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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 최제우, 거룩한 이의 죽음

[동학대서사시, 모두가 하늘이었다 20] 수운 최제우 선생 탄신 200주년, 동학농민혁명 130주년, 동학교조 수운선생의 최후

등록|2024.11.20 13:24 수정|2024.11.20 14:49

수운 최제우 대신사의 마지막 모습수운 선생은 갑자(1864)년 3월 10일(양 4월 15일) 하오 2시 무렵, 대구 관덕당(아미산 동쪽) 뜰에서 참형으로 순도하였다. 수운 선생이 참형이 집행되기전 목에 큰 칼을 차고 청수를 봉전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심고를 하고 계신다. 박홍규 화백이 수운 선생의 마지막 모습을,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거룩하고 성인다운 모습으로 그려냈다. ⓒ 박홍규


수운, 참형에 처하라

3월 2일(음) 조선 왕조는 결국 수운 선생을 참수(斬首_목을 베는 형벌)하고 제자 도인들을 정배와 유배를 보내라는 엄명을 내렸다. 유학의 이단이라는 미명 아래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거대한 음모는 동학의 상징인 수운 선생을 처형하기로 한다.

조선 왕조는 결심공판과 최종 판결을 통하여, 백사길, 강원보, 이내겸, 최병철, 이경화, 성일구, 조상빈 형제, 박명중 숙질, 신령인 정생 등은 유배되었고, 그 밖에 이민순, 박춘화는 방면되었으며 혹독한 고문으로 박생, 박명여는 감옥에서 죽었다. 다행히 박씨 부인과 큰아들 세정은 무죄방면 되었다.

수운 선생은 갑자(1864)년 3월 10일(양 4월 15일) 하오 2시 무렵, 대구 관덕당(아미산 동쪽) 뜰에서 참형으로 순도하였다. 이단의 동학으로 백성을 속이고 세상을 어지럽혔다는 좌도난정(左道亂正)의 죄목과 서양의 요사한 가르침을 그대로 옮겨 이름만 바꾼 사술이며 서학과 다를 것이 없다는 죄목을 뒤집어씌워 참형시켰다.

*천도교에서 발행했던 <개벽>에 실린 이광수의 단편소설 <거룩한 이의 죽음>의 끝을 장식하는 내용을 살펴본다. 거룩한 이의 죽음은 1923년 3월에 수운 선생의 순도과정을 차분한 어조로 그려내듯 개벽지에 단편소설로 발표되었다.

「(수운) 선생의 마직막 청을 들어 나졸이 냉수(청수) 한 그릇을 새로 떠왔다.
선생은 등상(凳床)에서 일어나 흙 위에 백지 한 장을 깔고, 그 위에 냉수 그릇을 놓고, 가만히 흙 위에 꿇어앉더니, 눈을 감고 손을 읍하고 한참이나 무엇을 생각하는 듯이 있다.
돌아선 사람들 중에도 선생 모양으로 꿇어앉은 이가 여기저기에 보이며, 어디선지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포덕천하 광제창생 보국안민 무극대도대덕,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 하는 소리가 울려온다.
선생은 일어나 한 번 더 사람들을 휘 둘러보고 등상에 앉는다. 칼 든자 칼을 둘러메고 뚜벅뚝벅 세 걸음 걸어나와 왼편에 서더니, "웨에이" 하는 소리에 칼을 번쩍 머리 위에 높이 든다.
햇빛이 칼날에 비치어 흰 무지개가 선다.
선생님! 선생님! 하는 통곡성이 사면에서 일어난다.」

수운 선생의 시신은 관덕당에 방치되었고 머리 부분만 남문 밖 길가에 3일간이나 내다 걸어두었다. 수운 선생의 참형을 집행한 사흘 후 순찰사는 수운 선생의 처자 즉 박씨 부인과 큰아들 세정을 불러 시신을 거두도록 한다. 이때 염습을 한 사람은 김경숙, 김경필, 정용서, 곽덕원, 임익서, 김덕원 등이다. 수운 선생이 참형을 당한 대구 장대는 지금의 대구시 중구 덕산동 일대로, 백화점 건물이 들어서 있는 번화한 곳이다.

