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아빠

동물원을 다녀와서

등록 2010.04.05 19:21수정 2010.04.05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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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나는 꿈을 꿨다. 한없이 군인들이 몰려오고, 바싹 긴장한 채 집에 있었다. 이것저것 챙기기도 하고. 잠 들기 직전 읽다만 토지의 영향인지

 

1부 4권p44

이같은 전쟁 얘기로 들떠 있다고 해서 마을에 어떤 별다른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난리가 난다는 바람에 보리떡 서말을 먹는 사람도 없었고 천체의 운행을 따르는 해와 달과 같이 여느 때의 봄과 다름 없는 일상이었다. 날이 새면 농부들은 일찍부터 밭에 거름을 내 아낙들은 봄 길쌈에 여념이 없고 소년들은 쇠죽을 쑤고 조무래기들은 염소와 송아지를 몰고 둑으로 나갔다. 마을 사람들은 먼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보다 하늘의 기색과 끝없이 드러누운 들판 빛깔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았다.

 

 꿈해몽을 찾아보니

...혹시지금 취업 준비중 이신가요? 아님 학생신분으로서 복귀 준비중이신가요? 전쟁에 관한 꿈은 본인에 현재 일거리나 아니면 앞으로 취업전선에서 생활을 의미하구요 만약 본인에 일을 하는 분이라면 좀더 활발한 일을 한다는 의미의 꿈이 랍니다 ...이런 나름 솔깃한 답변이 있었다.

 

전쟁, 월요일 아침, 직장에 모두들 전쟁터로 향하는 군인들처럼 나도 조만간, 어제 동물원에서 본 지친 아버지들과 함께 하려는가?

 

어제 동물원에 갔었다. 광합성 하기 좋은 날씨였다.

 

쉬폰 원피스 입은 여성들이 돋보이고, 유모차 끄는 엄마도 그리 밝을 수 없었다. 대부분 연인, 유모차를 끈 가족 단위였는데 이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는 이들이 있었다.

 

아.버.지. 아니 아빠

 

a 서울대공원 들어가는 입구 그대, 여자친구와 서울대공원에 향하는 길 마냥 설레는가! 머지 않아 그대도 지친 어깨로 저 유모차를 끌며 딸과 실랑이를 벌이는 아내의 눈치를 한 없이 보는 아빠가 될 것이오.

서울대공원 들어가는 입구 그대, 여자친구와 서울대공원에 향하는 길 마냥 설레는가! 머지 않아 그대도 지친 어깨로 저 유모차를 끌며 딸과 실랑이를 벌이는 아내의 눈치를 한 없이 보는 아빠가 될 것이오. ⓒ 권영은

▲ 서울대공원 들어가는 입구 그대, 여자친구와 서울대공원에 향하는 길 마냥 설레는가! 머지 않아 그대도 지친 어깨로 저 유모차를 끌며 딸과 실랑이를 벌이는 아내의 눈치를 한 없이 보는 아빠가 될 것이오. ⓒ 권영은

 

아버지라 불리는 이들은 그 근처 청계산에 등산을 다녀왔을 테고, 많아봐야 대 여섯살난 아들, 딸의 아빠는 그토록 피곤해 했다. 곳곳에 있는 의자, 평상 마다 벌러덩 누워있는 이들은 유모차 옆, 애기 옆 아빠였다.

 

엄마가 어디로 갔는지 유모차와 덩그러니 길바닥에 버려져 있더라도, 조기유학으로 엄마와 딸이 돌아와 그들만의 돈독함을 현란한 영어로 풀고 있어도 아빠는 어김없이 어디선가는 졸거나 쉬고 있었다. 애기가 닌텐도와 함께 평상에 널부러져 있으면 아빠는 멍하게 앉아 있었고, 엄마와 애들이 '하얀 곰은?' '백곰! ' 신나게 퀴즈놀이를 해도 절대 동참하지 않다 갑자기 일어나며 '가자!' 한 마디 던지는 것도 아빠였다.  

 

금요일 늦게까지 일했을테지. 그리고 동료와 술 한잔을 외쳤을 거고. 한잔 더! 하며 서로가 서로를 붙잡으며 주말 가족 나들이 생각이 점점 옅어졌을 거고.

 

숙취의 불편함과 그로 인해 벌어질 아내와의 신경전, 술도 덜 깼는데 강렬히 내리쬐는 동물원에 그것도 한참이나 돌아다녀야 하는 상황. 그건 그들에게 주말의 또 다른 전쟁터일 것이다. 슬프게도 술로 그토록 단단히 얽어매 놓았던 동료애는 이 곳에서 통하지 않고, 각가 알아서 살아남아 직장에서 다시 만나야 한다.

 

쉬이 그럴 수 있을까. 하루 해는 점점 더 길어지고, 동물원에서 실컷 놀고 먹고 보고 하느라 지친 애들과 아내는 차에서 곯아떨어져도, 이 미어터지는 도로를 뚫고 집까지 무사 귀환해야 하는 임무가 남았으니. 주차장에 길게 늘어선 차량이 더 없이 처량해 보이는 일요일 오후 6시 였다.  

 

전쟁과 아빠.

 

그런 전쟁을 이젠 우리 아빠, 아니 아버지는 그만 두고 싶어 하신다. 아직 전쟁터에 나서지 않은 딸 때문에.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며, 내가 나서는 것보다 본인이 더 낫기도 하다며. 그러는 사이 아빠는 머리가 하얗게 새어 아버지가 되었고 본래 이젠 미래의 손주까지 생겨 투명해질 지경이다. 이젠 의롭게 제대를 해야할 때. 그리고 나와 교대해야 할 때. 

 

전쟁터를 꽃밭까지는 아니지만, 어제의 동물들이 뛰어 놀았을 법한 초원으로 변모시키겠다는 야무진 꿈을 안고 가 보고 싶다. 꿈속에서 씩씩하게 행진하는 군인들 틈에 끼여서. 아니면 토지의 여념집 아낙처럼 오늘 먹을 깻잎 한 웅큼, 고추 몇 개 따며 의연하게 오늘의 전쟁을 지켜볼 수도 있겠지.  

 

월요일! 시작이다.

2010.04.05 19:21ⓒ 2010 OhmyNews
#서울대공원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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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육아 중에도 인권을 생활화하는 인권영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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