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지붕 아래서 먹는 닭백숙, 일품일세

[평범한 아줌마 선생의 인도여행 19] 라다크에서의 하루가 저물다

등록 2008.01.22 08:59수정 2008.01.24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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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9일 목

 

작별의식

 

“작별의식을 해요.”
“네? 작별의식이라구요?”
“우리 라다크사람들은 새로운 인연이 찾아오면 허투로 생각하지 않아요.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당신이 우리에게 온 것을 오래 기억할 거예요.”
 
돌마와 돌마 가족과의 작별의식. 돌마의 어머니는 직접 담궜다는 라다크전통 술과 향을 가져와서 불단에 올리고, 남은 여행의 안전과 행복을 빌어주는 말을 읊조렸다. 그녀의 곁에 무릎 꿇은 채 눈을 감고 읊조림을 감상한다. 뜻을 알 순 없었으나 누군가 나를 위한 기도를 올린다는 것. 이런 걸 두고 사람과 사람이 서로 엮어지고, 서로에게 속하게 되는 의식이라고 하는 게로구나.

 

‘이 시간을 어찌 가슴에 두지 않겠습니까? 저 역시 오래 기억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고마웠다. 이렇게 살아줘서. 라다크의 혼이 배어 있는 삶을 지탱해온 이들이. 라다크는 변하고 있지만, 그 흔적들은 이렇게 라다크 사람들을 통해 살아 있었다. 누군가 ‘천년의 순정’이라 일컬은 이유를 조금씩 알 것 같다.

 

우리는 천천히 동네를 둘러보았다. 벌써 바지런한 라다크 여인들과 아이들, 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일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지날 때마다 방긋방긋 눈인사를 해준다. 이들의 머리 위로 벌써 부신 아침햇살이 흠씬 내려 앉아 잔뜩 찡그린 눈가에 매달린 웃음방울들.

 

 ‘아! 저것이로구나.’

a 스투파 라다크 마을마다 구조는 같지만, 그 모양이 조금씩 다른 불탑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도 탑돌이를 합니다. 시계방향과 반대방향으로 말이죠.

스투파 라다크 마을마다 구조는 같지만, 그 모양이 조금씩 다른 불탑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도 탑돌이를 합니다. 시계방향과 반대방향으로 말이죠. ⓒ 신영미

▲ 스투파 라다크 마을마다 구조는 같지만, 그 모양이 조금씩 다른 불탑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도 탑돌이를 합니다. 시계방향과 반대방향으로 말이죠. ⓒ 신영미

 

마을 입구에는 책에서 읽었던 스투파(불탑)가 서 있다. 이 불탑은 티벳 어느 마을에서나 볼 수 있는 티벳 불교의 상징물이라 한다. 우리에겐 성황당이나, 사당 혹은 정자나무와도 흡사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서양 장기판의 거대한 졸(卒)처럼 보이는 탑들이 마치 흙속에서 솟아나온 것처럼 마을마다 입구에 서있다. 보통 횟칠한 돌과 진흙으로 만들어져 있는 데 위쪽이 점점 가늘어져 20피트 정도의 높이로 첨탑을 이루고 있다. 구조물 전체가 불교의 가르침의 근본을 나타낸다. 꼭대기에 있는 해를 감싸고 있는 초생달은 생명의 단일성, 즉 이원성의 종식을 나타내고,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굉장히 멀리 떨어져있는 것처럼 보이는 해와 달이 실은 뗄 수없이 연결되어있음을 상기시킨다.’ - 오래된 미래에서

 

돌마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손때 묻은 영문으로 쓰여진 초급 라다키 문법책(Getting Started in Ladakhi)을 선물로 쥐어주었다. “이것이 편지 쓰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하면서. 
 

a 라다키 문법책 돌마의 손때묻은 이 책은 더 이상 제 손때로 묻혀지진 못하지만 오래 간직하렵니다.