조선 정부는 수운 선생을 참형하였으나 후계자 최경상(최시형)을 체포하지 못한 것이 큰 걱정거리였다. 그래서 감시망을 확대하고 추적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해월 선생은 1월 20일 관이 자신을 체포하려 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 젊은 도인 김춘발과 같이 대구성을 빠져나와 안동 쪽으로 숨어들어 동학의 재건을 준비한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崔先生文集道源記書)해월 최시형 선생은 1879년(포덕 20년) 11월 10일 강원도 정선군 남면 방시학(房時學)의 집에 유적편집소(遺蹟編輯所)를 설치하고 초기 동학의 역사 편찬을 시작한다. 차도주(次道主)인 영덕 출신 강시원(姜時元, 강수)이 도맡았다. 그는 한학에 능했을 뿐 아니라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동학의 도를 펼칠 때인 1861년에 동학에 입도해 초기 동학의 역사를 많이 알고 있었다. 1880년(포덕 21년) 1월 정선군 동면에 사는 전세인全世仁이 정서(精書)해서 한 권의 책으로 완성을 했다. 유적편집소에서 간행한 책자가 ‘최선생문집도원기서(崔先生文集道源記書)’ 즉, ‘도원기서’ 이다. 사진은 윤석산 교수(현 천도교 교령)께서 도원기서 필사원본을 살펴보고 있다. ⓒ 동학집강소


수운 선생 제자인 강수(강시원)은 <최선생문집도원기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아아, 용담정이여, 과연 평지가 되었구나.
오호 수운 선생의 부인이여, 자식이여, 하늘이 상심의 빛을 띠었구나.
아아, 용추의 맑은 못과 보계(용치골)는 눈물 흐르는 것 같이 소리 내어 흐르는구나. 선생의 부인과 자녀는 어느 곳에서 살아야 하는가.
아침저녁으로 탄식하고 울며, 몸을 의탁할 곳이 없어, 애처로운 저 어미와 아들은 서로 손을 잡고 돌아갈 뿐이다. 쑥같이 헝클어진 머리로 혹은 앞에 서고 혹은 뒤에 서서, 섬약한 아이와 여자가 울며, 슬퍼하며 함씨의 집에 머물렀다.」

「수운, 그 천명 그 운명 앞에 거룩한 죽음을 맞이했다.
백색 피가 치솟은 이차돈, 씀바귀 꽃대가 바람에 꺾였다.
검붉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사이프러스 나뭇잎이 떨어졌다.
하늘이 흰색으로 돌변하고 천둥에 황토가 타오른다.
수운의 순도, 초록빛 회화나무가 울음을 토해내며 서럽게 떨고 있었다.
저들은 수운을 죽이면 동학은 뿌리채 뽑혀 소생이 불가능한,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 라 믿었을 것이다.
그런데 다시 동학의 깃발은 세상을 뒤덮고, 주문 소리는 천지를 진동케 하였다.
동학, 대개벽, 대혁명, 대전쟁의 태풍이 되어 수운의 이름으로, 우주의 떨림으로,
모두가 하늘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의 고비마다 다시 또다시 등장한다.」

쌍무지개가 하늘로 이어지고

수운 선생의 큰아들 세정이 3월 13일 김경필, 김경숙, 김덕원으로 하여금 관을 옮기려 하는데, "슬프구나 슬프구나, 이 지경을 어찌 말로 하겠는가" 하며 모두 울면서 곡을 하였다. 관덕당을 출발하여 자인현 서쪽 뒤 연못가 주점에 이르니, 날이 뉘엿뉘엿 저물어 가고 있었다.

주막집 주인에게 하루를 묵어가기를 청하였다. 세정으로부터 사정을 들은 주인은
수운 선생의 순도 사실을 알고 몹시 비통해하면서 기꺼이 방을 내주었다. 방 가운데에 시신을 들게 하고, 다른 행객은 한 명도 받지 않았다.

당시 시체에 따뜻한 기운이 있어, 혹시 요행히도 회생하실까 싶어, 사흘 동안 영험이 있기를 기다리면서, 시신을 지키며 머물렀다고 한다. 이에 쌍무지개가 연못에서 일어나 하늘로 이어졌다. 하늘에 구름과 안개가 일어 연못을 둘러싸고 또 집을 둘러싸, 오색영롱함이 사흘이나 가리고 있었다.

