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영화로 만들어지는 경험, 광화문 상인들 도움 컸죠"
[인터뷰 ] 영화 <미망> 김태양 감독
▲ 영화 <미망> 스틸 ⓒ 영화사 진진
영화 <미망>은 연인이었던 한 여자와 남자가 우연히 길에서 만나 지나간 추억을 떠올리며 현재를 살아가는 이야기다. 광화문을 중심으로 서울의 랜드마크를 따라 서울의 과거와 현재가 혼재된 거리를 걷는다. 지금은 사라진 건물과 새롭게 생긴 건물의 차이처럼 고정되지 않고 계속 변하는 도시와 사람 사이 관계를 톺아본다.
누군가의 이야기 같지만 곧 내 이야기와 비슷한 부분을 발견하게 되는 영화 <미망>의 김태양 감독과 지난 18일 가회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실제 경험과 상상, 그사이의 조율"
▲ 영화 <미망> 김태양 감독 ⓒ 영화사 진진
- 개봉 전 해외 유수의 영화제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데뷔작을 선보이게 된 소감은.
"영화를 완성했지만 단순히 관객의 몫이라고 말하기에는 더 많이 무언가를 해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전에는 몰랐는데 완성 후 배급사, 홍보사 등 다양한 사람이 영화를 위해 노력하는구나 실감했다. 총 4년 동안 스태프, 배우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했는데 영화제 참석도 기쁜 일이고 개봉까지 하게 되어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다섯 배우가 본인들이 영화를 보러 갔던 예술 영화관 포스터 앞에서 사진도 찍고, 표지모델을 한 잡지도 사면서 즐기고 있었다. 그런 과정도 소중하고 재미있다."
- 영화는 단편 <달팽이>, <서울극장>과 새롭게 찍은 <소우>를 붙여 3막 형식의 장편 영화로 완성했다. 독특한 작업이지 싶은데 기획 의도와 제작 과정이 궁금하다.
"두 편의 제작 과정은 하나라고 보면 된다. 1막(달팽이) 첫 회차에 3막으로 만들어야겠다고 문득 떠올랐다. 1막이 끝났는데 팬데믹이 왔고, 2막(서울극장)은 다른 계절로 다뤄 보고 싶었다. 원래부터 장기 프로젝트를 계획했지만 생각보다 더 길어져서 3년이 흘러 버린 거다. 시간이 예산이다 보니까 준비 기간을 오래 했다. 총 10회 차가 되었다. 1막 2회차, 2막 3회차 3막 5회차였다. <달팽이>를 선공개해 얻은 성과로 <서울극장>의 제작비를 조달할 수 있었다. 두 번째 단편까지 성과가 있어서 3막(소우)의 제작비를 투자받을 수 있었다. 결국 찍고 싶은 영화를 찍으려는 전략 과정이 잘 맞았다."
- 영화 속에 시간의 흐름이 녹아들어 가 있다. 오랜 시간 공들여서 만든 '비포 시리즈'나 <보이후드>가 연상된다. 길 위의 사람들이 자연스러운 분위기에 한몫하고 있다. 거리의 사람들도 사전 협조 받기 힘들었을 것 같다.
"서울시의 거리 촬영 협조문을 받고 상점들은 일일이 섭외 요청을 했다. 다만 거리를 지나는 시민 모두에게 허가를 받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촬영 전 일대를 지나갈 때 찍힐 수 있음을 공지했다. 숨어서 촬영한 건 아니라서 시민들도 알고 있었고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상점 사장님들은 젊은 친구들을 도와주시는 의미로 허락해 주셨다. 오히려 일부러 지나가 주기도 하셨다. (웃음)"
- 영화는 결국 한 여자와 남자의 만남과 헤어짐, 조우를 담고 있다. 자전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한 건지. 모더레이터로 나온 여자 역의 '이명하' 배우 캐스팅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영화 곳곳에 제 이야기가 조금씩 들어 있다. 자전적인 일, 상상, 배우의 일이기도 하다. 1막은 제가 종로 일대에서 드로잉 수업을 했는데 이명하 배우와 길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서울극장 가는 길이라고 했고, 대화하면서 길을 가르쳐 주었던 일화다. 그날 일이 인상적이라서 집에 가서 시나리오를 끄적거렸다. 영화에서처럼 일기를 이명하 배우에게 보내주었다. 그걸 토대로 시나리오를 쓸 거라고 했다. 별거 아닌 것 같았던 일상이 영화가 된 색다른 경험을 재미있어했다."
