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아이와 잘 지내고 싶은 아빠입니다
적당한 거리 필요... 좋은 말도 길어지면 잔소리가 된다는 걸 알았어요
제 아이는 올해 중학교 2학년으로 사춘기를 열심히 보내고 있습니다. 아이가 하나라 귀하게 키우면서도, 혹시나 버릇없는 행동으로 주위에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종종 신경을 써서 보살피기도 했습니다.
저도 아빠가 처음이다보니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읽었던 책과 유튜브 영상, 주위의 조언을 최대한 떠올렸죠. 하지만 세상이 뜻대로 되지 않듯, 아이가 자라면서 제 마음대로 되겠습니까.
책에서 읽었던 대로 해봤습니다만
언젠가 책에서 이런 글을 보게 됐습니다. 보는 순간 무릎을 쳤죠.
"아이의 서재보다 부모의 서재를 먼저 만들어라. 그런 부모를 보고 자란 아이는 자라면서 부모가 읽었던 책을 함께 읽음으로써 공통된 주제로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거실에 TV를 치워라. 그리고 도서관으로 만들어라. 그러면 온 가족이 함께 책을 읽으며 대화의 꽃을 피우게 된다."
좋은 말입니다. 저도 공감했습니다. 곧장 실행에 옮겼습니다. 평소 읽었던 책을 모아 작은 방에 서재를 꾸몄습니다. 거실에 놓였던 TV도 치웠습니다. 그리고 기다란 책상을 들여놓았습니다. 아이가 한글을 깨칠수록 기대가 컸습니다.
늘 꿈 꿔왔던, 거실에서의 가족 간의 대화가 목전에 놓인 듯했습니다. 아이는 웃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그 옆에서 부모는 함께 책을 펴고 독서를 하는 것 말이죠. 처음엔 제가 먼저 거실 책상에 책을 펴니 아이도 똑같이 책을 펴고 읽곤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TV를 치워버린 그 거실에는 아이가 어렸을 때 가지고 놀던 장난감과 스케치북, 연필 등이 주인을 잃어 버렸고, 아이는 아이 방에서, 아내는 식탁에서, 저는 작은 방에서 각자 휴대폰에 열중하고 있었죠. 진정한 독서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데 목적이 있었으니 오래 갈 리가 없죠. 주말엔 쉬고 싶고, 집에서 영화도 보고 싶은데 그럴 수록 조심스럽기만 했습니다.
한편으론, TV를 치우지 않았다면 구독 중인 OTT를 연결해 함께 영화라도 보면서 웃고 떠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더군요.
'사춘기 우리 아이, 사자가 되었어요'
그동안 아이와 깊이 있는 얘기를 많이 나누지 못한 것이 많이 아쉬웠습니다. 그리고 아이와 함께 있을 시간이 얼마 없다고 느꼈습니다. 아이는 금세 대학생이 되고 직장인이 될 테니까요. 다행히 잘 자라주고, 자기 할 일은 잘 하는 편이지만 아이들은 다 똑같죠. 방 어질러 있고, 잠옷이 침대 밑에 들어가 있고, 책상은 화장품 판매대가 돼 있고, 책장 안에는 먹다 남은 생라면 봉지가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동시에 조금씩 분노게이지도 올라갑니다. 또, 왜 이리 세수는 오래 하는지, 마라탕은 뭐 그리 맛있다고 자주 먹는지, 건강 때문에 얘기하면 모조리 잔소리가 돼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버립니다. 그럴 수록 대화의 장은 멀어져만 갑니다. 아이의 방문은, 더 굳게 닫힙니다.
아빠로서 궁금합니다. 공부는 잘 하는지, 교우관계는 어떤지, 어떤 선생님이 좋은지, 점심식사는 맛있었는지, 아이돌은 여전히 '보이넥스트도어'를 좋아하는지 알고 싶은 게 산더미 입니다.
운이 좋아 학원에 데려다주는 날이 되면, 그래선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급해 먼저 묻는 말이 "공부는 잘 돼?" "이번 기말고사 준비는 어때?" 이런 류이니 대화가 잘 풀릴 리가 없고, 아이는 "아, 몰라"라며 짜증을 내거나 건성으로 대답할 수밖에요. 서로의 어색함을 자연스레 풀어주는 '아이스 브레이크'는 여전히 빵점인 아빠입니다.
