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러 동북향 집 지어 저항의 삶 살았던 만해

[걸으면서 느끼는 서울의 역사와 문화 33] 혜화동, 성북동 걷기

등록 2010.05.16 10:55수정 2010.05.16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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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동의 장면 가옥을 지나 길을 따라 오르면 '올림픽기념 국민생활관'이다. 이곳은 원래 조선 후기의 문신인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이 살던 집터'이다. 건물 뒤편에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57호로 그가 직접 쓴 '증주벽립(曾朱壁立-어떠한 역경을 만나더라도 굽히지 않고 자신의 소신대로 살겠다)'이라는 글자가 암벽에 새겨져 있다.

 

a 올림픽기념 국민생활관  송시열의 서울집터

올림픽기념 국민생활관 송시열의 서울집터 ⓒ 김수종

▲ 올림픽기념 국민생활관 송시열의 서울집터 ⓒ 김수종

우암은 서인의 지도자로 노론(老論)의 영수였다. 주자학의 대가로서 율곡 선생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예론(禮論)에도 밝은 인물이었다. 청나라를 정벌하려한 효종 임금의 뜻을 받아 북벌을 주창한 학자로 알려져 있다.

 

올림픽기념 국민생활관의 좌측으로 길을 잡아 조금 길을 오르면 '흥덕사터(興德寺址)'다. 이 지역은 태조 이성계의 서울집이 있던 곳으로 태종 1년(1401년)에 집터 일대를 희사하여 흥덕사를 창건한 곳이다. 이후 세종 때 불교를 선종과 교종의 두 종파로 통합할 때 교종의 도회소가 되는 등 불교사에 크게 공헌한 절이었으나, 연산군 때 폐사된 후 그 흔적조차 사라진 절이다.

 

a 흥덕사터  이성계의 서울집터

흥덕사터 이성계의 서울집터 ⓒ 김수종

▲ 흥덕사터 이성계의 서울집터 ⓒ 김수종

절터를 알리는 표지 석 앞에 '이곳부터는 누구든 말에서 내려서 걸어서 입장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은 '하마비(下馬碑)'가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큰절이었음에 틀림없는 것 같지만, 연산군의 횡포 앞에 절은 사라지고 지금은 흔적조차 없는 것이 초라하기도 했다. 하지만 표지석만은 또렷하게 남아 손님들을 반기고 있었다.

 

다시 길을 돌아 경신중고교, 서울과학고를 지나면 서울성곽 길에 닿는다. 이곳부터 성북동이 된다. 성북구와 종로구가 이곳에서 갈리고 유명한 '서울왕 돈까스'집도 보이고, 좌측으로는 북악산을 오르는 성곽길이 보인다.

 

a 실상선원  성북동

실상선원 성북동 ⓒ 김수종

▲ 실상선원 성북동 ⓒ 김수종

이제부터 성북동으로 접어든다. 바로 길 앞에 '실상선원'이다. 절이기는 한데 인적이 없고 너무 조용하다. 입구에 실상선원이라는 간판과 '무의탁노인상담'이라는 간판이 나란히 있는 것을 보면 단순히 스님들의 수도도량만이 아니라 절에서 운영하는 양로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a 실상선원  바위에 붙은 돈

실상선원 바위에 붙은 돈 ⓒ 김수종

▲ 실상선원 바위에 붙은 돈 ⓒ 김수종

입구에서부터 장독이 상당히 많이 있고, 안으로 들어서니 범종도 있고 불상도 있는데, 동전을 잔뜩 붙이고 있는 바위가 놀라워 보였다. 무슨 기운이 있는지 아니면 바위에 자기(磁氣)라도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나도 동전을 하나 붙여볼까 하다가 그냥 사진만 한 장 찍고 나온다.

 

이어 '덕수교회'다. 원래 1946년 정동 서학재에서 출발한 덕수교회는 1984년 성북동으로 이전하여 '복음의 메아리가 울리고 사랑의 나눔이 풍성하며 화목함이 있는 신앙공동체' 형성을 위해 힘쓰며 지역사회에서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다.

 

a 덕수교회  참, 아름다운 교회다

덕수교회 참, 아름다운 교회다 ⓒ 김수종

▲ 덕수교회 참, 아름다운 교회다 ⓒ 김수종

당일은 결혼식이 있어서 야외에는 식사가 준비되고 있었고, 드레스를 곱게 입은 신부와 턱시도를 입은 신랑이 분주하게 오가는 모습과 하객들이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가운데 우리들 일행도 결혼식 직전의 모습을 신기한 듯 사진을 찍으며 살펴보았다.

 

교회를 둘러 본 다음, 교회 뒤편에 위치하고 있는 '이종석 별장'으로 갔다. 별장은 1900년경에 지어진 30평 규모의 작은 한옥으로 사랑채와 안채, 행랑채로 구성되어 있다. 동북쪽에 안채가, 북쪽에는 행랑채가 위치하고 있으며,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3칸의 규모로 남향집이다.

 

대청 옆 마루에 '일관정'이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고, 추녀에는 풍경을 달았으며 회색벽돌로 영롱담을 쌓아 집 터 주위를 둘러막았다. 특히 안채로 드나드는 일각대문과 바깥마당의 우물가는 집터 주위의 수목, 마당의 소나무 등과 어울려 예스러운 멋을 풍긴다. 가옥 뒤편으로는 소나무와 전나무로 숲을 이루는 낮은 언덕이 펼쳐져 있고, 안마당에는 소박한 정원이 가꾸어져 있다.