- 하성국 배우는 홍상수 감독 영화의 메인 크루 중 한 사람이다. 홍 감독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 어떻게 연기할지 기대된 이유도 있다. 디렉팅 주안점이 있나.
"학교 동문이고 20대 초반에 만난 친한 친구 사이다. 남자 캐릭터에 떠오르는 배우가 하성국 배우밖에 없었다. 저는 일단 리딩을 한번 하는데 배우가 상상해서 만들어 온 게 방향성이 다르지 않으면 큰 디렉션을 주지 않는다. 제 의견으로만 캐릭터를 만들지 않고 대화를 통해 조율하는 단계를 거친다. 의도를 설정해서 끌어들이지는 않는 편이다. 이후 현장에서 카메라 테스트까지 하고 리허설한다. 현장에서는 디렉팅보다는 멀리서 지켜보는 롱테이크 위주로 촬영했다. 그때마다 배우가 상황에 집중할 수 있게 노력하는 편이었다."
- 그러고 보니 전반적인 캐릭터의 이름이 없다. 의도된 설정인가.
"맞다. 시나리오에는 본명으로 써 놓았다. 일상적인 톤으로 진행되는 영화라 특정한 이름이 생기는 순간 특정한 사람의 이야기처럼 보일 것 같았다. 누군가의 일이 아니라 영화 속 이야기를 내 이야기처럼 생각해 주길 바란 의도다."
"미망의 세 가지 뜻에 맞는 설정"
▲ 영화 <미망> 김태양 감독 ⓒ 영화사 진진
- 영화는 미망의 다양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 사리에 어두워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다(迷妄),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다(未忘), 멀리 넓게 바라보다(彌望)의 세 의미로 막을 대표한다. 제목을 미망이라고 지은 이유가 있을 텐데.
"원래 장편 제목은 없었는데 이 단어를 발견하고 운명처럼 받아들였다. <미망인>과 서울극장의 관계성을 설정하던 중 '미망'의 사전적 정의를 찾았고 여러 뜻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려는 이야기와 파트별 주제로도 잘 어울렸다.
공교롭게 1막을 마치고 박남옥 감독의 <미망인>(1955, 한국 최초 여성 감독의 데뷔작이자 마지막 작품)을 알게 되었다. 영화 속에서도 서울을 걸어 다니는 장면이나 원하는 것과 달라지기도 하는 콘셉트가 닮았더라. 여자의 직업이 모더레이터이다 보니 <미망인>으로 해설하면 좋겠다고 떠올렸다. 서울극장의 폐관 설정과 맞물리면서 폐관 마지막 상영으로 <미망인>이 어울리겠다고 생각했다."
- 말맛이 살아 있는 대사가 유독 많다. '12시에서 12시', '이렇게 돌아서 제자리인 것 같아도 조금씩 달라진 것 같다'는 대사가 나오는데 시적이다. 영화 속 언급된 광화문 일대의 도시 전설도 귀가 솔깃하다.
"(영화 속 대사는) 돌려서 이야기하는 한국인의 특징을 담았다. 대사를 시처럼 표현하고 싶었다. 광화문을 떠도는 도시 전설 같은 것도 있지 않나. 한 때 공구상가나 이순신 동상도 철거된다는 루머도 돌지 않았나. 기억이 허물어지고 사라지는 것과 빌딩이나 건물이 사라지는 것이 마치 헤어지고 만나는 관계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 장소 로케이션 범위를 정한 기준도 궁금하다. 광화문 이순신 동상을 중심으로 종로, 청계천, 세운 상가, 서울극장, 공구 거리 등을 빙빙 돈다.
"종로 일대 공간이 궁궐, 마천루, 노포가 섞여 있는 서울을 가장 잘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을지로도 요즘 힙지로가 되어 젊은 층 유입이 많지 않나. 시공간의 변화를 한 번에 축약할 수 있어서 선택했다. 또 저의 20대를 흘려보냈던 공간이기도 했고, 지인을 거리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의 인상을 투영하고 싶었다."
- 각 파트별로 낮에서 시작해 밤으로 끝나는 하루의 서사 구조를 취한다.
"1막의 낮은 남자, 2막의 밤은 여자의 시간이다. 3막은 낮에서 밤으로 이어져서 이틀처럼 보이기도 한다. 1막은 좌-우 이동 동선을, 2막은 앞-뒤를, 3막은 위에서 아래로 보는 시선이다. 3막의 절이 법성계나 미로처럼 보이는데 입구와 출구가 같아서 시계처럼 되돌아오는 구조와 같다. 택시를 타고 서울로 이동하는 동선도 미로를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
- 누군가와 추억이 깃든 곳이 사라져 버렸을 때를 경험한 적 있나.
