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민족행위자에 대한 해외사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자주독립 의열사 열전 5] 반헌법적인 처사가 해방 80돌을 맞는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 게르니카스페인 내전 당시 사진 ⓒ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는 헌법 전문은 웬만한 중학생들도 알고 있는 내용이다. 헌법은 국가의 기본법이고 전문은 헌법의 이념과 가치를 집약한다. 따라서 헌법 전문은 국민의 기본정신이고 추구해야 하는 기본방향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3·1운동과 임시정부의 법통'에 위배되는 언행은 대한민국의 반헌법적인 행위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누가 뭐래도 일제강점기의 시대정신은 독립운동이고 죄업은 친일부역행위였다.
이와 같은 '반헌법적인 처사'는 민족정기와 사회정의 측면에서도 크게 배치되는 것임은 물론이다. 민족 위난기에 적과 싸우는 사람들을 선양하고, 적의 편에 들어 동족에게 총부리를 댄 사람들을 배척하는 것이 민족정기이고,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같은 정리(正理)가 전도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 한국사회에 악성 권력이 판치고, 정의의 가치가 짓밟힌 것은 무엇때문이겠는가.
헌법정신과 민족정기·사회정의에 반함에도 불구하고 '반헌법적인 처사'가 지속되고 있는 것은 친일세력의 득세때문이다. 1949년 반민특위가 이승만 정권에 의해 붕괴된 이래 이땅에서는 친일의 대가로 축적한 인적·물적 기반으로 정치·언론·학계·법조·재벌·종교 등 각 분야에 걸쳐 기득권층이 형성되어 세습되고, 이들은 거대한 동맹체제를 유지하면서 친일청산을 요구하는 민족운동과 독립운동 후손들을 친북좌파로 매도한다.
식민지에서 해방된 민족, 21세기 문명국가에서 이런 일이 우리나라 말고 또 어디서 일어나고 있는지 사례를 찾기 어려운 현상이다.
스페인에서는 지난 2019년 10월 25일, 쿠데타를 일으켜 장기간 무단통치를 자행해온 프랑코 전 총통의 시신을 파내어 가족묘소로 옮겼다. 유족과 추종자들이 몇 차례 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도 이장을 명령했다. 프랑코는 1936년 쿠데타를 일으키고 3년 동안 내전을 통해 공화주의자 수천 명을 학살한 희대의 독재자다. 그리고 무엄하게도 마드리드 근교 '전몰자의 계곡'에 묻어달라고 유언하였다.
이곳은 스페인 내전 당시 희생자들이 묻힌 곳이다. 우리나라의 국립현충원에 속한다. 프랑코의 시신 이장을 주도한 페드로 산체스 총리는 "이번 결정으로 국가의 공적인 장소에 독재자를 찬양하는 도덕적 모욕에 종말을 고하게 됐다"고 의미심장한 성명을 남겼다.
스페인 산체스 정부는 프랑코뿐만 아니라 '게르니카의 학살' 80주년이 되던 2017년 게르니카 공습을 주도하고 프랑코군을 도운 독일 콘도르 비행단 조종사들의 사드리드 묘소에 그들의 공로를 치하하는 비석을 제거하기로 결정하고, 프랑코의 유해 이장 다음날 이들의 비석을 모두 제거하였다. 군부독재 시대의 잔재를 모두 철거한 '스페인판 역사청산'이다.
프랑스의 경우는 더욱 엄격했다. 프랑스혁명 후 1791년에 설립된 "국가적 영예가 있는 자에게 바쳐지는 건물"이라는 뜻의 파리 팡테옹은 최고 권력자 대통령을 포함하여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공적 인물이 사망하면 적어도 10년 이상의 유예기간을 통해 사망한 사람의 정치적 공과를 사회적으로 엄격히 검증하고 국민적 합의를 통해 안장을 결정한다.
프랑스인들이 이렇게 신중한 데는 그럴만한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다. 국립묘지 팡테옹에 제1순위로 안장된 인물 중 프랑스혁명에 크게 기여한 혁명가 미라보(Mirabeau)의 이중적인 행적때문이다.
미라보는 1789년의 프랑스혁명에 앞장서서 왕조 타도에 선도적 역할을 한 듯했지만, 뒷날 밝혀진 자료에서 국왕 루이 16세 측과 반혁명을 밀통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프랑스 정부는 그가 비록 대혁명에는 크게 기여했으나 배신 행적으로, 대혁명의 명예를 손상했다면서 가차 없이 미라보의 유해를 팡테옹의 '혁명적 영웅'의 전당에서 끌어냈다. 그 후부터 10년의 검증기간이 지켜지게 되었다.
프랑스는 이와 같은 전통에서 제2차 세계대전 뒤 친독 반역자들을 과감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특히 1916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육군을 패퇴시킨 베르된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프랑스의 국부로 칭송받는 앙리 필리프 페탱에 관한 엄격한 처벌을 들 수 있다.
페탱은 1차대전의 공로로 프랑스군의 원수로 승진하여 1940년 히틀러의 나치 독일군이 프랑스를 침공했을 때, 독일군에 항복하고 이후 괴뢰정부인 비시 내각의 수반으로서 나치 독일에 협력했다. 독일군이 18~50세의 모든 남성과 만 21~35세의 모든 독신 여성을 강제 동원할 수 있도록 한 '의무노동제'등에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레지스탕스의 명단을 나치군에 제공하기도 하였다. 친독행위를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1944년 파리 해방 직후 프랑스에서 나치협력자 처리문제를 가장 먼저 제기한 사람은 알베르 카뮈였다. 소설 <페스트>와 <이방인> 등의 작가로서 노벨문학상을 받은 그는 나치강점기 레지스탕스운동을 지도했던 인물이다. 프랑스인들이 해방의 감격과 흥분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는 나치강점기의 저항신문 <콩바>지의 사설을 통해 나치협력자의 대숙청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누가 감히 (나치 부역자들에게 용서를) 말할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칼은 칼에 의해서만 이길 수 있고 무기를 잡아야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드디어 우리가 알게 됐기 때문이다. 감히 누가 이 진리를 망각하라고 요구할 수 있겠는가? 내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증오가 아니라 기억을 기초로 하는 정의이다"라고 주장했다.
망명정부를 이끌었던 드골이 레지스탕스운동을 전개한 카뮈 등의 주장을 외면할 리 없었다. 부역자들을 처리하기 위해 설치한 파리의 최고재판소는 페탱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드골이 무기형으로 감형하여 대서양의 외딴 되섬의 감옥에 이송되어 5년 8개월 간 복역하다가 1951년 7월 23일 95세를 일기로 숨졌다.
그의 유해는 팡테옹은 물론 역대 유명 장군들이 안장되는 앵발리드의 묘역은 엄두도 못내고 현지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에게 적용된 최고재판소 판결문의 죄목은 '통적죄(通敵罪)' 즉 적과 내통한, 국가에 대한 배반행위였다.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자주독립 의열사 열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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