 

a 이종석별장  거상 이종석의 여름별장이다

이종석별장 거상 이종석의 여름별장이다 ⓒ 김수종

▲ 이종석별장 거상 이종석의 여름별장이다 ⓒ 김수종

지을 당시부터 뱃사공을 시작으로 젓갈장사, 한강에서 오는 목재, 충청도에서 올라오는 양곡과 해산물 장사 등으로 돈을 모아 마포에서 가장 많은 상선을 소유했던 거상 이종석이 여름 별장용으로 지은 한옥이다. 이 건물은 조선말 거상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되기도 하며, 개화기 개량한옥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한옥 양식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건축물이다.

 

서울시 민속자료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한옥은 '소설가 이재준'이 거주하기도 하여 '이재준가'라고도 불리기도 하며, 지난 100여 년 동안 여러 명사들의 교육처가 되었고, 여러 문인들이 창작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1985년 덕수교회가 인수하여 20년 동안 목사관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a 피정의 집  복자사랑

피정의 집 복자사랑 ⓒ 김수종

▲ 피정의 집 복자사랑 ⓒ 김수종

덕수교회를 나오면 이웃에 '피정의 집 복자사랑'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등의 건물이 보인다. 건물이 참 아름답고 김대건 신부 등의 조각상도 멋있다. 성북동에는 의외로 교회와 절이 많다. 고급주택들만 즐비한 곳으로만 생각을 했던 성북동에 장애인학교도 있고, 수도회도 있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이어서 '성북다문화빌리지센터' '성북구립미술관'이다. 돈이 많은 성북동이라 구립미술관도 있구나! 건물도 리폼을 아주 잘했다. 이곳은 작년 11월 옛 성북2동 주민센터를 개조하여 만든 것이다.

 

a 성북구립미술관  미술관

성북구립미술관 미술관 ⓒ 김수종

▲ 성북구립미술관 미술관 ⓒ 김수종

다민족 다문화 커뮤니티 공간인 성북다문화빌리지센터는 외국인 상담코너, 카페테리아, 다목적실 등이 있으며, 통번역 지원과 종합상담서비스를 제공한다. 또 한국어교실, 어린이 방과 후 다문화교실, 한국전통문화체험, 요리강좌, 서울생활오리엔테이션, 사진교실, 세계문화강좌, 성북구 문화투어, 전통혼례축제, 외국인이 참여하는 요리, 에세이, 한국어 경연대회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나란히 붙어 있는 성북구립미술관은 제1전시실, 제2전시실, 수장고, 프로그램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길을 다니 나서면 성북동에 유명한 식당 가운데 하나인 '금왕돈까스'가 보이고 소설가 '상허 이태준 선생의 가옥'을 개조한 찻집 '수연산방'이다. '문장강화' '무서록' '황진이' '호동왕자' 등을 쓴 월북 작가 이태준 선생이 살던 집으로 그의 손녀가 국내 최초로 한옥을 개조하여 만든 전통찻집이다.

 

a 상허 이태준 가옥  수연산방

상허 이태준 가옥 수연산방 ⓒ 김수종

▲ 상허 이태준 가옥 수연산방 ⓒ 김수종

집의 규모가 작아 많은 손님이 찾을 수 없는 게 아쉽지만, 본채에는 사랑방, 안방, 마루까지 모두 6개의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다고 한다. 당일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아서 안을 들여다 볼 수는 없었지만, 안에서 차를 한잔하면서 담장 너머로 북악산 자락을 바라보면 참 좋을 것 같은 곳이다. 이태준 가옥은 서울시 민속자료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어 '국화정원' 같은 식당들을 구경하다가 우리 일행은 '만해 한용운(韓龍雲) 선생'이 머물던 서울시 기념물 제7호 '심우장(尋牛莊)'으로 갔다. 심우장은 남향으로 지으면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게 된다고 만해가 1933년 일부러 동북향으로 지어 살던 집으로 일제에 저항하는 삶을 살았던 만해는 끝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4년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a 심우장  만해 한용운의 집

심우장 만해 한용운의 집 ⓒ 김수종

▲ 심우장 만해 한용운의 집 ⓒ 김수종

심우장이란 명칭은 선종의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열 가지 수행 단계 중 하나인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尋牛)에서 유래한 것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장방형 평면에 팔작지붕을 올린 민도리 소로수장집으로 한용운이 쓰던 방에는 그의 글씨, 연구논문집, 옥중공판기록 등이 보존되어 있다. 만해가 죽은 뒤에도 외동딸 한영숙이 살았는데 일본 대사관저가 이 곳 건너편에 자리 잡자 명륜동으로 이사를 하고 만해 사상연구소로 사용되었다.

 

홍성 출신으로 백담사에서 출가한 만해는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중국에 가서 독립군 군관학교를 방문, 이를 격려하고 만주, 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1913년 귀국, 불교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어 범어사에 들어가 '불교대전'을 저술, 대승불교의 반야사상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1916년 월간지 <유심(唯心)>을 발간,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다.

 

시에 있어 퇴폐적인 서정성을 배격하고 불교적인 '님'을 자연으로 형상화했으며, 고도의 은유법을 구사하여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제도를 노래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a 심우장 현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글이다

심우장 현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글이다 ⓒ 김수종

▲ 심우장 현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글이다 ⓒ 김수종

심우장은 혼탁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좌표가 되기에 충분한 가치와 의미를 담고 있는 작은 한옥으로 특히 동북향으로 터를 잡은 것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이 시대의 지식인들에게도 자기의 본성을 찾고자 하는 만해와 같은 반골정신이 필요한 것 아닌가 하는 의문에 잠겨본다.

 

역사, 문화와 함께 하는 서울시 종로/중구 걷기 모임

네이버 카페    http://cafe.naver.com/daipapa

2010.05.16 10:55ⓒ 2010 OhmyNews
#성북동 #만해 한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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榴林 김수종입니다. 사람 이야기를 주로 쓰고 있으며, 간혹 독후감(서평), 여행기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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