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은 책을 어떻게 읽는가

[책이 있는 삶 112] 도시에서 전철로 출퇴근하는 사람이 읽는 책

등록 2009.08.20 14:26수정 2009.08.20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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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ㄱ. 회사원이 읽는 책 - 아침부터 낮까지

 

 지난주부터 한글학회에 일을 나오고 있습니다. 한글학회는 서울 종로구 새문안길에 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신나게 달려 볼 수 있는 길이지만, 자전거로 인천과 서울을 오가면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아기하고 씨름할 기운은 바닥이 나기 때문에 전철을 타기로 합니다. 전철에 자전거를 싣고 용산과 새문안길 사이를 오가도 괜찮으나, 아침저녁 출퇴근길에 전철에 자전거를 싣기란 몹시 어렵습니다. 가득가득 타는 사람들만으로도 넘치니, 자전거가 아니라 바퀴걸상이나 아기수레 또한 들어갈 구멍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전철칸 한쪽 구석에 기대어 서고 가방을 내려놓습니다. 한손에는 책을 듭니다. 사진쟁이 전민조 님이 엮은 《사진 이야기》(눈빛,2007)를 읽습니다. 인천에서 떠나는 전철은 서울과 가까워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차고, 이내 꾹꾹 눌러담듯 서 있는 사람은 서로서로 밀고 밀치면서 에어컨 돌아가는 전철은 후덥지근합니다. 문득, 이 전철이 1990년대에는 선풍기가 탈탈 돌아가며 '인천에서 서울 가는 급행'이 없었다는 생각이 납니다. 또한 1980년대에는 선풍기조차 제대로 없거나 망가져 있기 일쑤였다는 생각이 납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여기에 2000년대와 2010년대를 앞둔 이날까지 죽 돌아보고 헤아려 보건대, 전철로 오가며 책을 손에 쥔 사람은 나날이 줄어들지 않느냐 싶습니다. 그리고, 예나 이제나 '전철을 타면서 책을 읽는 한국사람은 참 적다'는 이야기를 누구나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 "사는 것에 멋있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닌 것처럼 사진도 멋있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닌데, 그런 사진을 추구했던 내 모습이 사진의 노예로 보일 수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74쪽/최광호)

 

 흔들흔들 선 채로 밑줄을 그으며 읽습니다. 이 대목에 밑줄을 긋는데 제 앞쪽으로 어느 아가씨가 불쑥 끼어들더니 신문을 쫙 펼치며 읽습니다. 신문 끄트머리가 제 얼굴에 닿을락 말락 합니다. 제 뒤에 서 있던 아저씨가 아주 큰 소리로 재채기를 합니다. 틀림없이 입에 손을 안 대고 재채기를 했다고 느낍니다.

 

 전철은 어느덧 신도림역에 닿으면서 거의 모든 손님이 내립니다. 신도림역에서 내린 절반쯤은 강웃마을로 갈 테며, 다른 절반쯤은 강아랫마을로 갈 테지요. 집에서 나와 전철역에 처음 들어설 때부터 아직까지도 손에 책을 쥔 사람은 열 손가락으로 꼽기 어려울 만큼만 보입니다. 사람이 오징어떡처럼 눌리는 전철에서는 손에 책을 쥔 사람을 더더욱 볼 수 없었습니다.

 

 숨막히는 전철칸에서 시달리다가 서대문역에서 내려 걷습니다. 광화문역에서 내리면 조금 덜 걷지만, 몇 걸음 더 걷더라도 아침햇살을 고스란히 받으면서 천천히 팔월 기운을 느끼고 싶습니다. 몇 분쯤 하느작하느작 거닐면서, 사람 걷는 길을 뚝 끊고 지붕 없이 새로 만든 '자전거 주차장' 어설픈 모습을 봅니다. 울퉁불퉁한 거님길을 느끼고, 밝고 가벼운 차림인 아가씨와 까만 양복 차림인 아저씨를 숱하게 스칩니다. 낮밥때가 되니 온 길거리에 사람들로 그득하고 퍽 많은 사람 손에는 커피잔이 쥐어져 있습니다. 회사원은 새벽바람으로 일어나 낮밥을 먹을 때까지 책을 손에 쥘 겨를이 몇 분이나 있을까 궁금합니다.