그러다 제 개인 페이스북 계정에서 저와 같은 처지의 페친이 올린 글을 하나 봤습니다.
'사춘기 우리 아이, 사자가 되었어요.'
아, 남들도 모두 똑같구나. 그래서 생각을 바꿨습니다. '아기 사자'와 눈높이를 맞추기로요. 내가 먼저 묻기 전에 아이가 먼저 다가오게 만들자 생각했습니다. 부모라지만 먼저 다가갈 수록 아이가 그만큼 뒷걸음치는 구나. 소유하지 말고, 그 자리에서 기다리자 생각했습니다.
그리기 위해 몇 가지 다짐을 했습니다. 먼저, 말을 짧게 하자, 관심 없는 척 지나치자, 공감하자, 이 세 가지입니다. 일단 말이 많고, 제 중심으로 바라보면 잔소리가 되기 십상이었거든요.
추가로, 아이가 거북하게 느낄 장난스런 '큰 추임새'도 하지 않고, 방문을 열 때는 조용히 노크하기, 중간에 마주쳐도 먼저 살짝 돌아서기, 대화라도 하게 되면 "그랬구나, 잘 했어, 아빠도 그렇게 생각해" 하고 짧게 맞장구치기,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기, 아이가 좋아하는 아이돌 뉴스를 사전에 검색해 간단히 툭 내뱉기, 엄마 대신 직접 저녁 밥상을 차리기로 했죠. 어려운 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2주가 흘렀습니다
시간이 2주가 흘렀습니다. 아이도 감지했나 봅니다. 아빠가 평소 같지 않다라는 걸요. 무관심한 척하는데, 더 세심해졌다고 느꼈을까요?
제가 방에서 일하고 있으면 먼저 들어와 제 뒤에서 멀뚱히 쳐다보곤 사라집니다. 된장찌개를 좋아하지 않는데도, 장난스레 째려보더니 밥을 한 숟갈 떠서 찍어 먹습니다. 내일 저녁은 '야채 볶음'이라 말했더니 기분 좋게 "알았어"라고 응답합니다.
또, 짜증내는 말투도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저녁밥을 먹는 동안 학교에 대해 묻지 않았더니 먼저 학교에서 있었던 일과 과학 실습 시간에 있었던 일, 친구와 함께 공모전에서 주고 받은 얘기 등 예전 같으면 쉽게 주고 받기 어려웠던 이야기를 건넵니다. 또 하나, 글쎄 아이가 거실에 나와 의자에 앉아 잠깐이라도 시간을 보내지 뭡니까.
얼마 전에는, 아이가 체육 기말고사 때 실습이라며 윗몸일으키기, 플랭크 등을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함께 운동했습니다. 이 정도면 장족의 발전입니다.
친구 같은 아빠, 참으로 쉽고도 어렵습니다. 큰소리를 내면 후회되고, 안 내자니 답답합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저도 그 시절 때는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친구가 무엇인지 검색해봤습니다. 그중에서도 프랑스 작가였던 아벨 보나르의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사랑에는 신뢰 받을 필요가 있고, 우정에는 이해 받을 필요가 있다.'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믿고 이해하면 됐던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그동안 저는 아이가 성장해도 늘 머릿속에는 아기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적당한 거리에서 안 보는 척하며 지켜보는 것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물론 아이가 잘못했을 때는 말로 따끔하게 얘기해줄 필요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짧게 말하고, 절대 속으로 쌓아두지 않습니다.
부모가 되어 자식을 낳아야 진짜 부모의 마음을 안다고 합니다. 이제라도, 늘 같은 곳에 서서 아이가 엇나가지 않도록 응원할 생각입니다. 내 자식이니까, 라는 생각보다 내 자식이기 때문에 또 다른 나로서 이해해주는 것, 그 생각 뿐입니다.
아직은 아슬아슬한 외줄을 타는 기분입니다. 내일도 모레도 함께 운동할 거고요, 저녁 식사도 제가 차릴 겁니다. 역시, 건네는 말도 짧게 할 거고요. 아기가 아닌 아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했던 나날이었습니다. 정답 없는 세상 속, 제 자식이지만 제 맘 같지 않다는 것도 인정했으니 마음도 곧 편해지겠죠?
