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을 벗어난 세종, 시대의 평가 앞에 서다

[서평] <세종, 실록 밖으로 행차하다-조선의 정치가 9인이 본 세종>

등록 2008.06.04 20:13수정 2008.06.05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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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을 읽다 보면 지리산을 첫 일주할 때의 느낌이 떠오른다. 화엄사에서 노고단에 오르는 가파른 산길과 까마득한 절벽 사이를 걸을 때의 아슬아슬함을 지나 세석평전에 이르렀을 때, 아! 갑작스레 펼쳐진 철쭉 가득한 평지의 아늑함이란…. 하지만 지리산 한가운데서 만난 예상치 않은 평지의 아늑함과 감미로움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나타난 바위투성이의 내리막길과 천 길 낭떠러지의 등산로로 이어졌다. 태종시대까지의 가파른 산길과 아슬아슬한 산행로, 문종과 단종시대 이후의 바위투성이의 등산로, 그 사이에 펼쳐진 세종시대라는 놀라운 평지! 우리 역사의 이와 같은 세석평전의 존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세종은 어떻게 그런 치세를 이루었는가?" (<세종, 실록 밖으로 행차하다-조선의 정치가 9인이 본 세종>, 에필로그, 279~280)

 

a <세종, 실록 밖으로 행차하다-조선의 정치가 9인이 본 세종> 겉그림

<세종, 실록 밖으로 행차하다-조선의 정치가 9인이 본 세종> 겉그림 ⓒ 푸른역사

▲ <세종, 실록 밖으로 행차하다-조선의 정치가 9인이 본 세종> 겉그림 ⓒ 푸른역사

지은이만큼이나 나 역시 참 많이 궁금하다. 세종과 더불어 가장 많이 주목받는 정조에게서 늘 보고 배우고픈 인물 곧 준거군주로 대접받았던 세종대왕. 그런데, 태평성대를 이룬 왕이라는 더할 나위 없는 칭찬을 후세대에서 받았음에도 정작 자신은 평탄하지 못한 세월을 보냈다.

 

"한 해도 끊이지 않을 정도의 자연재해로 인한 흉년과, 명나라를 비롯한 중원 대륙과의 갈등과 외환, 그리고 국왕과 신료들에 대한 탄핵이나 정책 논쟁 등은"(같은 책, 279) 대왕 세종에게 드리워진 그림자의 일부에 불과했다.

 

장자도 아니고 차자도 아닌 셋째 아들로서 왕위를 승계한 세종은 책은 좋아하나 무예에는 서툴러서 부왕 태종에게서 사랑과 염려를 동시에 받기도 했다. 태종이 보기에 세종은 늘 지혜로우며 가능성 많은 아들이었으나 그에 못지않게 '국가' 조선을 맡기기엔 뭔가 확실치 못한 불안한 후계자였다.

 

아버지 이성계를 따라 '말 위의 정치'를 해야 했던 태종 이방원은 항상 조선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할 '문화적인 정치'를 할 만한 세자를 두고 싶어했다. 다행히 "이른바 '문화적인 정치'로의 전환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정권' 차원을 넘어 '국가' 차원의 정치로 안정될 수 있다는 것을 세종은 배워서 알고 있었다."(같은 책, 16)

 

사실 세종대에 이르기까지 조선은 이씨 성을 지닌 한 '무사' 집안이 고려 정권을 찬탈하여 '정권 교체'를 한 수준 정도로 인식되어 있었다. 그 때까지도 일반 백성들 상당수는 여전히 조선을 고려와 다른 새로운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던 게다. 피의 역사도 지워야 하고 천년만년 이어질 국가 기틀을 마련하고 싶었던 태종은 당연히 이같은 자신의 고민과 뜻을 물려줄 만한 인물을 왕위에 앉히고 싶어했다. 그런 태종에게서 최종 낙점을 받은 이가 바로 세종이었다.

 

조선의 정치가 9인이 본 세종, 실록 속 세종과 견주어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인간' 세종의 고민으로부터 그의 정치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모범적인 군주' 내지 '해동의 요순(海東堯舜), 또는 '동방의 성주聖主'(율곡 이이)와 같이 역사 속에서 덧칠해진 세종이 아닌 맨얼굴의 세종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나는 <세종실록>의 세계를 여행하려고 한다."(같은 책, 25)

 

지은이는, 세종과 함께 지금껏 가장 많이 주목받고 사랑받는 정조가 가장 많이 닮고 싶어했던 세종의 '진짜' 모습을 그려보기를 원했다. 태평성대로 평가받으며 시대를 이끈 세종이 지금껏 가장 사랑받는 군주로 남아있음에도, 그의 참 모습은 어딘가 박제된 모습인 것 같다는 판단에서였다. "많은 작가들이 세종을 본격 다루지 못한 데는 세종의 '정치'에 접근하는 방식이 서툴렀기 때문이라고 생각"(같은 책, 4)했던 지은이는 그에 관한 몇 가지 이유를 들었다.