"누구나 있을 거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사람의 마음, 지금은 달라져 버린 나를 인정하는 것과 동시에 그곳에 있었다는 자각의 마음과도 같다. 감정으로 표현하자면 씁쓸함이거나 후련한 기쁨일 수 있겠다."
"무해한 영화 오랫동안 만들고 싶어"
▲ 영화 <미망>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 라이브 카페 '소우'나 '한국영상자료원' 등 장소 섭외도 공들였던 것 같다.
"이자카야 소우라고 검색하거나 광화문집을 검색하면 대략 위치가 나온다. 그 근처이고 이자카야 소우와 같은 상호를 쓰고 있다. 원래 섭외하려던 곳이 사라져 아쉬웠는데 다행히 산책하다 발견한 집이었다. 소우(小雨)는 가게 같지 않은 공간이다. 마치 호빗이 들어가야 할 것 같고 그 안에 이야기가 있을 것 같은 공간이었다. 당시에는 팬데믹이라서 실내 촬영이 불가했고, 이후 영화 촬영을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승낙해 주셨다.
그 골목 일대의 다른 가게 사장님들도 협조해 주셨다. 간판 불도 일부러 켜주셨고, 옆 가게 가서 밥도 먹고, 다른 가게는 대기 공간으로 내주셨다. 그 공간에는 손님으로 누가 오는지에 따라 날마다 분위기가 달라지는데, 소우만의 암묵적인 배려가 느껴졌다. 인수 사장님이 영화에 나온다며 뿌듯해하셨고 가게에 포스터도 붙여 주시면서 홍보도 해주셨다.
서울극장에서 한국 영화 100주년 기념행사를 하는 장면은 사실 한국영상자료원이다. 제가 2017년부터 2020년까지 일했었다. 그곳에서 지금의 아내도 만나고 많은 추억이 깃든 장소다. <미망> 기술시사회를 가졌었는데 직원들이 마치 집 나간 자식이 집에 온 것처럼 반겨 주셨던 기억이다."
- 음악 선곡도 잘 맞아 떨어졌다. 어떤 계기로 사용하게 되었나.
"남자가 기타 치며 부르는 노래는 장기하와 얼굴들의 '별거 아니라고'다. 엔딩 크레디트에 나오는 노래는 장기하와 얼굴들의 '그때 그 노래'다. 노영심의 노래 '꿈에 본 겨울', '별걸 다 기억하는 남자'도 등장하는데 소우에서 흘러나오는 배경음악이기도 하다. 그밖에 음악 감독님의 자작곡도 쓰였다. 여자와 남자의 대화와 타이밍이 가사와 잘 어울려서 사전에 허락받아 사용하게 되었다."
- 영화 속에서 한국 영화 100주년을 기념하는 장면이 인상 깊다. 팬데믹을 겪고 영화를 보는 형태가 크게 달라졌다. 극장 영화가 주는 의미가 남다를 것 같은데.
"맞다. 지금은 영화를 굳이 극장까지 가지 않고 집에서 편하게 OTT를 통해 볼 수 있다. 여기에도 즐거움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극장 관람의 특별함을 포기하긴 힘들다. 불특정 다수와 함께 보면서 옆 사람의 감정에 전염돼서 함께 웃고 놀란 기억 다들 있지 않나. 매력이 다른 거라 OTT가 생겼다고 극장이 사라진다고 걱정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영화 보는 방식이 다양해진 걸로 보인다."
- 차기작은 어떤 작품이고,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해 나가고 싶은가.
"나라마다 수도를 대표하는 영화가 있다. <동경 이야기>나 <타이페이 스토리>가 떠오르는데 유독 서울에 관한 이야기는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제목을 아예 <서울 이야기>로 정했다. 시나리오는 나왔고, 아직 기획개발 중이다. 내년 여름이나 가을 촬영을 목표로 하고 있다."
- 마지막으로 <미망>을 아직 모르는 관객에게 간단히 소개해 달라.
"<미망>을 노래에 비유하자면 잔잔한 음악 같다. 극장 오셔서 피곤하면 주무셔도 된다. 가끔 피로할 때 편하게 듣고 보는 무해한 영화가 우리 영화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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