저도 아빠가 처음이다보니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읽었던 책과 유튜브 영상, 주위의 조언을 최대한 떠올렸죠. 하지만 세상이 뜻대로 되지 않듯, 아이가 자라면서 제 마음대로 되겠습니까.
▲ 거실에 TV를 치우고 기다란 책상을 높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스마트폰의 역습으로 우리 가족 중 누구도 책상에 앉질 않았다. ⓒ 김관식
책에서 읽었던 대로 해봤습니다만
언젠가 책에서 이런 글을 보게 됐습니다. 보는 순간 무릎을 쳤죠.
"아이의 서재보다 부모의 서재를 먼저 만들어라. 그런 부모를 보고 자란 아이는 자라면서 부모가 읽었던 책을 함께 읽음으로써 공통된 주제로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거실에 TV를 치워라. 그리고 도서관으로 만들어라. 그러면 온 가족이 함께 책을 읽으며 대화의 꽃을 피우게 된다."
좋은 말입니다. 저도 공감했습니다. 곧장 실행에 옮겼습니다. 평소 읽었던 책을 모아 작은 방에 서재를 꾸몄습니다. 거실에 놓였던 TV도 치웠습니다. 그리고 기다란 책상을 들여놓았습니다. 아이가 한글을 깨칠수록 기대가 컸습니다.
늘 꿈 꿔왔던, 거실에서의 가족 간의 대화가 목전에 놓인 듯했습니다. 아이는 웃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그 옆에서 부모는 함께 책을 펴고 독서를 하는 것 말이죠. 처음엔 제가 먼저 거실 책상에 책을 펴니 아이도 똑같이 책을 펴고 읽곤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TV를 치워버린 그 거실에는 아이가 어렸을 때 가지고 놀던 장난감과 스케치북, 연필 등이 주인을 잃어 버렸고, 아이는 아이 방에서, 아내는 식탁에서, 저는 작은 방에서 각자 휴대폰에 열중하고 있었죠. 진정한 독서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데 목적이 있었으니 오래 갈 리가 없죠. 주말엔 쉬고 싶고, 집에서 영화도 보고 싶은데 그럴 수록 조심스럽기만 했습니다.
한편으론, TV를 치우지 않았다면 구독 중인 OTT를 연결해 함께 영화라도 보면서 웃고 떠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더군요.
'사춘기 우리 아이, 사자가 되었어요'
그동안 아이와 깊이 있는 얘기를 많이 나누지 못한 것이 많이 아쉬웠습니다. 그리고 아이와 함께 있을 시간이 얼마 없다고 느꼈습니다. 아이는 금세 대학생이 되고 직장인이 될 테니까요. 다행히 잘 자라주고, 자기 할 일은 잘 하는 편이지만 아이들은 다 똑같죠. 방 어질러 있고, 잠옷이 침대 밑에 들어가 있고, 책상은 화장품 판매대가 돼 있고, 책장 안에는 먹다 남은 생라면 봉지가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동시에 조금씩 분노게이지도 올라갑니다. 또, 왜 이리 세수는 오래 하는지, 마라탕은 뭐 그리 맛있다고 자주 먹는지, 건강 때문에 얘기하면 모조리 잔소리가 돼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버립니다. 그럴 수록 대화의 장은 멀어져만 갑니다. 아이의 방문은, 더 굳게 닫힙니다.
아빠로서 궁금합니다. 공부는 잘 하는지, 교우관계는 어떤지, 어떤 선생님이 좋은지, 점심식사는 맛있었는지, 아이돌은 여전히 '보이넥스트도어'를 좋아하는지 알고 싶은 게 산더미 입니다.
운이 좋아 학원에 데려다주는 날이 되면, 그래선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급해 먼저 묻는 말이 "공부는 잘 돼?" "이번 기말고사 준비는 어때?" 이런 류이니 대화가 잘 풀릴 리가 없고, 아이는 "아, 몰라"라며 짜증을 내거나 건성으로 대답할 수밖에요. 서로의 어색함을 자연스레 풀어주는 '아이스 브레이크'는 여전히 빵점인 아빠입니다.
▲ 사춘기 우리아이는 짜증낼 때 사자 같지만, 이 또래 아이들이 그렇듯 여리다. ⓒ unsplash
그러다 제 개인 페이스북 계정에서 저와 같은 처지의 페친이 올린 글을 하나 봤습니다.
