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드디어 드러난 9년 전 악연, '킹덤' 시리즈의 정점

[김성호의 씨네만세 886] <킹덤4: 대장군의 귀환>

등록|2024.11.21 08:39 수정|2024.11.21 08:44
어느 자리에서만 보이는 풍경이 있다. 강가에선 세상을 굽어보는 호연지기를 기르지 못하고, 뾰족한 첨탑 위에선 물처럼 흘러가는 현명함을 깨우칠 수 없는 법이다. 앉은 자리에서 천리를 내다본다는 현자를 나는 아직 만나본 일 없다. 인간이란 부딪고 깨우치며 겪어내고 눈을 뜨는 존재가 아닌가. 모두가 앉아서 미래를 내다보는 현자일 수 있다면 인간이 처한 오늘이 결코 이 같지는 않을 테다.

선 자리에 따라 달리 보이는 풍경을 우리네 평범한 삶 가운데서도 마주할 수 있다. 이를테면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되거나, 학생이었던 이가 교사가 되거나, 또 후배였던 이가 선배가 되는 경우가 그러하다. 오로지 불만만 가득했던 신입사원도 팀장이 되고 나면 아랫사람을 다독이며 조직에 이로운 결과를 내는 법을 배워가게 마련이다. 상황이 바뀌고 나면 그제서야 '아, 그래서 그가 그리 했구나', '내 부모 또한 이러한 마음이었겠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모든 자리에 설 수 있는 건 아니다. 어느 자리는 몹시 귀하고 관의 무게는 무척이나 무거워서 아무나 함부로 앉고 쓸 수는 없는 것이다.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도 치열할뿐더러, 깜냥이 되지 않고서야 감히 넘볼 수 없는 위치가 세상엔 분명히 존재한다.

킹덤4: 대장군의 귀환포스터 ⓒ 도키엔터테인먼트


정점 찍은 '킹덤' 시리즈, 왜 보지 않는단 말인가

조직을 이끄는 리더의 자리도 그와 같다. 조직엔 수많은 구성원이 있게 마련이지만, 그를 이끄는 리더는 대개 한줌 소수에 불과하다. 권력의 정점엔 한 명의 인간이 있기 십상이고, 공화정과 같은 집단지배체제에서조차 압도적 힘을 가진 권력자를 추려낼 수 있는 법이다.

사람들은 권력을 선망하지만 과연 권력이 달콤하기만 할까. 권력 때문에 불명예를 껴안고, 권력 때문에 비참한 추락을 겪으며, 권력 때문에 목이 잘리는 일 또한 부지기수다. 힘엔 책임이 따르게 마련이고, 그와 같은 책임이란 제 자리에 맞는 시야를 갖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리더의 시야, 그 시선에 보이는 것을 리더가 되어본 적 없는 이가 어떻게 알 수가 있겠는가.

<킹덤4: 대장군의 귀환>은 벌써 네 편째 나온 <킹덤> 시리즈의 정점이라 할 작품이다. 일대 성공을 거둔 하라 야스히사의 원작 만화를 실사화한 사토 신스케의 연출작으로, 실사화 된 만화며 애니 상당수가 원작을 망친단 조롱을 듣는 와중에도 원작 팬들로부터 상당한 호평을 받아온 이례적 시리즈다.

<킹덤>이 다루는 건 중국 전국시대다. 연제조초진한위, 모두 일곱 개의 왕국이 대륙 통일을 놓고 싸우는 이 전란의 시대 가운데 대장군을 꿈꾸는 소년 '신(야마자키 켄토 분)'과 천하통일을 꿈꾸는 군왕 영정(요시자와 료 분)의 이야기를 다뤘다.

킹덤4: 대장군의 귀환스틸컷 ⓒ 도키엔터테인먼트


드디어 드러나는 9년 전의 악연

즉위 뒤 각고의 노력 끝에 서쪽 변방의 진나라를 다잡은 어린 왕 영정이다. 그러나 국경을 인접한 조나라의 대군이 몰려들고 영정은 군대를 꾸려 그를 막으려 한다. 앞선 시대 강력했던 진나라 군세는 육장이라 불리던 여섯 장수 대부분이 사망하며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다. 영정은 육장 중 마지막 남은 왕기(오오사와 타카오 분)를 불러 중임을 맡긴다. 신과 그가 백인장으로 이끄는 '비신대' 또한 왕기의 휘하로 참전한다.

조나라 군 총대장은 무신이라고까지 불리는 방난(킷카와 코지 분)이다. 압도적 무력을 지닌 그를 앞세워 공세를 펼치는 조나라군에 맞서 왕기가 이끄는 군대가 분전한다. 진과 조의 군대가 맞붙는 땅은 진나라 동쪽 국경 마양이다. 앞선 이야기에서 마양은 조나라가 차지한 영토였으나 진나라가 이를 공격해 빼앗았다. 이때 결정적 활약을 한 것이 신이 이끄는 비신대다. 지난 패배를 씻고 마양을 되찾으려 진격해 온 조와 진의 싸움은 시작부터 심상치 않다.