그때 3일간 비가 왔다가 그치고 또 비가 오는 것을 반복하며 영롱한 무지개가 나타나곤 하였다. 결국 수운 선생께서 상천(上天) 즉 신선으로 화하니 구름과 무지개가 걷히고, 그 후 시신에서 냄새가 나기 시작하여 다시 염습을 하였다.

다음 날 길을 떠나 약 90리 길을 수운 선생의 시신을 모시고 16일 늦은 밤 용담에 이르러 17일 새벽, 수운 선생의 양사위 정울산, 조카세조, 해월의 매부 임익서 등이 인계받아 구미산 줄기 끝자락에 있는 대릿골 밭머리에(용담 서쪽 언덕)에 안장하였다.

표영삼 선생은 천도교회월보 등의 기록을 참고하여, 구미산 줄기 끝자락에 있는 대릿골 밭머리 현재 수운 선생의 태묘로 올라가는 중간 지점 오른쪽 아래에 있다고 한다. 수운 선생의 유해는 44년간 이곳에 모셨다가 1907년 10월 17일에, 가정리 산
75번지로 이장되었다.

수운 대신사 태묘수운 대신사 태묘는 최근 수운 최제우 선생 출세(탄신) 200주년을 맞이하여 성역화사업을 단행하였다. 천도교중앙총부(유지재단)의 지원과 김성환 천도교연원회 의장의 성금으로 대신사 태묘는 물론 가족묘, 주위환경, 진입도로, 주차장 등 대대적인 성역화사업을 마무리하였다. ⓒ 천도교중앙총부


「수운,
거룩한 이의 죽음
그의 죽음은
또 다른 탄생이다.
수많은 민초로 태어나고
억눌리고 버림받은
힘없는 사람들의
스승으로 태어나
길을 내어주고
희망을 제시할 것이다.」

순도는 새로움의 시작

수운 선생이 순도(순교)한 지 정확히 7년 후 그날, 1871년 3월 10일 이필제의 난으로 알려진 최초의 동학혁명운동인 영해 교조신원운동이 거세게 일어난다. 이후 동학은 다시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나지만, 다시 들풀처럼 일어나 전국에 그 세를 확장한다.

그리고 순도한 지 28년 후 1892년 10월 공주집회에서 충청 감사에게, 11월 삼례집회에서 전라 감사에게 수운 선생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달라는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하면서 신앙의 자유인 동학 공인운동을 벌였다.

또한 29년 후 1893년 수운 선생이 순도한 3월의 때에 맞춰 서울 광화문복합상소는 임금에게 직접 신원과 동학의 공인을 요구하였다. 복합상소에 이어 같은 3월에 보은 장내리에 무려 3만여 명의 동학도인들이 모여 신원과 동학의 공인운동은 물론 사회개혁과 정치개혁을 요구하였다.

특히 같은 시기 3월에 금구원평의 교조신원운동은 사회, 정치개혁은 물론 '척왜양창의'라는 깃발을 올리고 반봉건 반외세 운동으로서 갑오(1894)년 동학농민혁명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순도 30년 후, 1894년 동학농민혁명은 30년 전 수운 선생이 대구의 경상 감영에서 악형의 고문을 받다가 넓적다리가 부러지며, 벼락을 치는 소리에 모든 관리가 놀래자빠졌다는 그 1월에 고부농민봉기 즉 동학농민혁명의 서막을 열게 된다.

특히 수운 선생이 조선 왕조의 칼날에 목이 떨어진 그 참형의 30년 후 동학농민혁명의 대규모 봉기인 무장기포와 혁명군의 명분과 조직을 완비하여 전봉준 접주를 대장으로 추대하였던 백산대회가 모두 3월에 기포한 것은 수운 선생의 순도인 3월과의 관계에서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듯 순도는 동학의 끝이 아니라, 동학혁명으로 연결되는 새로운 시작이었다.

「수운의 순도는 새로움의 시작, 개벽군으로, 동학농민군으로, 항일의병으로, 통일선봉대로, 끝없이 태어나 한 명의 죽음이 아니라 의로운 깃발을 드는 수많은 이들의 마음과 몸속에서 영원히 함께할 것이다.」

- 계속
덧붙이는 글 이윤영 기자는 동학혁명기념관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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