라다키 문법책 돌마의 손때묻은 이 책은 더 이상 제 손때로 묻혀지진 못하지만 오래 간직하렵니다. ⓒ 신영미

▲ 라다키 문법책 돌마의 손때묻은 이 책은 더 이상 제 손때로 묻혀지진 못하지만 오래 간직하렵니다. ⓒ 신영미

 

재 회

 

게스트하우스에 돌아오니 돌체가 손님이 오셨다며 눈으로 방향을 알려준다.

 

‘아! 벌써 정연이가 왔구나!’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 몰랐던가 보다. 서대장님과 정연이가 마당의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정연이와 얼싸안고는 어린아이처럼 매달려선 떨어져지지 않았다. 왈칵 뜨겁고 찐득한 것이 솟구쳤다. 이 무슨 까닭인가? 무슨 감정을 위로받고 싶었던 건지…. 마음이 왜 이리 나약해진 건지…. 아니면 뭔지. 그건 뜨거운 핏줄이 땅기는 듯한 흡인력이지 않았을까?  
 
첫째 아이가 아기거북처럼 막 기기 시작할 무렵의 일이 생각난다. 그 또래아기들이 그렇듯 녀석도 엄마인 나완 한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고 졸졸 따라다녀 나의 동선을 잘 살피지 않으면 안 되는 때였다. 그날도 녀석과 둘만 집에 남아 있었다.

 

녀석이 깊이 잠든 걸 확인하고 그 틈을 타서 장을 볼 요량으로, 몰래 시장 갔다가 그만 볼일이 길어져 버렸다. 예정보다 늦었다 싶어 발길을 급하게 서둘러 돌아와 보니 아니나 다를까 아이는 깨어서 아파트 현관 문 신발장 앞에까지 기어 나와 울고 있었다.

 

아마 그렇게 울어제낀 지 한참은 되었던 모양이다. 문이 열리자마자 땀방울과 눈물 콧물과 시커멓게 흙먼지로 범벅이 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던 녀석의 눈빛을 기억한다. 녀석의 얼굴을 씻겨줄 생각도 잊은 채 한참을 녀석만을 부둥켜 안았었다. 그 때 난 내가 누구와 어디에서 사는 사람인지 확인받았던 것 같다. 나는 내 아기에게 속해 있었다.  

 

“서대장님과 여기를 찾는데 한참 걸렸어. 왜 이렇게 먼 곳에 자리를 잡은 거야 싶었는데 이 마당에 앉아보니 그 이유를 알겠어.”
“솔직히 얼떨결에 그리 된 거거든.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곳이 좋아지더라구. 이젠 옮기고 싶지 않더라구.”
“데려가려 했는데, 그래…. 하는 수 없지…. 양보한다. 하지만 오늘 남은 시간 함께 보내기야. 이제 뭐할 거야??”

 

서대장님의 제안에 따라 곰파에 올라 일몰을 함께 보기로 했다. 우리는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가는 줄 몰랐다. 고산증으로 심하게 고생한 이야기가 주류. 일행 중 몸져누운 분들이 있다는 이야기까지.

 

“이 살구들! 정말 토실하네. 맛있겠는 걸? 먹어도 돼?”
“물론이야. 수확하고 남은 거니까. 진짜 맛있어. 이것도 이곳을 떠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지.”

 

서대장님은 부인에게 가져다 주면 좋아할 거라시며 살구씨를 따로 챙기신다. ‘푸웃~~’
 
일 몰

 

6시경. 산악팀 일행들이 주르륵 나타나자 레 거리에 긴 한국인 대열이 이색적인 퍼레이드를 이룬다. 등산복차림에 양산까지 받치고 있는 분들이 있어 색색이 알록달록. 

 

곰파(티벳 사원)에 오르는 길은 멀리서 본 것보다 훨씬 더 멀고 가파르다. 가파른 계단이 구불구불 이어지는데 그 끝이 보이지도 않는다. 어느 지점에서 드디어 전과는 다른 질적인 수준에 도달했다.

 

현기증으로 몸의 균형을 잃을 것만 같다. 벌써 무릎에서부터 힘줄이 늘어지면서 두 다리가 후들거린다. 직관이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빛보다 더 빨리 찾아온다. ‘더 이상 오르면 안돼!’라고. 일행에서 떨어져 중간 지점의 계단에 그만 주저앉아 버렸다.

