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여행 가는 며느리 이해 되세요?

속속들이 구식 며느리는 꿈꾸기 힘든 명절 여행

등록 2009.01.25 10:02수정 2009.01.25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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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명절 장을 보는것 부터 음식을 만드는 것까지 며느리 손이 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명절 장을 보는것 부터 음식을 만드는 것까지 며느리 손이 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 김혜원


"이번 설 연휴에 뭐 하세요?"
"뭐하긴, 만두 빚고, 떡국 끓여서 차례도 지내고 새배 손님도 치르고 그래야지."
"힘드시겠다. 며느리들 명절 스트레스가 장난 아니라던데 정말 그러시겠어요."
"한 두 해도 아니고 이젠 이력이 나서 그런지 요령이 생겨서 그런지 그리 힘든 건 모르겠어. 그런데 새댁은 언제 시댁에 내려가? 시댁이 지방이라 고생되겠다."
"호호호, 우린 이번 연휴에 여행가기로 했어요."
"정말? 차례도 안 지내고 새배도 안 드리는 거야?"
"에이~ 이럴 때보면 구식이시더라. 지난주에 미리 가서 선물이랑 용돈이랑 챙겨 드리고 왔구요. 시부모님도 명절에는 차도 막히고 오며 가며 고생만 된다고 오지 말라 던걸요."
"새댁은 좋겠네. 부럽네 정말. 잘 다녀와."


분리수거를 하러 나갔다가 마주친 아래층 결혼 2년차 새댁이 이번 설에는 시댁에 가는 대신 남편과 여행을 가기로 했다면서 아침부터 결혼 24년차 늙다리 아줌마의 속을 긁어댑니다. 세상이 많이 변하고 풍속도 많이 달라져 설이나 추석 차례를 콘도나 휴양지에 차려놓고 지낸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당장 설이 낼 모래인데 일할 걱정보다는 놀러갈 마음에 들떠있는 새댁을 보니 마음 한 구석에서 왠지모를 서늘한 바람이 지나가네요.

"새댁은 좋겠네... 잘 다녀와"

"요즘 젊은 부부들은 설에 고향에 가는 대신 여행을 가는 모양이더라. 아무리 시댁에서 허락했다고 해도 일년에 한번인데 차례도 지내고 어른들께 인사도 드리고 하는 게 맞는 거 아니니? 아무리 세상이 좋아졌다고 해도 좀 너무한 거 아니니?"

저녁에 퇴근을 하고 조카 녀석을 데리러 온 동생에게 아침에 만난 새댁이야기를 하면서 은근히 내말에 동조해 주길 바라니 웬걸? 동생 역시 제 편을 들기보다는 새댁 편을 들고 나옵니다.

"우리도 여행가기로 했어. 우리 시댁은 제사를 지내는 집도 아니고 어른들 찾아뵙는 것도  설 지난 후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고. 아래층 새댁뿐이 아니라니까. 언니는 설 연휴에 콘도예약이 넘치고 해외여행자수도 엄청 늘어났다는 뉴스도 못 들었나봐. 둘째 언니도 어디 콘도 잡아서 가족들과 놀러간다고 하던데."
a  음식 장만하고 손님 대접을 하느라 설 연휴를 즐길 새가 없는 구식며느리들

음식 장만하고 손님 대접을 하느라 설 연휴를 즐길 새가 없는 구식며느리들 ⓒ 김혜원


아래층 새댁처럼 자기들도 설 연휴를 틈타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는 동생 역시 그런 자신들을 이상하다고 여기는 저를 바라보면서 조금은 한심하고 조금은 불쌍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더군요.


사실 결혼 한 해부터 지금까지 24년간을 단 한번도 빠지지 않고 제사며 차례를 모셔온 저로서는 설이나 추석과 같은 명절날, 그것도 며느리가 부엌에서 일을 하는 대신 여행을 간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 할 일이랍니다.

