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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살 '군포 청년'의 죽음... 대한민국이 참 부끄럽습니다

[박정훈이 박정훈에게] '미등록 이주아동' 출신 고 강태완씨의 삶과 죽음

등록|2024.11.21 12:01 수정|2024.11.21 12:01
흔한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 '오마이뉴스 기자 박정훈'과 '공공운수노조 부위원장 박정훈', 두 사람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연대를 모색해 나갑니다.[편집자말]

▲ 산재 사고로 지난 8일 세상을 떠난 고 강태완씨 ⓒ 이주와인권연구소 제공


"8일 전북 김제시 한 특장차 공장에서 30대 몽골 국적 노동자 A씨가 고소 작업대와 장비 기계 사이에 끼어서 숨졌다."

A씨의 죽음은 짧게 요약되어 단신으로 보도됐습니다. 외국인 이주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세상을 떠났다는 뉴스는 하루가 멀다고 등장하지만 주목받지 못한 비극 중 하나로 지나가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30대 몽골 국적 노동자 A씨'의 신분이 한겨레 보도를 통해 공개되면서 추모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A씨의 이름은 강태완(32·몽골명 타이왕)입니다. 다섯 살 때 엄마를 따라 한국에 왔다가 미등록 이주아동으로 살아왔습니다. 한국어밖에 할 줄 모르는, 경기도 군포에서 초·중·고를 모두 나온 군포 토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어만 쓸 줄 알던 '군포 청년'의 죽음

그러나 그는 한국인으로 대우받지 못했습니다. 학교장 재량으로 학교는 다닐 수 있었지만 그뿐이었습니다. 자기 명의의 통장과 핸드폰도 가질 수 없었고, 본인 인증을 해야 하는 모든 시스템을 이용할 수 없었습니다. 미등록 이주아동은 성인이 되면 곧바로 강제 추방 대상이 되기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선 숨어 살아야만 했습니다.

강씨는 '외국인' 신분으로 비자를 발급받고 안정적으로 살아가고자 노력했지만, 난관이 많았습니다. 법무부의 미등록 이주민 정책이 계속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강씨가 미등록 상태를 벗어나서 정착하는 과정을 취재한 <한겨레> '호준과 호이준 사이에서'(기사에선 가명 사용) 연재는 이를 잘 보여줍니다.

2019년 12월 법무부는 2020년 6월까지 자진 출국한 이들에게 범칙금과 입국 금지를 면제하고 다시 입국할 기회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이에 강씨는 자진 출국을 신청했지만, 코로나19 팬데믹이 오면서 13차례 비행기 표 취소 끝에 2021년 7월에야 몽골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사실 그가 조금만 더 기다렸다면 몽골행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됐을 겁니다. 2021년 4월 법무부는 '국내출생 불법체류 아동 조건부 구제대책'을 발표하며 국내 출생으로 15년 이상을 산 미등록 이주아동에 체류 자격을 부여했습니다. 강씨는 국내 출생이 아니므로 출국 당시인 2021년 7월엔 구제대상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구제대상 아동이 너무나 제한적이라는 인권위 권고를 법무부가 받아들여 2022년 1월에는 한국 출생이 아닌 이주아동들에게도(영유아기 입국 시 6년 체류, 영유아기 지나서 입국 시 7년 체류 기준) 체류 자격을 줬습니다.

오히려 몽골에 다녀오는 바람에 절차는 더 번거로워졌습니다. 그는 2022년 2월 입국해 단기비자(C-3)를 유학비자(D-2)로 다시 변경하는 우여곡절 끝에, 비로소 체류 자격을 얻게 됐습니다. 그리고 경기도의 한 전문대 전자공학과를 성적으로 졸업한 뒤, 전북 김제에 있는 특장차 제조업체 HR E&I에 연구원으로 들어갔습니다.

2006년부터 강씨의 체류를 돕던 김사강 이주와 인권연구소 연구위원의 부고 글에 따르면 그가 김제에 간 까닭은 법무부가 실시하는 지역특화형 비자 사업 때문이었습니다. 인구소멸 지역에서 5년 이상 거주 및 취업·창업하는 조건으로 거주(F-2) 체류 자격이 주어집니다. 5년 이상 연속 거주 시 영주(F-5)권도 신청할 수 있습니다. 영주권을 받고 귀화까지 하는 것이 목표라는 그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태완은 특수 차량의 자율주행 협업 제어 플랫폼을 개발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대학에서 배운 것과는 수준이 다른 일을 하고 있어서 모르는 게 너무 많다고, 하지만 매일 매일 새로운 걸 배우고 있어서 좋다고 했습니다. 다음날 대구에 가서 박람회 준비를 해야 하는데 연구원 중에 혼자 간다고, 박람회 때 잘 설명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고도 했습니다. " (김사강 연구위원의 부고 글 중)

