정원(좌)풀의 초상, (우)풀의 정원. 아트센터 자인 전시장. 이번 성민우 개인전은 11월 28일까지 열린다. ⓒ 성민우
풀의 자리
흰 우주를 가득 채운 일백여 별들이 붉은 빛을 뿜어내며 저마다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숲(調和, Cosmos)을 이룬 우주는 시간에 붙들려 메말라져 가고, 공백을 채워나간 별들은 무음(無音)의 목소리로 떠들어 댄다. 부서진 은가루(銀粉) 비단 위에 펼쳐놓은 '일년생-풀'은 백색 우주(白-宇宙)를 만들어내고, 그 틈을 산책하며 빛을 내는 '풀벌레'들은 붉은 별로 자리한다.
성민우 작가는 동양과 서양에서 단 한번도 제대로 화폭(畫幅)에 담기지 못한, 그저 캔버스 주변을 유영(游泳)하며 '무음의 소리'만 내고 있던 '일년생-풀'(一年生植物)을 자신의 협력자로 소환하여 공동 작업을 하고 있다. 작가가 20년 간 끈질기게 사유(事由)하고 있는 관계론적·생태학적 시선과 '성실한 노동'이 더해져, '풀-존재'는 한국화의 특별한 소재이자 작품으로 자리 잡았다.
▲ 풀의 정원풀의 정원, 130.3×387.8㎝, 비단에 수묵과 은분, 2024 ⓒ 성민우
풀의 초상
성민우가 그간 집중해 온 '일년생-풀'의 소재적 시원(始原)을 조선시대나 중국 송·원대 '초충도(草蟲圖)'에 기댈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전의 것들이 수기와 수양의 상징으로 기능했을 뿐만 아니라 사실주의적·실용주의적 형태를 지닌 반면, 작가의 작업 '일년생-풀'은 그것의 '존재 자체'(Being itself, 開示性)를 대상으로 하며, 이를 생태적이고 지구적인 사유로 확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달리 볼 필요가 있다.
소재(素材)의 미학은 과거의 전통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작가에게 '일년생-풀'은 그 자체로 삶과 죽음의 반복이며,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풀의 생명은 주어진 환경을 부여 받고, 그에 성실하게 적응하면서 완성되며…풀의 생태는 분명하게 생과 번식, 그리고 죽음으로 반복"되는 존재인 것이다." (작가 노트 부분)
성민우의 작업에서 풀과 벌레의 재현은 '비사실주의적'이다. 작가는 이전의 '초충도'나 '본초서'에 그려진 사실적인 배경과는 달리 '비현실적 재현'을 만들어내고 있다. 작가가 구상한 재현은 '현실의 재현'이 아니다. 작가가 담아내는 것은 '존재-자체의 재현'이자 '존재의 열림'(開示性)이다.
작품에는 존재의 환희와 메마름, 생명의 빛과 어두움이 드리워져 있으며 자연의 환상과 현실이 담겨 있다. 그렇기에 작품 안에서 풀-존재는 "내게 귀 기울일 필요는 없소. 그러나 나는 여기 있소"라며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풀과 벌레, 그들의 삶을 아무리 재현해 내려 애써도 그것은 사실적일 수 없다. 나의 재현은 그래서 비현실적인 재현일 뿐이다. 그러므로 나의 그림은 사실적이지 않다. 현실을 그대로 바라보고 그 순간의 기억들과 나의 눈과 손으로 담아낸 것 뿐이다." (작가 노트 부분)
▲ 풀의 초상(좌)풀의 초상, 162.2×130.3㎝, 비단에 수묵과 은분, 2023. (우)풀의 초상, 162.2×130.3㎝, 비단에 수묵과 금분, 2024 ⓒ 성민우
공생의 공간, 오이코스
모든 것은 '오이코스Oikos'로부터 시작된다. 집과 가정, 그 안에 속해 있는 재산과 자산 모두를 아우르는, 고대 그리스의 이 개념은 인간의 생활 경제부터 지구의 생태환경까지 포괄한다. 성민우의 작업에 등장하는 수 많은 풀들과 생태적 메시지는 한결같이 '오이코스'로 연결된다. 풀들의 정원은 곧 오이코스의 정원이 되는 것이다.
"인간이 야생이라 칭하는 곳, 인간의 시선이 머물지 않는 곳 어디에서나 풀들은 서로 관계 맺으며 풀의 정원을 이룬다. 날카로운 가시와 잎새와 줄기를 가진 풀들은 서로 상처주지 않으며 존재한다. 작고 빼곡한 그 정원들은 연결되고 지속되어 오이코스Oikos가 된다." (작가 노트 부분)
오이코스에서 모든 생명이 마주하는 지점에서, 존재들의 정원이 오이코스로 연결되는 지점에서 '오이코스(적)-공생'이 가능해진다. 그 공간은 깊은 고요와 생명의 소리가 가득 채워지는 공간이며, 각 존재의 생명에 대한 열망이 유성(有聲)의 목소리로 전환되는 장소이다. 이 곳이 바로 '공생의 공간'이자 '아름다움의 장소'다.
"보랏빛 찬란한 밤, 풀벌레조차 잠든 깊은 고요 속에 그들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적막함이 깊어지면 하찮은 생명들의 소리가 세상을 채운다. 풀잎사귀 하나하나의 핏빛소리 모두가 삶에 대한 열망이다. 생존과 번식에 대한 그들의 본능은 솔직하고 아름답다. 어두운 달빛과 바람 속에서 그 생명체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작가 노트 부분)
▲ 오이코스-공생Oikos_Symbiosis, 193.9㎝×521.2㎝, 비단에 채색과 은분, 2023 ⓒ 성민우
정원 너머의 세계 : 모든 '사이-존재'들을 위하여
모든 철학이 '개념(槪念)으로 만든 자화상'인 것처럼, 모든 예술 작품은 '선(線)으로 만드는 자화상'이다. 성민우의 풀도 마찬가지다. 풀은 작가 성민우의 은유이며, 그 자신도 풀과 풀 사이를 산책하는 '사이-존재'다. 그리하여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명체, 모든 주변 식물(혹은 주변인)과 귀화 식물(혹은 귀화인), 모든 하찮은 것들과 기피하는 것들이 '서로 사이를 내어주며' 공생해야 할 '사이-존재'다. 작가의 말대로 "모든 살아 있는 것은 위대한 것"이며, "삶(生)은 의무"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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