 

우선, 지은이는 세종의 정치를 '제도'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경향을 지적했다. '제도'의 관점에서 세종의 정치를 보면, 이는 세종시대의 뼈대만 보는 것일 뿐 그 안에서 활동하던 살아있는 인물과 삶은 드러내기 어려운 방법이라고 지적한 게다.

 

또한, 그는 세종의 정치를 '권력'의 관점으로 보는 경향도 지적했다. 이런 방식은 권력 다툼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이해관계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지 몰라도 그 다툼들이 지향하는 알맹이를 찾는 데는 모자람이 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같은 두 가지 연구 방향을 보완하는 방법으로 제시된, 세종의 '정치철학'을 중심으로 연구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그다지 만족해하지 않았다. 그는 "이 방법은 앞의 법·제도적 접근 및 권력론적 접근과 마찬가지로 정치를 단순화시키는 단점이 있다"(같은 책, 6)고 보았다. 그는 또, '단일한 환원론'이나 '획일적 정당화' 모두를 피하고 싶다고도 했다.

 

짧은 정조시대를 포함하여 태조에서 태종에 이르기까지 조선은 여전히 '새로운 정권'일 뿐 '새로운 국가'는 아니었다. 그런 문제의식을 지니고서 늘 다음 세대를 의식하며 정치를 펼친 태종의 뜻을 이어받은 이가 바로 세종이었다. 그런 세종 치세 기간을 두고 그저 태평성대라는 한 마디로 포장하기엔 그 속이 너무 복잡하다. 지은이는 그 복잡한 속내를 좀더 알고 싶어했다. 아름다운 시대로 평가받는 것 못지않게 우여곡절 많은 시대이기도 했던 세종시대를 좀더 생생하게 그려보고 싶었던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 정치와 삶에도 크나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세종시대를 생생하게 그려보려 했던 지은이 박현모는 그 방법으로 세종을 둘러싼 인물들을 실록과 각종 사료들에서 끄집어내기로 했다. 그들 목소리를 통해 세종과 그 시대를 재구성해보기로 한 것이다.

 

실록은 물론 각종 사료를 재구성하여 그 시대 상황 자체를 새로 꾸민 지은이는 태종, 황희, 허조, 박연, 정인지, 수양대군, 김종서, 신숙주, 정조 등 9명의 각기 다른 인물이 세종과 그 시대를 회상하듯 직접 말하도록 했다. 각 인물의 회상을 통해, 우리는 세종의 장점은 물론 단점도 보게 되며 '성군 세종'을 둘러싼 각 인물들의 평가도 얼핏 얼핏 보게 된다. 참고로, 지은이는 황희와 허조에게는 두 편을 배정했고 나머지 인물들에게는 한 편씩을 배정했다.

 

지은이에 따르면, 세종은 "좋은 울타리를 만드는 첫째 조건은 인재를 기르고 활용하는 지도자의 역량"(같은 책, 280)임을 아는 이로서 빛 보지 못하는 인재를 찾아낼 줄 아는 이었고 수많은 인재들에게서 조언을 듣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청정의 리더쉽'을 지닌 인물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세종이 결코 완벽한 인물은 아니었다. 왕위 계승에서 문제점을 드러내기도 했고, 고려왕조에 대한 지나친 부정적 인식도 거두지 못했으며 말년에는 척불논쟁으로 시간과 체력을 낭비하기도 했다. 성군 세종에 대해 지은이가 이같은 것들을 그의 문제점으로 지적하기도 했다.

 

다양한 인물과 다양한 시각에서 세종을 바라보려 했던 지은이는 "이 과정에서 우리는 '좋은 정치의 한국적 모형'과, 잘한 정치와 잘못한 정치를 구분해볼 수 있는 '정치적 판단의 기준'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같은 책, 26)고 했다.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참 좋겠지만 아무도 쉽게 장담할 수는 없는 일. 지은이의 고민과 바람이 세종의 고민과 바람과 함께 독자들에게도 있는 그대로 전해지길 바랄 뿐이다.

덧붙이는 글 | <세종, 실록 밖으로 행차하다> 박현모 지음. 푸른역사, 2007.

2008.06.04 20:13ⓒ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세종, 실록 밖으로 행차하다> 박현모 지음. 푸른역사, 2007.

세종, 실록 밖으로 행차하다 - 조선의 정치가 9인이 본 세종

박현모 지음,
푸른역사, 2007


#세종, 실록 밖으로 행차하다 #박현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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