강씨는 천신만고 끝에 서른두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에게는 당연하게 주어졌던 '평범한 삶'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 그가 8개월 만에 산업재해로 사망했습니다. 하늘도 무심하다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강씨에게 '선택권'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 지난 14일 고용노동부 전주지청 앞에서 고 강태완씨 유족과 시민단체가 강씨의 사망 경위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촉구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일 시작한 지 8개월 된 사람한테 그렇게 위험한 일 시켜놓고, 다치면 보호해 줄 옷 같은 것도 없고 왜 아무도 도망칠 수 있게 도와주지 않았습니까? 내 아들이 젊은 나이에 이렇게 억울하게 죽었으니까 제대로 조사해서 밝혀주세요. 내 억울함, 아들 억울함 풀어주세요. 내 아들이 왜 죽었는지 제대로 밝혀서 책임질 사람이 책임지게 해주세요." - 강태완씨 어머니 이은혜(몽골명 엥흐자르갈)씨의 기자회견 발언 중

아직 강씨의 사망 원인은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았습니다. 10톤짜리 건설 장비를 리모콘으로 이동시키다가 끼임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만이 알려졌을 뿐입니다. 김사강 연구위원에 의하면 회사에서 보여준 CCTV는 사고 순간에 끊겨있었고, 사고 당시에 대한 경찰과 회사의 설명도 다르다고 합니다. 유가족과 연대단체들은 진상규명을 위해 고용노동부에 HR E&I의 특별근로감독을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정훈님, 저는 강씨가 평범한 한국인들처럼, 아니 적어도 체류의 걱정 없이 살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봅니다. 친구들처럼 대학에 가거나, 32살보다는 조금 더 빨리 직장에 들어갈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지역에서, 조금 더 좋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는 '선택권'을 가졌을 겁니다. 그랬다면 이러한 참사를 겪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요? 그런 상상이 자꾸만 머리에 맴돕니다.

예전에 은유 작가의 <있지만 없는 아이들>에서 미등록 이주아동의 어머니 인화씨의 인터뷰를 읽었습니다. 이제야 알았지만 인화씨(책에선 가명 사용)의 아들이 강태완씨였고요. 그의 인터뷰 중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이삿짐센터에서 일하던 강씨가 술을 마시고 "엄마 너무 힘들어요. 아저씨들이 욕하고 발로 차고 그래요", "엄마 왜 이렇게 살아야돼"라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에 특히 가슴이 아팠습니다. 얼마나 힘들면 엄마 앞에서 그런 말을 했을까 싶어서요.

강씨에게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한국에서 자랐고 한국어를 쓰고 있음에도 25년 가까이 존재 자체를 부정하다가, 한참 지나서야 '외국인'으로서 너의 존재 가치를 입증하라고 하는 곳. 결국 '대한민국이 인정한 한국인'이 되고자 했던 자신의 실낱같은 희망마저 빼앗아 버린 곳... 그는 대한민국을 '나의 나라'라고 생각했으나, 대한민국은 그를 받아주지도 보호하지도 못했습니다.

2025년 3월이면 종료되는 미등록 이주아동 구제대책

▲ 지난 16일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이주배경아동청소년 당사자들이 주최하여 안정적인 체류권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 이주와인권연구소 제공


미등록 이주아동은 2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이들은 한국에서 성장했고, 스스로를 한국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분명 더 폭넓게 체류권을 보장할 수 있었음에도, 한국 정부는 2021년 이전까지 이들에 대한 어떠한 정책도 마련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 강씨 같은 이주아동들은 '유령'처럼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김기태의 단편소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에도 '유령'이 될뻔한 인물이 나옵니다. 바로 고려인 4세 김니콜라이입니다. 공업계열 특성화고에 다니던 시기에 그는 작은 희망을 얻게 됩니다.

"4세대들도 장기 체류가 가능해졌다는 사실이 니콜라이의 의욕을 불러일으켰다. 두 번 낙방했지만 2학년을 마칠 때쯤에는 선반기능사와 밀링기능사, 컴퓨터활용능력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었다."(<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118p)

기존의 재외동포법 시행령은 고려인 3세까지만 재외동포로 인정됐습니다. 그래서 고려인 4세는 성인이 된 이후부터는 한국을 떠나거나, 3개월짜리 단기관광비자로 한국과 본국을 왔다 갔다 하며 살아야만 했습니다. 다행히 법이 바뀌어서 2019년 7월부터는 고려인 4세도 재외동포로 인정받게 된 겁니다.