영화는 조와 진의 싸움이 전처럼 막무내가식 혈전으로 흘러가지 않음을 보인다. 앞엔 방난이란 일대의 무인이 섰지만, 그와 함께 조나라의 삼대천이라 불리는 또 다른 장수 이목(오구리 슌 분)이 계략을 써 왕기의 허를 찌르고 들어오는 것이다. 예기치 못한 책략을 마주한 왕기가 앞에선 방난을, 뒤에선 이목을 대적하는 과정이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킹덤4: 대장군의 귀환>은 크게 전반과 후반으로 나뉜다. 영화의 초입은 신이 이끄는 비신대가 적의 추격에 당해 낭패를 보는 이야기이고, 후반은 전체 전쟁의 양상을 좌우할 대장군 간의 싸움으로 채워진다. 특히 후반부 왕기와 방난 간의 혈전은 그들이 9년 전 가지고 있던 악연과 함께 드러나 극적 긴장을 더한다.

킹덤4: 대장군의 귀환스틸컷 ⓒ 도키엔터테인먼트


영상으로 구현한 고대 전쟁의 웅장함

사연인 즉, 9년 전 왕기와 함께 육장 중 한 자리를 차지했던 규(아라키 유코 분)가 방난에게 목숨을 잃는 일이 있었단 것.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규는 어려서 왕기의 집에 맡겨져 자랐는데, 왕기와 함께 크며 특별한 애정을 주고받았단 이야기다. 그렇게 둘의 마음이 조금씩 커져 결실을 맺기 직전에 하필이면 방난과 규가 전장에서 대적하게 된다. 과연 방난의 무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어서 규는 그 창날에 목숨을 잃게 되었단 얘기.

뒤늦게 전장에 도착해 눈이 뒤집힌 왕기가 방난과 창칼을 맞대었고, 방난은 부상을 입고 자리를 물러간 게 벌써 9년이 된 이야기다. 그로부터 수련에 수련을 더한 그가 조나라 삼대천의 자리에 복귀하여 다시금 진나라와 전쟁을 벌이게 되니, 왕기는 왕의 명령이 아니더라도 그를 베어 규의 영정 앞에 바치고픈 마음이 되었던 일이다.

만화 원작도 그렇지만 실사화된 <킹덤>의 매력 또한 파격적이며 전격적인 전투신 묘사에 있다. 실제 전국시대를 비롯한 고대 전쟁사를 깊이 고증한 전략전술이 인상적이고, 그를 규모 있게 영상화한 기술력 또한 대단하다. 보는 이를 감탄케 하는 장군과 장군 사이의 일기토 연출은 웬만한 액션영화의 쾌감을 우습게 누를 정도다. 창과 창이, 칼과 칼이 맞닿는 그 호쾌한 장면들이 극적 긴장과 적절히 어우러져 보는 이를 흥분케 한다.

매력은 그저 전투신 묘사와 재현에 그치지 않는다. 신과 영정, 왕기와 방난, 이목과 수많은 장수며 병사들의 캐릭터를 조화롭게 배치하고 활용하는 솜씨가 상당하다. 이는 원작 <킹덤>의 공으로, 대륙을 놓고 혈투를 벌이는 일곱 국가의 상황을 수많은 인물들을 통하여 적절하고 적합하게 그려냈던 것이다. 원작을 본 이라면 더욱 깊이 있게 작품 아래 깔린 사연들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거니와, 원작을 보지 않은 이라도 금세 이야기에 녹아들 수 있게끔 구성한 솜씨 또한 보통이 넘는다. 사토 신스케가 각본뿐 아니라 시리즈 전체를 이어서 연출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킹덤4: 대장군의 귀환스틸컷 ⓒ 도키엔터테인먼트


장군의 시선을 엿보도록 한다

<킹덤4: 대장군의 귀환>은 방대한 전체 이야기 가운데서 신이 제대로 된 장수로 거듭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방난에게 일격을 당한 왕기를 대피시키려 그의 말에 오른 신이 왕기와 함께 질주하는 장면은 <킹덤> 전체를 아우르는 대표적 명장면이라 할 만하다.

말 위에서 왕기는 말한다.

"눈에 들어오는 것을 잘 보도록 해요. 적의 무리를, 적의 얼굴을. 그리고 아군의 얼굴을. 하늘과 땅을. 이것이 장군이 보는 경치예요."

살아남기 위해, 또 출세하기 위해, 제 동료며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그밖에 온갖 이유로 칼을 휘두르고 발악했던 신에게 처음으로 그 너머의 경치가 들어온다. 적의 추격을 피해 내달리는 말 위에서, 포위망을 조여 오는 적을 상대로 활로를 찾으며, 신은 장군만이 볼 수 있는 시선이며 경치와 마주한다. 이 장면 이후의 신과 이전의 신은 완전히 다르다. 그저 어느 전쟁영화 속 만들어진 캐릭터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그대로 삶과 인간, 그 본질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킹덤>이 수많은 독자의 가슴에 남는 훌륭한 작품으로 자리매김한 것도, 오구리 슌을 포함한 걸출한 배우들이 두루 출연한 대작 영화로 거듭 제작되고 있는 것도 모두 이와 같은 훌륭한 장면 덕분일 테다. 선 자리에 따라 보이는 경치가 다르다는 것, 그를 이해하고 감당하며 선 자리를 가꾸어 나가는 태도는 훌륭한 인간의 길과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킹덤>이 볼 만한 가치 있는 작품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a href="https://brunch.co.kr/@goldstarsky" target="_blank" class=autolink>https://brunch.co.kr/@goldstarsky</a>)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