명절 한두 달 전부터 명절 스트레스로 쪽골이 쑤셔오고 명절이 지나고 나면 온몸이 두드려 맞은 듯 아파도 그저 이것이 여자로 태어나 한 집안의 며느리로 들어간 나의 운명이려니 생각하면서 마치 종가집의 종부라도 된 듯 가끔씩은 그런 스스로를 대견스럽게 까지 여기고 살아 왔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들 젊은 며느리들 이야기를 듣고보니 전통적인 방식으로 제사를 모시고 명절을 따져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고 하는 것이 특별히 자랑스러울 일도 대단한 일도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그저 한 가문이 혹은 한 가정이 살아가는 그들만의 방식일 뿐 그것이 잘한다 못한다 라며 일정한 잣대를 가지고 판단할 것은 아니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조금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주변을 둘러보니 제가 그동안 특별히 의식을 하지 않고 살아서 몰랐을 뿐, 아래층 새댁과 두 동생들처럼 명절 때마다 가족끼리 혹은 부부동반으로 여행을 간다는 주변 사람들이 그 전부터도 적지 않게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그런 그들을 이상하다고 여겨왔지만 어쩌면 그들 역시 저처럼 명절과 제사모시기를 금과옥조처럼 여기며 몇 달 전부터 부산을 떨어대는 며느리들을 이상한 눈으로 볼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니 지금까지 살아온 저의 인생 한쪽이 왠지 빛을 잃은 듯 맥이 빠지네요.

속속들이 구식 며느리인 나...버럭 화내는 남편
a  설 전에 방아간에서 떡을 해오는 것도 며느리들의 일이죠

설 전에 방아간에서 떡을 해오는 것도 며느리들의 일이죠 ⓒ 김혜원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느지막히 집에 들어온 남편에게 과일을 까주며 넌지시 말을 건네 보았습니다.

"여보... 그런 얘기 들었어? 요즘 젊은 부부들은 설 연휴를 콘도에서 보낸다더라. 해외여행도 많이 간다던데. 연휴동안 콘도도 동이 나고 비행기표도 구할 수가 없데."
"뭐 그럴 수도 있지. 요즘엔 차례 안 지내는 집도 많잖아."
"그래서 말인데 혹시 우리 집도 그러면 안 되겠지?"

순간 버럭 소리를 지르는 남편.

"뭐라구? 그걸 말이라고 해.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소릴하고 있는 거야. 남이야 어떻게 살든 말든 우린 우리 방식이 있는 거지. 그렇게 가고 싶으면 나 죽은 뒤에 가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고 그전까지는 안 돼."
"한번 해 본 소릴가지고 왜 그렇게 화를 내고 그래. 그냥 해본 소린데."
"왜 쓸데없는 소릴해서 큰 소릴내게 하나? 명절 준비하느라 애쓸 것 같아서 기분 좋게 보너스랑 새배 돈이랑 준비해 왔더니 기분 잡치게 할래? 그래 다 그만두자."

처음부터 남편의 동의 따위를 얻어내고자 했던 말도 아니지만 버럭 화를 내는 남편을 보니 은근히 속이 상한 것도 사실입니다. 설 연휴라고 따뜻한 나라로, 스키장으로 온천장으로 놀러가는 신식 며느리들을 보면 연휴 내내 부엌에서 빠져나오기 힘든 구식 며느리들은 염장이 나지 않을 수 없거든요.            

하지만 이제 잠시 흔들렸던 마음을 접으려 합니다. 남편도 남편이지만 저도 명절날 놀러가는 것 보다는 형님, 시어머니, 조카들과 마주앉아 만두 빚고 부침개질하며 수다를 떠는 것이 훨씬 마음이 편할 것 같거든요. 그러고 보니 동생이나 새댁의 말처럼 저는 겉이나 속이나 속속들이 구식며느리가 맞는 모양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쌀가루 같은 함박눈이 소담스럽게 내려있네요. 뉴스를 보니 눈길이지만 벌써부터 귀성 행렬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저도 앞치마랑 작업복을 챙겨 시댁으로 설음식을 준비하러 갑니다.

설에 큰 눈이 오면 그 해 농사가 풍년이라던데 기축년 한해는 저 눈처럼 풍성하고 소담스러운 한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눈길 조심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설날 #구식며느리 #신식며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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