물론 니콜라이가 맞닥뜨린 현실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해서 냉동만두, 선풍기, 의료기 부품 공장을 거쳐 자동차 전조등 생산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12시간 동안 반경 1m 공간 내에서 같은 일을 반복하고, 두 시간을 일하면 쉬는 시간 10분이 주어지는 일이었습니다. 정규직 전환도 쉽지 않았습니다. 커뮤니티 게시판의 '스물일곱 살 인생 평가 좀'이라는 제목의 글에 달린 댓글을 보면서 친구 진주와 "우리가 그렇게 잘못 살았나"라고 되묻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산업기사 자격증을 딸 수 있고 취업 알선을 잘해주는 전문대를 알아보며" 진주와 함께 경기도 서남부의 한 도시에서 같이 살아보기로 결정합니다. 가구를 함께 사고, 집을 정리하다가 같이 포옹을 하고, 정전을 계기로 앞집 부부와 배드민턴을 칩니다.

"미미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주워 담았고, 그게 도움이 안 될 때는 불확실하지만 원대한 행복을 상상했다."(143p)

정훈님, 아마 강태완씨가 바랐던 것도 미미하지만 확실한 오늘의 행복을 줍거나, 먼 곳에 있는 불확실하지만 원대한 꿈을 꾸면서 사는 일상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서른 살까지 그 무엇도 마음 편히 가져보지 못한 채로 살았습니다. 사랑, 연대, 꿈 같은 것도 이곳에서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기반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이야기일 테니까요. 그 기반이 비로소 만들어지려고 할 때,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게다가 강씨에게 또 다른 삶을 꿈꿀 수 있게 했던 미등록 이주아동 구제대책이 2025년 3월 31일부로 종료된다고 합니다. 아직 법무부는 구제대책 지속에 대해 확답하지 않는 상황입니다. 이에 강씨 역시 구제대책 지속을 요구하는 'LET US DREAM' 캠페인 영상을 찍기도 했습니다.

현행 대책도 한계가 분명합니다. ▲ 공교육 이수라는 신청 대상 요건 ▲ 신청 시 부모에게 부과되는 과도한 범칙금 ▲ 고등학교 졸업 이후 예정된 부모의 출국 등의 규정(김사강- '장기체류 미등록 이주아동 구제대책의 평가와 체류권 보호 방안')이 미등록 이주아동의 체류 자격 신청을 막고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하물며 지금의 구제대책조차 지속되지 못한다면 미등록 이주아동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김사강 연구위원은 지난 4일 국가인권위원회 토론회에서 현행대책에서 한발 더 나아간 대책을 제안했습니다. '일정 기간 체류하고, 일정 기간 공교육을 받은 이주아동 대상으로 기존 체류자격 유무나 종류와 무관하게 성인이 되었을 때, 학업·구직·취업을 포함해 활동 범위에 제한이 없는 체류자격(징검다리 체류자격)을 신설'하자는 것이 그의 대안입니다. 단순히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넘어서, 그들이 여느 한국인처럼 살아갈 수 있도록 선택권을 늘리자는 겁니다.

대한민국이 그에게 갖춰야 할 예우

▲ 'LET US DREAM' 캠페인 영상에 출연한 고 강태완씨 ⓒ 이주와인권연구소 유튜브


강태완씨의 삶과 죽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있지만 없는 아이'로서 고통받으면서도 한국인으로 살고자 했던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의 삶을 되짚으면서, 한국 사회가 어떤 존재를 배제하고 억압하고 무력화시켰는지 되돌아봤으면 합니다. 이를 통해 만들어진 '정상'이나 '보편'의 규범이 그 안에 속하지 않는 이들에게 얼마나 잔인한지도요.

평생 자신이 한국인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던 사람을 단 한 번도 한국인으로 대우해 주지 않았던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적어도 그가 가는 마지막 길에선 예우를 다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강씨가 일하다가 왜 목숨을 잃었는지 진상을 철저히 밝히고, 책임을 묻고, 억울함을 풀어주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덧붙여 현 정부가 '이주노동자 확대 정책'에 힘을 주는 만큼, '이주노동자 안전 정책'을 강화하는 것 역시 필요합니다. 전체 취업자 중 외국인은 3.2% 수준인데, 2024년 상반기에 산업재해 사고로 사망한 399명의 노동자 중 외국인은 47명으로 전체의 11.8%나 차지했다고 합니다.

이는 체류의 안정성이 떨어지고, 일자리를 제한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주아동 출신 노동자들이 상대적으로 열악하고 위험한 환경에서 일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강태완씨의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선, 한국 사회는 지금보다는 훨씬 더 열려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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