'사춘기 우리 아이, 사자가 되었어요.'
아, 남들도 모두 똑같구나. 그래서 생각을 바꿨습니다. '아기 사자'와 눈높이를 맞추기로요. 내가 먼저 묻기 전에 아이가 먼저 다가오게 만들자 생각했습니다. 부모라지만 먼저 다가갈 수록 아이가 그만큼 뒷걸음치는 구나. 소유하지 말고, 그 자리에서 기다리자 생각했습니다.
그리기 위해 몇 가지 다짐을 했습니다. 먼저, 말을 짧게 하자, 관심 없는 척 지나치자, 공감하자, 이 세 가지입니다. 일단 말이 많고, 제 중심으로 바라보면 잔소리가 되기 십상이었거든요.
추가로, 아이가 거북하게 느낄 장난스런 '큰 추임새'도 하지 않고, 방문을 열 때는 조용히 노크하기, 중간에 마주쳐도 먼저 살짝 돌아서기, 대화라도 하게 되면 "그랬구나, 잘 했어, 아빠도 그렇게 생각해" 하고 짧게 맞장구치기,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기, 아이가 좋아하는 아이돌 뉴스를 사전에 검색해 간단히 툭 내뱉기, 엄마 대신 직접 저녁 밥상을 차리기로 했죠. 어려운 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2주가 흘렀습니다
시간이 2주가 흘렀습니다. 아이도 감지했나 봅니다. 아빠가 평소 같지 않다라는 걸요. 무관심한 척하는데, 더 세심해졌다고 느꼈을까요?
제가 방에서 일하고 있으면 먼저 들어와 제 뒤에서 멀뚱히 쳐다보곤 사라집니다. 된장찌개를 좋아하지 않는데도, 장난스레 째려보더니 밥을 한 숟갈 떠서 찍어 먹습니다. 내일 저녁은 '야채 볶음'이라 말했더니 기분 좋게 "알았어"라고 응답합니다.
또, 짜증내는 말투도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저녁밥을 먹는 동안 학교에 대해 묻지 않았더니 먼저 학교에서 있었던 일과 과학 실습 시간에 있었던 일, 친구와 함께 공모전에서 주고 받은 얘기 등 예전 같으면 쉽게 주고 받기 어려웠던 이야기를 건넵니다. 또 하나, 글쎄 아이가 거실에 나와 의자에 앉아 잠깐이라도 시간을 보내지 뭡니까.
▲ 단촐한 식사지만 정성을 들여 차린 아이의 저녁 밥상 ⓒ 김관식
▲ 하루하루 아이 저녁 밥상이 걱정이다. 내일은 또 무엇을 차려야 할까. ⓒ 김관식
얼마 전에는, 아이가 체육 기말고사 때 실습이라며 윗몸일으키기, 플랭크 등을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함께 운동했습니다. 이 정도면 장족의 발전입니다.
친구 같은 아빠, 참으로 쉽고도 어렵습니다. 큰소리를 내면 후회되고, 안 내자니 답답합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저도 그 시절 때는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친구가 무엇인지 검색해봤습니다. 그중에서도 프랑스 작가였던 아벨 보나르의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사랑에는 신뢰 받을 필요가 있고, 우정에는 이해 받을 필요가 있다.'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믿고 이해하면 됐던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그동안 저는 아이가 성장해도 늘 머릿속에는 아기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적당한 거리에서 안 보는 척하며 지켜보는 것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물론 아이가 잘못했을 때는 말로 따끔하게 얘기해줄 필요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짧게 말하고, 절대 속으로 쌓아두지 않습니다.
부모가 되어 자식을 낳아야 진짜 부모의 마음을 안다고 합니다. 이제라도, 늘 같은 곳에 서서 아이가 엇나가지 않도록 응원할 생각입니다. 내 자식이니까, 라는 생각보다 내 자식이기 때문에 또 다른 나로서 이해해주는 것, 그 생각 뿐입니다.
아직은 아슬아슬한 외줄을 타는 기분입니다. 내일도 모레도 함께 운동할 거고요, 저녁 식사도 제가 차릴 겁니다. 역시, 건네는 말도 짧게 할 거고요. 아기가 아닌 아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했던 나날이었습니다. 정답 없는 세상 속, 제 자식이지만 제 맘 같지 않다는 것도 인정했으니 마음도 곧 편해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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