 

자리를 잡고 앉아 지는 해가 저 넓은 파란 캠퍼스 위에 연출할 형형색색의 풍경을 기다린다. 저 텅 빈 공간이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듯이. 히말라야 산등성이 사이 분지같이 들어앉아 있는 레시내와 주변 히말라야 산세가 한눈에 훤히 내려다 보이고, 왼쪽 방향으로 멀리 레 왕궁과 남걀체모 곰파가 모래 언덕 위 궁전처럼 아기자기한 것이 그리 멀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실제 거리는 만만치 않을 것이다. 저녁바람이 제법 세차고 싸늘하여 흰 돌산과 누런 모래흙으로 빚어진 곰파 주위의 풍경을 더욱 을씨년스럽게 한다.

 

라다크 복장의 프랑스 젊은이 두 명이 어깨에 바이올린케이스를 짊어지고 무겁게 오르고 있다. 왠지 말을 걸고 싶었는데, 그들은 곰파 정상에 올라 바이올린 연주를 할 거라 했다. 역시 로맨티시트 프랑스인다운 발상이라는 생각에 기대와 환영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하하… 정말 기발한 생각이네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저흰 여행하면서 연주 장소가 나타나면 즉석에서 이렇게 연주를 합니다. 주로 야외에서 지나는 사람들과 호응하면서 연주하는 걸 즐기거든요. 오늘은 저 곰파 정상에 올라, 지는 해를 바라보며 연주하려합니다.”
“오호~~ 멋찌세요! 꼭 듣겠습니다. 몇 곡 뽑아주세요.”
“하하하. 네, 감사합니다.”
“아쉽네요. 곁에서 연주하는 모습 보고 싶지만, 목숨을 걸어야 할 거 같아서요. 더 이상 오르지 못하지만 힘차게 연주해주세요. 그럼, 두 분의 연주소리가 아래로 울려 퍼져 내려올 테지요. 기대하겠습니다. 여러분이야말로 진정한 세계인입니다.”

 

드디어 해가 서서히 떨어지고 있었다. 멀리 주황빛으로 물들어가는 설산이 보이고 잠시 후 유유히 구름떼를 붉게 물들이더니, 자신은 검은 실루엣으로 변하면서 색의 세계를 완전히 떠나보내고 있었다. 그 사이 하늘은 짙도록 파랗게 피멍들어가고 있었다. 황혼은 바라볼 때 마다 왜 이리 느낌이 한결 같지 않은지. 어디선가 바이올린 선율이 들리는 듯했다. 황홀한 순간이었다. 

 

a 일몰 라다크에 머물면서 일몰을 보는 즐거움을 놓칠 수없습니다.

일몰 라다크에 머물면서 일몰을 보는 즐거움을 놓칠 수없습니다. ⓒ 신영미

▲ 일몰 라다크에 머물면서 일몰을 보는 즐거움을 놓칠 수없습니다. ⓒ 신영미

 

a 일몰 실제는 훨씬 아름답습니다.

일몰 실제는 훨씬 아름답습니다. ⓒ 신영미

▲ 일몰 실제는 훨씬 아름답습니다. ⓒ 신영미

 

한국인 식당으로! 

 

이미 옆 사람의 얼굴조차 희미한 저녁시간이다. 오랜만에 수다다운 수다를 늘어지게 떨면서 정연이와 레거리를 활보하듯 걷고 있노라니 건드리면 탁!하고 터질 듯 희열 같은 알 수없는 기분에 싸여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몸이 근질근질하다. 마치 어느 늦은 봄밤의 열기 같은. 이런 걸 두고 이국의 정취라고 하는 겐지. 
  
산악팀은 내일 아침 새벽같이 레를 떠나 궤도를 바꿔 스리나가르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오늘밤이 마지막 회우였다. 이 시간을 최고로 즐기고 싶었다. 시간이 급물살을 타듯 빠르게 흐르고 있다. 서대장님이 일행을 돌아보시며, 
 
“오늘 저녁은 한국인 식당가서 닭백숙, 걸 하게 먹어보기로 하지요!”
  