 

 

 ㄴ. 회사원이 읽는 책 - 저녁부터 밤까지

 

 서울에서 여느 회사원과 마찬가지로 하루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길에 책을 한 권이나 두 권쯤 마저 읽습니다. 인천에서 서울로 오는 전철길에서는 얇은 책은 한 권 반쯤 읽고, 조금 두툼하면, 아침에 2/3쯤 읽고 집으로 가는 길에 마저 다 읽습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저 다 읽고 나서 새로운 책을 가방에서 꺼내지 못합니다. 처음 집에서 길을 나설 때에는 맨 첫 역에서 타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맨 첫 역이 아니기도 하나,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전철을 탈 때에는 책을 펼치기 어려울 만큼 오징어떡이 되기 일쑤입니다. 이런 전철에서 책을 읽자고 하는 사람이 미쳤거나 바보이거나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그렇지만 여섯 시나 여섯 시 반에 칼퇴근을 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퍽 드물지만, 오징어떡이 되는 가운데에도 끝끝내 책을 펼쳐 읽는 책사랑꾼을 한두 사람씩 꼭 보곤 합니다. 거의 모두 지치고 고단해서 곯아떨어져 있는데, 또는 집으로 돌아가서 만날 사람하고 수다를 떠느라 바쁜데.

 

 칼퇴근을 했어도 서울에서 좀더 머물며 사람을 만나고 느즈막하게 전철을 타면, 퇴근 물결에서 벗어난 까닭에 조금 널널합니다(그래도 미어터지기는 비슷비슷). 술 몇 잔을 걸쳤으면 해롱거리는 가운데 책을 펼칩니다. 둘레에 저처럼 해롱거리면서 손잡이를 붙잡고 기우뚱거리거나 용케 자리를 얻어 앉아 고개를 푹 숙이거나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잠든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찍 돌아가나 늦게 돌아가나 책 한 번 손에 쥘 만한 틈을 내기란 더없이 빠듯합니다. 아침저녁으로 읽으며 금세 다 읽어치운 《그녀들에 대한 오래된 농담 혹은 거짓말》(호미,2009)이라는 책 끄트머리 빈자리에 몇 마디 끄적입니다.

 

 '책을 읽으려고 하는 사람은 틈을 내고 힘을 내고 돈을 내어 책을 읽는다. 책을 읽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말미를 주고 집을 주고 돈을 주어도 책을 안 읽는다. 그 말미와 집과 돈으로 다른 놀음놀이에 젖어든다.'

 

 다 읽은 책은 집어넣고 새로 읽을 책을 꺼내고 싶으나, 급행전철이 부천과 송내와 부평과 동암과 주안까지 지나지 않고서는 꽉 끼고 밀리고 눌린 틈에서 꼼짝을 할 수 없습니다. 하는 수 없이 다 읽은 책을 다시 펼치며 밑줄 그은 대목을 곱씹습니다.

 

 "십오 년 동안 한결같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수요시위는 매주 수요일 12시 일본 대사관 앞에 가면 만날 수 있는 상설 퍼포먼스로 인식되는 측면도 있다 …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지만 이슈로서의 가치를 갖지 못한다고 생각한 언론도 더는 이 문제를 돌아보지 않는다." ..  (236쪽)

 

 책을 덮고 생각에 잠겨 봅니다. '사람들은 꼭 책을 읽어야 하나? 이렇게 고단하고 지치도록 살아가는 사람들한테 책을 꼭 쥐어 주어야 하나? 책을 쥐어 준다면 무슨 책을 왜 쥐어 주나? 우리는 왜 우리 스스로 책하고 멀어지도록 살아가나? 우리한테 책이 있어 무엇이 좋고, 우리한테 책이 없어 무엇이 나쁠까? 오늘날 우리들은 한결같이 더 돈을 많이 주는 일터를 바랄 뿐, 돈을 덜 주더라도 책 한 권 읽을 겨를을 넉넉히 내어주는 일터를 안 바라고 있지 않나? 내 몸과 마음을 사랑스레 돌보고 아끼는 길은 어느 누구도 안 가르칠 뿐더러, 우리 스스로 찾아 배울 뜻이 없지 않는가?'

덧붙이는 글 | - <시민사회신문>에 함께 싣는 글입니다.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2009.08.20 14:26ⓒ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 <시민사회신문>에 함께 싣는 글입니다.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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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에 대한 오래된 농담 혹은 거짓말 - 그 곳에 가면 그 여자가 있다 2

김현아 지음, 박영숙 사진,
호미, 2009


#책읽기 #책이 있는 삶 #회사원 #책 #책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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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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