‘닭백숙이라고라! 이국땅 멀리 여행 와서 닭백숙이 웬말인가! 첨 듣는 말이로세. 입 맛이 벌써 도나? 아직 그릇도 받지 못했는데. 쩝쩝쩝!’ 
 
한국인식당은 바글바글 발 디딜 틈 없이 한국인 손님들로 일대 혼란이었다. 허리케인이라도 불어온 듯 쌩쌩 코 빠뜨리고 일손이 놀 틈 없는 주인과 일꾼들, “엇써 옵쇼!”를 연발. 테이블에 온통 한국사람들. 코리아 타운을 방불케한다.

 

“오늘이 무슨 날이지? 어째 이렇게 몰렸을꼬?” 
“날은 무슨 날! 달라이라마께서 오신다니깐 최근 부쩍 한국사람들도 몰려오고, 일정을 좀 늦추고 더 머무는 사람도 있고, 미리 빨리 온 사람들도 있고… 한 게지.”

 

일행 중 한 분이 가져온 소고기 볶음 고추장에 양배추를 찍어 먹으니 이 또한 절묘하다. 옆 좌석에 앉은 젊은이들이 술과 바꿔 먹잔다. 즉석에서 술과 안주가 물물교환되면서 자리는 더욱 후끈 달아오른다. 일체감은 음식 앞에서 제일 잘 발휘되나보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코레아! 만만세!!!
 
옆 테이블의 정연이와 서대장님 자리로 이동. 드디어, 걸죽한 닭죽과 함께 나온 닭백숙. 그리고 열무김치. 

 

자신을 내어주어 
우리에게 보시하네.
국물에 녹아든 
닭죽맛이 일품일세.
고소한 살점이
입안에서 부드럽게 씹히네.
입술에 기름기 흐르니, 
혀끝까지 부드럽게 돌아가네.
     
한국인들의 입맛에 맞는 이만한 고단백의 음식이 또 있을까? 닭백숙은 외국 나가서 원기 보충할 때 좋은 방법이라고 한다. 왜냐? 닭은 어디서나 팔기 때문. 그리고 마늘만 넣고 삶으면 조리 끝. 간편한 보양식으로 그만이라고 어느 분이 그러셨다. 그 분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장기 배낭 여행자들에게 꼭 권하고 싶다. 왠만한 여행지에서도 닭을 구할 수 있으니, 여행이 힘겨워지고 고향이 그리울 때, 꼭 드셔보시라! 

 

서대장님은 선물이라 하시며, 뜨거운 물에 넣으면 바로 풀어져 즉석에서 시금치된장국, 명태국이 되는 포장된 분말된장 몇 봉지와 고추장 그리고 커피믹서를 주셨다. 고맙고도 고마우셔라. 속을 다스리는 데 된장국만한 것이 또 있을까?

 

비록 우리들의 작별의식은 뜻밖의 닭백숙으로 엄숙하진 않았어도 또한 라다크사람들과 다르지 않을 터. 흥겨움과 경건함의 형식이 무예 대수로우랴. 이 시간들을 기억해주면 되는 것이리니.

 

‘안녕! 그리고, 고맙습니다!’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오자마자 부엌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목이 타서 마실 물을 찾았다. 그러다가 시금치 된장국을 마시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돌체아버님의 고른 숨소리에 소리 내지 않으려 조심조심하면서, 시금치 된장국분말을 풀고 물을 잔뜩 타서 한 사발 찰랑일 정도로 넉넉히 끊였다. 그리곤 뜨거운 김에 얼굴을 부비며 훌훌 들이 마셨다. 그리고 국물이 거의 동이 날 무렵, 난 이 여행을 끝내고 돌아갈 날이 멀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온 거 같아. 두 아이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말이야. 내가 속한 그곳으로.’

2008.01.22 08:59ⓒ 2008 OhmyNews
#인도여행 #라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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